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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단편/김소윤/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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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23-01-0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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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단편/김소윤/숨다 


김소윤 소설가


숨다



어떤 기억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평생토록 잊히지 않고 떠오른다. 기억을 관장하는 대뇌의 해마가 대법원의 판관처럼 이것은 이쪽으로, 저것은 저쪽으로 하고 가르며 기억의 집행 기간을 결정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 일만큼은 판관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을 꼭 잊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신의 계시처럼 기억이 흐릿해지기는커녕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또렷해진다.

언젠가 내가 딱 한 번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듣고 있던 친구가 거짓말이라며 고개를 흔들고 웃었다. 진실을 의심한다기보다 거짓이길 믿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날카롭게 베인 깊은 흉터처럼 기억은 평생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아무 일에도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했으며 다만 몇몇의 여자들을 만나 가학적이다시피 한 관계에 매몰되거나 벗어나거나 해온 초라한 인생에는 분명히 그때의 영향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그 집의 악연을 저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 탓해본들 소용없다. 증오나 원망이라는 것은 대상이 분명할 때만 효력을 발휘할 뿐,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다만 기억되거나 망각 될 뿐이다. 


동네 아이들 몇몇이 패거리를 이루어 몰려다니던 시절, 우리는 그 집을 ‘붉은 집’이라고 불렀다. 수백가구의 주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만고만하게 밀집되어 있는 평범한 동네 안에서, 유독 눈에 띨 만큼 강렬한 붉은 대문 색깔 때문이었다. 특히 그 집은 사나운 불독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고, 개의 한쪽 눈이 불길한 징조처럼 온통 붉은 핏줄로 뒤덮여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강렬한 적의敵意로 가득한 ‘붉은 집’ 다웠다. 

우리는 틈만 나면 어울려 온 동네를 와당탕 뛰어다니고 때론 남의 집 담장을 기웃거리며 초인종이나 누르는 개구쟁이들이었기 때문에 붉은 집에 대해서도 무심할 리 없었다. 옆집 옥상에 몰래 기어 올라가 그 집을 흘겨보며 곰배팔이나 문둥이가 산다는 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불독에게 쓰레기나 깡통 따위를 던져 괴롭혔다. 눈 오는 날엔 눈을 모아 대문 앞에 쌓아놓고 비오는 날엔 하수구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는 등 우리들의 말짓거리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집들과 달리 그 집의 주인은 이놈의 자식들! 하고 쩌렁쩌렁 고함을 질러대거나 담벼락에 경고문을 붙여놓는다든지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머리가 큼직하고 얼굴이 네모난 불독만이 너부대한 입을 한껏 치켜들고 사납게 짖어댈 뿐이다. 심지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빨래를 널어두는 일도, 장바구니를 끼고 시장에 나오는 일도 없었다. 결국 아무런 반응이 없는‘붉은 집’에 대한 관심도 시들부들해지고 말았다. 그 집에 대한 흥미를 잃음과 비슷한 시기에 패거리들끼리의 의리도 그럭저럭 꺾어진 것은 머리가 굵어진 탓이기도 했고 공동의‘적의’가 희미해진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열 세살이 되었다. 아마 그해 처음으로 몽정을 했을 것이다. 

