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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책·크리틱/손현숙/궁핍한 시대를 위한 사랑의 푼크툼 ―허형만 시집 『바람칼』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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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09회 작성일 23-01-0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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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책·크리틱/손현숙/궁핍한 시대를 위한 사랑의 푼크툼 ―허형만 시집 『바람칼』을 중심으로 


손현숙 시인


궁핍한 시대를 위한 사랑의 푼크툼 

―허형만 시집 『바람칼』을 중심으로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2년 동안 애도일기를 썼다, 그는 또한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사진이라는 침묵의 형태로 재현해 낸다.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 ‘겨울 정원에서의 소녀’는 시공을 초월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을 감각적으로 직감하게 한다.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의 경험이 나, 주체가 대타자에게로 건너가는 하나의 확실한 변곡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상상으로만 건너갈 수 있는 대타자에로의 귀환, 그것을 그는 침묵의 형태로 건너가는 사랑의 완성으로 보았다. 가장 관념적인 장소에서 맞닥뜨린 가장 뜨거웠던 지점과의 해후. 비극의 정점에서 맛보았던 황홀한 순간의 기록들은 일종의 아픔이면서도 지독한 사랑으로 치환이 된다. 푼크툼,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해석을 도모하지만 바르트에게 그것은 이미지로도 닿을 수 없는 대타자에게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쓰이게 된다. 일반적이거나 상식적인 것을 포기한 자리에서 침묵으로 생성되는 푼크툼의 황홀함.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침묵의 형태로 가고자 했던 궁극의 지점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허형만시인의 시집 『바람칼』에서는 언어를 부정하면서 언어의 세계로 건너가고자 하는 침묵의 세계가 보인다. 그 불가능한 세계에로의 진입은 시간의 서사인 죽음이 말을 걸고 그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 매개자로서의 시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그 언어로 건너가기에는 불가능한 사랑이나 침묵에 관하여 사진 찍 듯 현실을 재현해서 보여준다. 시인은 허공에서 물고기를 만나기도 하고. 바람칼을 세워서 허공에서 중심을 잡는 새의 심정을 백지 위에 부려놓기도 한다. 새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기도 하고. 캄캄한 우주에서 태동하는 시말을 찾아 몸소 아득한 세상으로 건너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야 하는 시인은 하루를 일생처럼 소중하게 살아내는 것으로 언어의 무한성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내는 힘이 또한 언어의 힘이란 것을 시인은 오랜 시간 시를 쓰면서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서는 시, 허공의 중심에서 몸을 푸는 시어들과 언어로 받아쓰는 침묵의 세계 그리고 시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중심으로 허형만시인의 푼크툼을 찾아 읽어보기로 한다. 


시, 허공의 중심에서 몸을 푼다


물고기를 닮은 나뭇잎들이

새파란 하늘을 바다로 알고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헤엄친다.

나무들은 허공의 중심에서 몸을 푼다.

그래야 하늘로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산책길에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나뭇잎은 물고기를 닮았다」. 전문


칼비노의 소설 속에서는 죽음이란, 단지 위와 아래가 바뀌는 상하 이동의 세상으로 묘사된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서 이승과 정 반대의 방향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묘사되는 시의 장면 또한 허공이지만, 바다의 출렁임 속에서 헤엄치는 생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무한 천공을 바다로 상하 이동을 시킨 채 생물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한다. “새파란 하늘을 바다로 알고” 있는 물고기들은 다름 아닌 흙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는 나무의 “나뭇잎”들이고. 저들은 그곳이 저들의 활동공간인 것처럼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헤엄친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바다나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의 형태에 주목 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하찮지만 중심을 잡고 있는 나뭇잎에 마음을 기울인다. 시의 제목처럼 물고기를 닮은 나뭇잎은 지금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허공 중에서 헤엄을 치는 중이다. 그 모습이 물고기를 닮은 나뭇잎 같다고 토로하는 시인은 그 깊고도 깊은 자연의 이치에 대해 골똘한다. 허공을 밀면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나무의 힘은 “허공의 중심에서 몸을” 푸는 나뭇잎 낱낱의 힘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들이 모여서 결국은 “하늘로 치솟을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여 나, 화자로 간주되는 시인도 힘차게 하늘로 솟구치고 싶은 생각으로 자신이 “한 마리 물고기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은 오래도록 시를 썼던 시인의 간절한 마음으로 시를 향한 정신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개는

칼이 된다.

