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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신작시/김설희/무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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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설희
무밥
먼저
칼에 베인 자국들을 잘 안쳐야 해
냄비 바닥이 안 보이도록 층층 눕혀야 해
방어의 첫 방법은
앞으로 다가올
불길의 높이와 세기를 재는 일
그리고는 식은 밥을 상처 한가운데 가만히 얹어야 해
한 톨의 밥알도 바닥에 닿지 않도록
그러면 밑의 것이 위의 것의 머슴이 되지
아래서 받쳐주거나 밖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동안
아랫것들은 감정의 충돌이 잦지
바닥을 경계라 해도 될까
불길에 칼자국들이 뜨다 가라앉다
남은 물을 죄다 짜서 맞서는 동안
불길은 그치지 않고
검게 탄 무는 제 감정을 새까맣게 토해놓지
도마뱀의 잘린 꼬리같은 냄새를 풍기며 한 마을을 뒤덮지
그 때쯤이면 식은 밥도 냄새로 범벅이 되지
사실 무의 감정은
예리한 칼날에 몸이 잘릴 때부터지
감정은 경계가 없다
라고
냄새가 흘림체로 온 마을을 휘갈기며 돌아다니고 있어
바닥과 바닥 사이
물이 마르면
바닥이 되는가
바닥과 바닥이 맞닥뜨리는
그 사이에는 또 무엇이나 납작해지는가
손 발 입 코 날개, 내장까지 뭉그러진 검은 몸뚱이가
비릿하다
어디서 누구의 피를 쪼아 먹었을까
신선한 것만 훔치고 닿는 것마다 짓밟아대고 찔러서 빨아내고 단내의 근원지를 찾아 끙끙대다 뻗친 더듬이로 춤추던, 뚱뚱한 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 납작하다
바닥에 붙은 먼지처럼
금방 스러질 어떤 삽화 같다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바닥과 바닥 사이
짐짝처럼 눌린
비대한 모기 한 마리
김설희_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산이 건너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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