유월, 초여름의 기세를 넘어서 점차 습도 높은 더위가 엄습해오고 길가의 제라늄이나 글라디올러스 같은 외래종 꽃들이 붉은빛으로 활활 타오르던 어느 날, 우리 반에 전학생이 나타났다. 학기 중에 전학을 오는 일도 흔치 않을뿐더러 그 무렵 옆 동네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로 떠나갈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전학 소식은 학급에 소요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유민중, 선생님은 이름을 칠판에 쓴 후 아이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이는 수줍은 듯 고개만 끄덕였다. 핏줄이 들여다보일 만큼 하얀 얼굴에 머리칼이 노란 아이였다. 아이들의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차차 커졌다. 전학 온 친구니 잘해주도록 하고…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한 아이가 외국 사람이예요? 하고 크게 물었다. 그 질문이 모두의 심중을 대변이라도 하듯 교실은 일시에 고요해졌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은 막 쪼개진 석류 속처럼 놀랍도록 붉어졌다. 선생님이 마른 헛기침을 했다. 그저 멜라닌 색소가 부족한 거다. 얼굴에 점 알지? 멜라닌 색소가 모여서 그런 점이 되는 건데, 어떤 녀석은 그게 많아서 새카맣고 여기 민중이는 그게 조금 부족한 거야. 약간의 모멸과 긴장에 휩싸인 아이의 눈동자는 희미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서 앉아라. 선생님이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가 살그머니 걸어와 앉았다. 내 뒷자리였다. 얼굴에 점이 많은 내 짝꿍이 뒤를 흘낏 돌아보고는 쿡쿡 웃었다. 계집애 같어… 나도 뒤를 힐끔 돌아보니 아이는 또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인다. 책상을 긁는 손가락이 계집아이처럼 가느다랗고 길어서 얼핏 촉수가 더듬는 것 같았다. 이상한 녀석이다. 짝꿍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나는 짝꿍에게 넌 멜라닌 많은 녀석이다, 하고는 키드득 숨죽여 웃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아이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별다를 것도 없는 교과서에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겁먹은 새끼강아지 같은 그 모습은 애처롭기도 하고 괜한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탱구라고 불리는 영구 녀석이 건들건들 다가오더니 희떠운 눈으로 물었다. 넌 어디서 왔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이 저녁녘 노을처럼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파, 파주. 아이는 말을 더듬었다. 시골에서 왔구나? 탱구는 입을 비틀어 웃었다. 그리곤 우리에게 동조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 녀석 시골에서 왔나 봐. 시골에서는 얼굴이 까맣게 된다는데 얘는 거꾸로 하얘졌네. 너 밀가루 집 아들이야? 하고 녀석은 잔인하게 웃었다. 아, 아니야. 아이는 항변했으나 분노라기보다는 사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이들 특유의 악의란 약한 것들에 더 무자비해지기 일쑤다. 탱구는 반 아이들이 다 들으란 듯 외쳤다. 그럼 네 아버지 미국 사람이야? 붉다 못해 타오를 듯 상기된 아이의 얼굴은 보기가 딱했다. 아니야! 아이는 쥐어짜듯 외쳤다. 아… 너 외계인이구나 하고 탱구는 비웃음을 흘렸다. 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 붉고 푸른 눈으로 탱구를 노려보았다. 몇몇은 따라 웃고 몇몇은 외면하고 있었으나 바로 뒷자리의 일이라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녀석이 나를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것은 애처로움과 원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얼마 전, 시골로 끌려가 보신탕이 되고 만 누렁이가 낑낑거리며 뒤돌아볼 때의, 그 께름칙하고 뜨끔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제 앞날에 대해 알고 있을 게 뻔한 나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쯤 해둬, 씹탱. 나는 내뱉듯 말했다. 탱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입을 비죽이 내밀며 너답지 않다는 둥 구시렁거리며 금세 자리를 떴다. 길 건너편에 사는 녀석을 우리 패거리에 끼워주는 것이 나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녀석이 계속했다면 다시는 우리 동네 패거리에 끼워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장난질이나 개구쟁이 짓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와 녀석들의 다른 점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고마워. 민중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짝꿍이 또 킥킥 웃었다. 너랑 사귀고 싶은가 봐.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민중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후 선생님이 엄격하고 무서운 얼굴로 학급 친구를 괴롭히거나 놀리면 혼쭐이 날거라 경고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점차 민중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사실상 그 말고는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남다른 아이와 친구가 되려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청소시간에도, 민중은 되도록 남들과의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한 듯 굴었다. 한창 또래집단이 형성되어 여자애들은 화장실도 혼자 가지 않으려는 나이였다. 사내 녀석들도 혼자 서성거리거나 하면 당장에 외톨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민중은 살금살금 걸어 다니고 계집애처럼 얌전히 앉아 낙서나 하며 왁자한 소란 속에서도 고요하게 지냈다. 

어느 체육시간엔가 나는 발목을 삐어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뜨거운 햇살과 지독한 흙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우 몰려다니며 공을 차고 피구를 했다. 걔 중에서 눈에 띠는 것은 역시 민중이었다. 어미 떼에게서 낙오된 오리새끼처럼, 아이는 무리를 쫓아 무던히도 뛰었지만 한 번도 따라잡지 못했다. 아이들이 빠른 것인지 녀석이 처음부터 포기하고 달렸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참이나 떨어진 별의 위성처럼 끝없이 주변을 맴돌 뿐 결코 닿을 수는 없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수돗가로 아이들이 몰려올 때, 민중은 한참 동안 골대 앞을 서성였다. 혼자서 공을 차고, 그 공이 골대 안에 데굴데굴 굴러 들어간다. 나는 녀석의 반복되는 바보슛을 열 번쯤 헤아리다가 친구들과 함께 교실로 돌아왔다. 민중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이 시작한 후에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중의 옅은 땀 냄새가 후텁지근한 오후의 바람과 함께 가끔 코끝을 스쳤다. 그때 분명 내 안에서는 어떤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상한 녀석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아이로 비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녀석이 본디 가진 것이라기보다 바로 내 안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과제목록을 필두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물놀이 조심할 것, 식중독 조심할 것, 과제물 잘 챙겨올 것 등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가 끝나자 아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선풍기 한 대 없이 푹푹 찌던 무더위마저 창밖으로 상쾌히 밀어낼 듯한 기세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가져온 화분을 챙기거나 교과서 등속을 챙기며 분주했다. 나는 전에 다쳤던 발목이 약간 불편했기 때문에 짐을 들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텅 빈 교실에 남아 엄마가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렸다. 당시 엄마는 한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교시간 후 들리겠다고 약속을 해둔 터였다. 

방학을 맞은 오후, 홀로 교실에 남아 있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오랜 전쟁이 끝나 병사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기차나 트럭을 놓쳐 홀로 남은 패잔병 같았다. 칠판은 얼룩덜룩한 분칠에 지저분하게 덮여 있고 우르르 몰려나가느라 밀쳐진 책상들은 삐뚤빼뚤 흐트러졌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볼 일이 있으신지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고, 책상 밑이나 문이 열어젖혀진 복도에는 누군가 흘리고 간 프린트물이나 자질구레한 문구 따위가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책가방을 메고 되돌려 받은 미술작품 따위를 책상위에 잔뜩 올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가끔 내 볼을 타고 흐른 땀이 황토색 면 반바지에 톡 하고 떨어져 동그랗게 번졌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나는 몇 달 전 만들었던 탱크모형에 이마를 기대고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서조차 뜨거운 햇살 아래를 헤매며 땀을 뻘뻘 흘렸다. 사막 같은 벌판을 헤맬 때에 온 사방에 신기루가 번뜩였다. 간신히 오아시스를 발견해 막 손을 담그는 데, 그 손끝을 누군가 맞잡았다. 잤니? 낯익으면서 낯선 목소리다. 부옇던 눈을 바르게 뜨자, 푸른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눈동자가 나타났다. 놀랐으면 미안해. 민중이 속삭였다.

집에 안 갔어? 나는 갑작스레 세상에 내팽개쳐진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난 항상 늦게 가거든, 민중은 조금도 더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나는 하교 길에 한 번도 민중을 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대게 왁자지껄한 소동과 무리끼리의 소통이 이루지는 하교 길에 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삼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들어줄게. 민중은 내 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늦게 전학을 온 탓에 민중의 짐은 책가방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녀석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마도 본능적인 경계심이었을 게다. 됐어, 너도 집에 가야하잖아. 민중은 뜻밖에도 활짝 웃었다. 우리 같은 동네 살아. 몰랐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보다, 환하게 드러난 민중의 새하얗고 고른 치열이 더욱 놀라웠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복도 밖으로 나섰다. 창피하지? 민중이 물었다. 나랑 가는 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중이 내 짐을 추켜올리며 앞서 걸었다.

여름 오후의 골목길은 들끓는 태양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전 즐겼던 오수의 영향으로 약간은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민중의 뒤를 따랐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선 각기 다른 서너 개의 골목길을 지나야 했다. 첫 번째 골목은 문구점과 구멍가게들이 즐비해 있다. 민중은 가끔 땀을 닦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두 번째 골목은 그다지 넓지 않은 횡단보도를 건너야했다. 오가는 차량이 없었으므로, 민중과 나는 자연스럽게 눈빛을 주고받은 후 빨간 신호등임에도 저벅저벅 길을 건넜다. 그런대로 번듯한 주택이 이어지고 개가 몇 마리 짖어대는 두 번째 골목을 지나 세 번째 골목길로 접어든다. 이 골목길은 어른 두 명 정도가 나란히 걸으면 딱 맞을 좁다란 길이었으므로 우리의 거리는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마침내 네 번째 골목길을 향해 널따란 대로를 가로지르면서, 나는 민중이 내가 가야할 방향을 거침없이 짚어내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느꼈다. 같은 동네라고 해서 모두의 집을 알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일일이 따져 묻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둔각으로 기운 오후의 태양은 변함없는 기세로 활개를 치며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고 목덜미와 겨드랑이를 축축한 땀으로 적셨다. 그 날은 아마도 중복 무렵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민중의 존재나 엄마의 무소식, 방학의 희열, 가끔 욱신거리는 다리의 통증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얼음을 몇 개 집어넣은 시원한 물 한 잔만을 갈망했다. 잠깐만, 나는 민중을 불러 세웠다. 어느 집 밑으로 뻗어난 손바닥만 한 그늘에 몸을 웅크렸다. 힘들어? 민중의 옅게 돋아난 황금빛 귀밑머리 아래로 땀이 줄줄 흘렀다. 오늘 무척 덥다, 녀석은 손바닥을 펼쳐 내 쪽으로 바람을 불었다.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바람이었다. 말릴 기운도 없었다. 어쩌면 그날 나는 가벼운 감기나 소화불량 등에 걸렸을지 모르겠다. 그저 눕고 싶었고, 냉수를 마시고 싶었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뱅글뱅글 돌았다. 민중이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안 되겠다, 하고는 내 팔을 제 어깨에 걸어 멨다. 녀석이 가는 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바로 옆 골목길 끄트머리에 자리한, ‘붉은 집’이었다. 무언가를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녀석은 빠르게 초인종을 두 번 누른 후, 대답이 없자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엄마가 잠드셨나, 하고 말한 것 같았다. 엄마? 나는 생각했지만 이내 ‘불길한 저주’같은 불독이 귀가 따갑도록 짖어대며 달려드는 통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석영아! 민중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렸다. 엉덩이뼈가 격렬하게 아파오고 불독이 다가와 더럽고 따가운 혓바닥으로 내 볼을 핥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속이 미식거리면서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실제로 했을 지도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소파 위에 반팔 런닝셔츠를 입고 누워있었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천장과 거실 벽은 당시 유행하던 진한 갈색의 루바로 장식되어 있었고 깜박거리는 시야 사이로 레이온 커튼이 흐느적거렸다. 발 끝 아래 커다란 박제 독수리가 눈을 부릅뜨고 있고, 한편에 자리한 묵직한 괘종시계에서는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비벼 떴다. 괜찮아? 민중이다. 녀석은 메리야스에 반바지 차림으로 내 머리 맡에 앉아 부채질을 해주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몇 시야? 엄마는 늘 다섯 시쯤 돌아왔다. 약속까지 지키지 못해 마음이 급할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느긋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네 집에 전화해두셨어. 마침 민중 엄마가 물기 어린 손을 닦으며 주방 쪽에서 나왔다. 학부모 총회 명단에 전화번호가 있었어. 낮엔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더라. 천천히 저녁 먹고 가. 낮으면서 높고 찌를 듯 하면서 또 저음이 깔린 독특한 목소리였다. 여성스럽게 기른 웨이브 머리를 하나로 묶고 하얀 앞치마를 둘렀으나, 오히려 크고 굵은 체형과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 한 날카롭고 기다란 눈매가 나로 하여금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석영아, 나랑 게임할래? 축구게임기 있는데. 쏟아지는 오후의 빛 속에서 보드랍게 미소 짓는 민중의 투명한 얼굴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새삼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내가 벽에 등을 기댄 사이, 민중이 재바르게 달려가 냉수를 떠왔다. 여기 살아? 나의 뻔한 질문에 민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하고 물으면서는 주방 쪽 눈치를 살폈다. 민중은 머뭇거리며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하기는 우리 패거리가 아무리 잠잠해졌다고 해도 ‘붉은 집’ 주인이 바뀌는 대사건을 몰랐을 리 없다. 더구나 저 불독이 버티고 서서 이 집의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질 않는가. 나는 이 미스테리하고 음울한 집에서 민중이 살아왔다는 데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뜻밖에도 평범하고 아늑한 집안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놀랐다. 가끔 달그락거리며 바쁘게 오가는 민중 엄마가 언뜻언뜻 비칠 때는 까닭 없이 불안하기도 하고 묘하게 설레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간 ‘붉은 집’에 상상했던 모든 것을 대번에 배신하는 정황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일으킨 것이리라. 

민중과 축구게임을 세 번 했다. 내가 두 번 이기고 녀석이 한 번 이겼지만, 민중은 동생에게 져주는 착한 형처럼 순박하게 웃을 뿐이었다. 밥 먹자, 민중 엄마는 여전히 독특한 음색으로 우리를 불렀다.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저녁식사였다. 갈비찜, 잡채, 소고기미역국, 튀긴 생선과 몇 가지의 반찬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가운데 놓인 화려한 색감의 과일샐러드였다. 높고 깊은 투명한 볼에 그득 담긴 포도, 사과, 귤, 바나나, 메론 등속이 땅콩가루와 마요네즈 소스에 버무려져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풍겼다. 민중 엄마는 작은 접시에 그것을 조금씩 덜어주셨다. 민중은 샐러드를 아삭아삭 맛있게도 먹었다. 너 항상 이렇게 먹어? 민중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소곤거렸다. 된장찌개에 김치, 콩나물반찬 뿐인 우리 집 식탁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사실은 오늘 내 생일이야. 민중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담담히 말했다. 생일이라고? 나는 새삼 미역국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날에 우연치 않게 끼어든 것이 난처하고도 당혹스러웠다. 너네 아빠는? 지금은 집에 없어, 하고 대답한 것은 민중 엄마였다. 그늘진 눈 밑으로 수심이 어려 있었다. 출장 중이거든, 하며 웃었지만 그 집이 늘 주던 인상처럼 약간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으므로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저녁식사는 훌륭했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과 쿠키까지 배가 터지도록 밀어 넣고 민중이 주는 이유 없는 선물꾸러미까지 받고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에게 몇 가지 잔소리를 듣고 뒤늦게 선물을 열어보니, 축구공이 들어 있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것이었다. 


나는 민중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반경은 늘 그 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패거리들의 모임이 결성되거나 운동장, 공터 등에서 친구들이 모이게 될 때,  민중은 결코 끼려 하지 않았다. 딱히 내 쪽에서 그러한 경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민중이 원한 일이었다. 민중은 나를 초대하는 것이 가능할 때, 조용히 전화를 걸어왔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사이 방학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야했기 때문에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설사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던 날이더라도 나는 민중의 청을 따랐다. 민중의 집에 가면 우리 집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장난감이나 책, 음식들이 가득했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이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같은 소설들을 그때 처음 읽었다. 더디 읽거나 지루해하는 부분은 민중 엄마가 말로 설명해주었다. 손가락 끝으로 문장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민중 엄마는 다정하고 친절했다. 민중은 턱을 괴고 가만히 들으며 질문을 하거나 내 쪽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민중의 얼굴은 반질반질한 계란처럼 둥글고 매끄러웠으며 가끔씩 푸른빛을 내뿜는 눈은 깊고 고요했다. 종잇장처럼 창백한 피부 밑으로 홍조가 드러나거나 사라질 때 녀석의 얼굴은 이제껏 본적 없는 순수함으로 빛났다. 마치 청정한 하나의 별 같았다. 종종 내 심장은 이상하리만큼 뛰었다. 나는 괜스레 가슴을 두들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민중은 피아노를 잘 쳤다. 반드시 방음이 된 피아노실에 들어가서야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녀석이 피아노를 칠 때 민중 엄마와 나는 곁에 놓인 소파에 눕거나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도 우리는 문득 까닭 없는 흥분에 휩싸여 광적으로 즐거워하며 웃어대거나 노래를 불러 젖힐 때도 있었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는 민중 엄마는 사실은 본인의 격정에 못 이겨 이야기에 심취하거나 노래에 젖어드는 때가 많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끼어들었고 그들은 나를 본래 있던 구성원 중 하나인 것처럼 대했다. 어느새 나는 그들의 친구였고 가족이 되어 있었다. 

민중 엄마는 때때로 담배를 피웠다. 꼭 주방 한 구석에서 피우며 우리에게는 나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여름내 대부분 그랬듯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에 소매가 없는 느슨한 니트를 걸친 편안한 차림이었다. 대개 호쾌하게 웃으며 개구지게 굴었는데, 가끔은 별스럽지도 않은 작은 일에 갑작스레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럴 때 민중은 내 손을 잡아끌어 슬며시 빠져나왔다. 엄마가 요새 우울하신가봐, 하고 속삭였다. 그 슬픔이, 내가 빈번하게 집을 드나들면서도 민중 아빠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실과 연관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는 둘이서만 다락방에 기어 올라가 책을 읽거나 게임을 했다. 책장을 넘기는 민중의 어깨와 내 어깨가 맞닿을 때, 게임에 열중하여 서로를 밀치거나 살결이 스칠 때, 다락방엔 달콤한 나른함과 흥분이 동시에 일었다. 젖은 땀과 습기로 인해 서로의 체취가 선명해지던 장마철, 그 기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 정체를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노라면 민중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하게 우리를 불러 간식을 내어주거나 흘러나오는 팝송의 뒷이야기 혹은 연예계나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걸어왔다. 잘 알아듣지 못할 때, 그녀는 마치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코끝을 긁으며 웃었고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몹시 크고 뼈대가 굵은 손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민중 엄마가 결코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필요한 물품과 식재료 등은 언제나 전화로 주문했다. 배달꾼이 초인종을 누르면,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불독은 더 이상 나를 물려고 달려들지 않았다. 민중 엄마는 바깥의 뜨거운 볕이 부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현관으로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고 각종 식재료와 물건을 함께 정리했다. 간혹 그 중엔 내 몫의 선물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줄곧 실내에서만 지냈다. 언젠가 바깥으로 그들을 끌고 나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민중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민중 엄마는 난처한 일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조른 끝에 결정된 우리의 유일한 야외놀이는 옥상에서 즐기는 물총놀이 정도였다. 그나마도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숨죽여 놀아야했는데, 가끔 너무 웃겨 배꼽이 빠지도록 뒹굴면서도 소리를 낼 수가 없어 몹시 괴로웠다. 밖에서 놀다 들어온 민중의 양 볼은 벌겋게 익어 쉬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민중 엄마가 갈아준 감자 팩을 하며 서로를 놀려댔다. 

물론 민중의 집에 초대를 받지 못한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엔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찌는 듯한 더위와 지루함을 묵묵히 견뎌야했다. 잠시 잊고 있던 여름이 일시에 폭주하는 기분이었다. 그저 메리야스 바람으로 팬티만 입고 누워 시체처럼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몇 번이나 먼저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들이 나만큼이나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긴다고 믿었으므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 이해하려 애썼다. 붉게 떠오른 태양이 하얗게 빛을 발하다 다시 붉게 떨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음 날은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그럭저럭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었고, 다행히도 다음날엔 늘 나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방학이 흘러 마지막 한 주만을 남겨두었을 때, 나는 부모님에게 방학과제를 미뤄두었다는 이유로 호되게 혼이 났다. 대체 뭘 하느라 밖으로 나도는 거냐고 엄마는 물었지만, 매일 같이 붉은 집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나를 단속하기엔 명분이 적당치 않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말을 끝내며 하여튼 조심해, 하고 지그시 강조했을 뿐이다. 나는 괜스레 모멸감을 느꼈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뭘 조심해요, 날카롭게 대꾸하자 엄마는 눈을 매섭게 떴다. 이상한 소문이 많잖니. 아빠는 헛기침을 할 뿐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더위가 사그라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8월이었다. 해가 지고도 후끈한 방이 끈끈하고 무거운 여름밤에 잠겨 있었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개학을 하고 가을이 올 것이다. 새 학기를 생각하자 마음이 산란해졌다. 우리만의 아지트였던 ‘붉은 집’을 나와 다시 학교에 가면 민중은 나를 멀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민중이 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민중을 부르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새삼 얼굴을 붉혔다. 

방학 중 예닐곱 번은 이제는 시시해진 옛 패거리와, 학급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민중을 부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들은 모두 민중을 싫어했다. 그들은 모두 민중이 외모도 성격도 우리와는 다른 부류라고 선을 긋고 있었다. 어떤 녀석이 내게 붉은 집에 대해 묻기도 했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너, 그 집 가봤어? 내가 드나드는 것을 누군가는 봤을 수도 있다. 나는 마치 다른 곳을 향해 걷는 것처럼 씩씩하게 걷다가 주위를 살피며 슬그머니 그 집으로 들어서곤 했는데, 가끔 문이 빨리 열리지 않아 시간이 지체되는 일도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하고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빛이 지나갔다. 

그 집에 이상한 사람이 산다는데, 어떤 녀석이 말했다. 맞아, 나도 들었어. 문둥병자가 산다는 말도 있던데. 다른 녀석도 말했다. 확신에 찬 녀석의 눈빛이 우스웠다. 그 소문은 우리가 스스로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그들 무리에 섞였을 때, 내가 민중을 모른 체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우리의 끈끈한 우정과 애틋한 동지애를 공개하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민중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며칠 간 발길을 끊었다. 

 

개학을 이틀 앞두고, 나는 민중의 전화를 받았다. 두 번이나 전화가 걸려왔었지만 방학 과제가 밀렸고 집에 손님이 계시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 후 가지 않았다. 이번에 민중은 몹시 침울한 목소리였다. 바, 바쁘지? 느닷없이 말까지 더듬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했다. 사실 며칠간의 이유 없는 소외감과 지루함으로 나 역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보란 듯이 완성된 과제물을 늘어놓고 민중의 집을 찾았다.

그 며칠 사이 민중의 집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거실에 못 보던 소품들이 부조화스럽게 자리하고 커튼은 짙은 흑색으로 바뀌었으며, 커다란 괘종시계는 사라졌다. 민중 엄마는 조금 야윈 얼굴로 나타났는데 머리가 어깨 위까지 짧아져 있었다. 나를 보고는 놀란 듯 하더니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왔니? 그동안 바빴나 보지? 하고 묻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날카롭기까지 했던 단정한 눈빛이 흐릿했다. 무슨 일 있었어? 방안에 둘이 남게 되었을 때에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중이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 끝이 약간 뒤틀린 것 같아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신경질적인 질문에 민중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네가 안 왔잖아. 엄마도 나도 많이 기다렸어. 그리고… 잠시 말을 그치고 민중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녀석의 얼굴이 하얗다못해 눈부셨다. 너네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엄마가? 뭐라고? 민중은 교실에 처음 들어왔던 날처럼 희고 긴 손가락을 바닥에 대고 의미 없는 무늬들을 그렸다. 나쁜 말이라도 한 거야? 응? 엄마가 전화를 건 이유를 잘 알면서도 나는 필요이상으로 성을 내며 따져 묻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하고 민중은 얼굴을 들더니 귀까지 빨개진 채로 이어 말했다. 

네가 왔으니까.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지만, 민중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끔 음울한 눈을 들어 나와 민중을 번갈아 보았다. 설거지를 도울 때, 민중 엄마는 곧 개학이네, 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주방 뒤쪽의 열린 창 사이로 어느새 차갑게 식은 가을밤이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칠까요? 민중이 물었지만 민중 엄마는 담배를 꺼내 물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왜 저러셔? 내 질문에 민중은 말이 없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마당으로 나갔다.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어둠이 뿌옇게 마당을 감싸고 있었다. 불독이 몇 번 짖어대다가 침울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늙은 입매를 꾹 다물고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렸다. 

너, 내 친구지? 민중은 뜬금없이 말을 꺼내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응, 하고 선선히 답하자, 민중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내 눈을 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두 눈 속의 푸른빛이 어둠속에서도 요요하게 빛났다. 정말이지? 다짐을 받고 싶다는 듯 민중은 재우쳐 물었다. 물론이야, 답을 하면서도 양심의 도발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민중과 녀석의 엄마를 몹시 좋아하고 따랐지만, 모든 이들 앞에서 내가 완벽하게 그들의 친구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로서는 분명 느끼고 실재하였던 우리들의 우정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 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상 민중은 얼마나 멋진 친구인가! 그리고 또 민중 엄마는 어떻고! 나는 확신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남다른 시선 때문에 나의 자그마한 양심 역시 용렬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속내를 알 턱이 없는 민중은 내 말에 힘을 얻은 듯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곤 대문을 손수 열어 배웅하며 속삭였다. 이따가 전화할게. 알아, 네 엄마가 날 싫어하는 거. 전화벨이 한 번 울렸을 때 끊을게. 그게 신호야. 그때 우리 집에 다시 와줘. 민중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과제물들을 가방에 정리해 놓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넘기며 민중의 신호를 기다렸다. 처음에 걸려온 전화는 외할머니였다. 엄마가 한참 수다를 떠는 바람에 민중의 신호를 놓칠까봐 불안했다. 두 번째 걸려온 전화는 아빠의 후배였다. 술이라도 한 잔 하시려는지 아빠는 곧 외출했다. 밤 열시가 넘어 이제는 안오겠구나 싶을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한번 울리고는 뚝 끊겼다. 일찌감치 잠이 든 엄마는 안방에서 소리가 없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민중은 대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급히 문을 열어 반긴다. 그리곤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조용한 걸음으로 앞장서더니 뒤를 따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불독이 축 처진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중은 현관문을 살짝 밀고는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거실은 괴괴했다. 어딘가 민중 엄마가 피우는 담배의 잔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민중은 손가락으로 피아노실을 가리켰다. 그리곤 낮은 포복 자세로 옆 주방을 돌아 뒤편 다용도실 쪽으로 향한다. 도대체 무슨 심사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녀석을 따라 기다시피 따라가 다용도실을 향해 난 피아노실의 작은 창에 눈을 대었다. 방은 그저 어두컴컴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우물처럼 캄캄한 방. 그리고 적막.

차차 눈이 익숙해진다. 검은 새처럼 커다란 피아노며 유리문이 달린 오래된 책장이며, 우리가 곧잘 기대었던 소파도 구분이 된다. 피아노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얼핏 보아도 민중 엄마가 분명했다. 그림자는 피아노의 건반을 의미 없이 꾹꾹 찔러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흰 벽 앞에 섰다. 머리를 쓸었다가 한 바퀴 휙 돌아봤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흰 벽으로 보이는 것이 큰 거울이란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민중을 돌아봤으나, 녀석은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면을 노려볼 뿐이다.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몸이 기울어져 창에 바짝 붙어있는 꼴이 되었다. 유리에 눈을 대자, 바깥의 희끄무레한 빛이 반사되던 창의 경계가 스러진다. 방안의 광경이 더욱 또렷해졌다. 민중 엄마는 이제 완전히 알몸이었다. 처음엔 당혹과 두려움, 긴장이 뒤섞여 분별하지 못했으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나신(裸身)은 엄마나 할머니와는 달랐고, 오히려 나나 민중, 아빠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녀가 달빛에 제 몸을 비추듯이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을 때,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명백한 형태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민중이 갑자기 뛰쳐나갔다. 얼떨결에 그 뒤를 쫓는다. 민중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리죽여 우느라 민중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일과 상념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민중 엄마는 기척이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민중은 붉은 얼굴을 들고 코를 팽 풀었다. 노, 놀랐지? 민중이 더듬어 말했다. 계집애처럼 울 걸 뭐하려고 구경시켰나 싶어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민중은 눈물이 그치지 않는 지 연신 주먹으로 제 눈을 비볐다. 

늬 엄마 남자야? 아, 그 질문은 얼마나 요상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중은 벌 받는 아이처럼 대꾸도 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다. 넌 사내자식 맞니? 내가 몸을 일으키며 묻자 녀석은 시뻘게진 얼굴로 화, 확인해줘? 하고는 저와 나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모른다. 됐어, 내가 다시 드러눕자 녀석도 풀이 죽어 한껏 쪼그라든 어깨를 벽에 기댄다. 적막한 밤이 각자의 속내를 몇 번이나 뒤흔들고 난 뒤에야 민중은 읖조리듯 말했다. 

엄마는 원래 내 아빠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조금 전 어둠속에서 보았던 것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우리 엄마는 죽었구. 민중은 손톱을 입 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빠가 아저씨를 만나서 산 건 꽤 됐어.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며 호르몬 주사도 맞으러 다닌 것은 그때부터야. 민중이 고개를 돌리더니 찌푸리듯 웃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한편 듣고 싶지 않은 기분도 들었다. 꿈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민중 몰래 허벅지를 꼬집었다. 접힌 살에 통증이 박히며 이것은 현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 원래 여자가 되고 싶었던 거야? 애써 침착하게 물었지만 민중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삐걱삐걱 다락방을 오갔다. 아빠는 남자야. 너도 봤잖아. 단지 아빠가 여자가 되려고 했던 건, 아저씨 때문이었어. 민중은 문득 멈춰서더니 찢어져 갈라진 벽지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었다. 푸르던 눈이 무척 붉었고 늘 홍조를 띄던 얼굴은 파리했다. 그때, 민중의 엄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와 봐, 얘들아. 같이 있는 거 다 알아… 목소리가 무척 가라앉고 쉬었으며 이제는 거짓으로 여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지도 않았다. 민중은 불 꺼진 창문처럼 금세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보고는 미안해, 하고 우물거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민중의 엄마는 울적한 얼굴에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가 추저분했다. 그리곤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얘들아, 얘들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민중은 조금 전까지의 분노도 잊었는지, 달려가 제 엄마 손을 답삭 부여잡고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덩그렁했다. 민중의 엄마는 전신을 하릴없이 떨며 상반신을 앞으로 꼬꾸라뜨리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다. 병증이 아니라 독한 약을 먹은 것 같았다. 우리는 점차 사시나무 떨 듯 이빨까지 딱딱거리는 민중의 엄마를 함께 끌어다 안방 침대에 눕혔다.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방이었다. 바닥까지 치런치런한 암막 커튼이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며 별 따위를 막막하게 틀어막고 암갈색 벽장과 커다란 액자 따위가 주위를 에워싼 가운데 침대가 놓여있다. 옆에 자그만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로 하얀 알약들이 쏟아져 있었다. 민중은 제 엄마를 눕힌 후 그 알약을 손바닥으로 쓸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민중의 엄마는 식은땀을 죽죽 흘리고 하얀 이불에 누렇고 붉고 거뭇한 화장을 난잡하게 묻히면서 끙끙 앓았다. 아저씨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 같기도 한 신음소리가 그 입에서 새어나왔다. 민중은 제 엄마를 열심히 주무르고 닦다가도 매번 뒤를 돌아 내가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그 눈초리가 일견 간절하고 집요했기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민중의 엄마가 간신히 큰 숨을 토해내더니 신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곤히 잠이 들었다. 

난 모르겠어, 민중은 잠든 제 엄마이자 아빠의 얼굴을 잠자코 들여다보며 말했다. 

죽은 우리 엄마는 참 좋은 분이었어. 내가 알기로는 말이야. 그런데도 아빠는 늘 냉랭하기만 했어. 엄마가 죽을 때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구. 그러더니 어느 날 아저씨를 데려와 자신이 엄마가 되겠다고 하질 않겠어? 몇 달 전 날 데려오면서는 이제 우리가 새로운 가족이 될 거라고도 했어. 늘 딱딱하고 무료한 얼굴만 하던 아빠가 그토록 들뜨고 행복한 걸 처음 봤기 때문에, 결국 난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됐어. 아빠가 여자든 남자든 말이야. 엄마가 된 아빠는 너무나 자상하고 다정해서 차라리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둘은 수술 문제를 두고 종종 다투기 시작했어. 아저씨는 아빠가 완벽한 여자가 되기를 바랐어. 하지만 아빠는 수술까지는 두려워했던 것 같아. 다만 여자가 되려고 한 건, 아저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아빠는 점점 여자가 되어가는 자기 모습을 즐기는 것 같다가도, 별안간 신경질을 부리거나 눈물을 쏟았어. 저렇게 거울 앞에 내내 붙어 있거나 약을 먹고 이러는 것도 그때부터야……. 

너무 믿기 힘든 상황이 되면, 믿는 것과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나는 오히려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다 널 만난 거고.

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런 기묘한 일에 한 점의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아저씨는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부터 공연히 트집을 잡고 짜증을 부렸어. 아빠의 수술이 가을로 잡혀 있었거든. 알아듣겠어? 아저씨는 입으로는 아빠가 여자가 아니라 함께 살 수 없다고 해놓고서 막상 진짜로 여자가 되려고 하니 싫증이 나버린 거야. 그리곤 아빠가 세상에 섞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는 견딜 수가 없다고 소리를 질러댔어. 그날, 내가 너를 데려온 거야. 아저씨는 저 이상한 녀석이 드디어 친구라도 생긴 모양이라고 비웃으며 나가 버렸어. 엄마는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어 했어. 우리가 보낸 지난 여름방학을. 적어도… 누군가는 우릴 제대로 바라봐준다는 걸 말이야. 

언뜻 놀라웠다가 다음엔 화가 치밀었다. 그럼 모든 게 가짜였단 거네? 내 날카로운 대꾸에 민중은 오히려 애처로운 눈을 했다. 가짜가 아니라… 너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진짜였던 거야. 녀석은 그러곤 눈물을 참듯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나머지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네 엄마의 전화가 걸려오던 날, 여기 있었어. 당황한 엄마를 빈정거리듯 쏘아보다가 나중엔 히죽 웃었어. 그리고는 엄마에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었으니 괴물처럼 살게 될 거라고 저주하며 떠나버렸지. 

내가 무언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민중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너와 우리의 진실한 관계를 아저씨에게 당당히 보여줬더라도 아마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으니까. 난 정말이지…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녀석의 옆얼굴은 몹시 지쳐보였고 어깨는 축 처져 금방이라도 땅 밑으로 꺼질 듯 했다. 그 곁에 누운 민중의 엄마는, 화장이 벗겨진 턱 끝에 아직 송송이 남아있는 턱수염 몇 개의 날을 세우고,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산란하기도 하고, 쥐어짜듯 치밀어 오르는 연민 같은 것이 그간 지내온 우리의 도타웠던 시간들을 날카롭게 헤집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으나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민중의 하얗고 말끔한 손등과 슬픔으로 붉어진 양 볼과, 백열등 아래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막막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이다 팔을 쓸고 내려와 민중의 손을 그러쥐었다. 차마 그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잠든 민중의 엄마만을 바라보는데, 민중의 붉고 얇은 입술이 천천히 내 볼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갑고 미끈거리면서도 열기어린 숨결이 느껴졌던 그 입맞춤은, 그 후로 오랫동안 화인이 되어 남았다. 


다시는 민중의 집에 가지 못했다. 민중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녀석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내 손을 끌고 가거나 민중이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민중은 전학을 갔다.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었다. 이틀 정도 민중이 출석을 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민중이 원래 있던 학교로 돌아갔다고만 하였다. ‘붉은 집’이 이사를 간 것은 아니었다. 불독은 여전히 성마르게 짖어댔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 집에서 남자 목소리도 들리고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며 사람이 살긴 사나보다 하였다. 몇 번 대문 앞을 오갔다. 초인종을 누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이 쥐죽은 듯 고요한 집에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가끔 그것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들기 위해 이불 속을 파고들면 문득 느껴지던 민중의 매끄러운 살결, 세수하다 바라본 거울 속에 떠오르는 하얗고 투명한 얼굴, 신경질적으로 웃어대던 굵고 낮은 민중 엄마의 웃음소리, 그 큰 손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의 다정함, 그리고… 눈송이가 떨어져 와 닿듯 부드럽고 차갑던 민중의 입맞춤이 지금인 듯 생생해질 때, 그들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 불독은 사라졌고 대문은 어느 날 흑갈색으로 바뀌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사귄 여자에게서 게이가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민중에 대한 내 감정을 천천히 되짚었다. 

만약, 사랑이 어디까지 치닫을 수 있는지, 얼마나 뜨겁고 또 잔혹할 수 있는지를 민중의 엄마가 보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민중을 사랑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시선과 관습을 벗어난 삶을 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민중을 기묘한 추억의 일부로 가둔 채 녀석이 숨어 나오지 않음을 다행스러워하는 것일 게다. 숨기고 혹은 숨어, 민중의 엄마처럼 괴물이라 불리는 일이 없도록. 

민중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가끔 녀석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처럼 느끼곤 하는 건, 나 또한 녀석을 숨겨온 세상의 일부라는 하나의 증거였다. 





*김소윤 2010년 〈전북도민일보〉로 등단. 2012년 《자음과 모음》 장편소설 당선. 2018년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 저서 『코카브-시간의 문이 곧 열립니다』, 『밤의 나라』, 『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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