예리한 칼날이 된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가 바로

바람칼이다.


* 바람칼 : 새들의 날개를 이르는 순우리말.

―「바람칼」, 전문


위의 시에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단어는 칼과 새와 허공과 추락이다. 바람을 매개로 만나 지게 되는 새와 칼의 날 선 대비는 언뜻 매치가 되지 않기도 한다. 아주 낯설면서도 기이한 단어의 조합은 시의 장면을 하나의 스틸 컷처럼 정지시키는 강한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허공은 이내 갇힌다는 서술과 함께 추락의 이미지를 급하게 불러낸다.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궁극의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성글게 배치되어 있는 상반된 이미지들은 행간을 건너뛰면서 여백을 이루고 있는 시의 형태를 언어로 보여주는 소격 효과를 드러낸다. 위태로운 장면의 묘사로 단숨에 숨을 참고 하늘로 박차 오르는 새의 비상을 보여주는 위의 시는 시인의 시작 방법을 보여주는 것일 터. 시를 조금 자세히 따져서 읽어 보기로 한다. 시의 첫 행에서 화자의 시선은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순간”에 집중한다. 그때 새의 “날개는 칼이 된다”라는 시인의 선험적이자 단정적 발화는 새가 “허공에 갇히” 거나 “추락하기 때문이다.”라는 다소 비약적인 전개를 펼친다. 거기에는 “잠시라도 한눈팔면”이라는 진술이 곁들여지는데, 이는 시인이 발화하는 “바람을 가르는”에 집중을 해야 한다. 이는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순간 숨을 참고 허공 속에서 중심을 잡는 바람칼이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는 가정 하에 목숨을 담보한 채 시를 써 내려가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새의 바람칼과 정확하게 병치시킨다. 이는 곧 시인의 시를 쓰는 시작 태도를 새가 공중에서 목숨을 걸고 중심을 잡아야 하는 바람칼로 은유하는 것이겠지만, 시인 자신이 자신에게 다짐했던 필생의 약속을 새를 매개로 바람칼이라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로 받아쓰는 침묵의 세계 


방금 

지상을 박차 오른

새의 부리에는

침묵이 물려있다.

맑고 고요한

자연의 침묵이여.

새의 부리에서

빛나는 허공이여.


―「허공」, 전문



이번 허형만시인의 『바람칼』에서 유독 눈에 많이 띄는 단어는 ‘새’와 ‘허공’과 ‘침묵’이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침묵’의 이미지는 새를 매개로 허공에서 특히 빛난다. 올해로 등단 47년을 맞는 시인의 구력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언어의 또 다른 방법에 골똘하는 듯하다. 왜 아니겠는가, 하루도 시에서 멀어져 보지 않았던 시인의 시쓰기는, 눈이 멀어서도 손이 기억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는 오스만 제국의 세밀 화가를 사뭇 닮았다. 백지 위에 시를 쓰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아마도 시인에게는 새가 “지상을 박차 오”르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공 속으로 비상을 한 새의 부리에는 “침묵”이 물려있다. 그것도 “맑고 고요한/자연의 침묵”이 새의 부리에 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법을 탁마 해왔던 시인의 시작법은 그래, 바로 “새의 부리에서/빛나는 허공”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뜨이건 말건 시인이 시를 쓰는 정자세가 아닐까. 오래 한 길을 걸어오신 시인의 시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시인, 어깨에 힘을 빼고 일상으로 복귀


넥타이를 매지 않아 좋다.

한사코 정장을 하고

반질반질한 구두를 신지 않아 좋다.

때로는 수염을 깎지 않아 좋다.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뛰어가지 않아 좋다.

아무도 만나자고 하는 사람 없으니

나 홀로 숲길을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산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문득 푸른 하늘 바라볼 수 있어 좋다.

밀린 원고 끝내고 할 일이 없을 때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며

골목길을 기웃거릴 수 있어 좋다.

골목 안 빈 터에서 욜랑거리는 낭미초狼尾草

석양에 금빛으로 스며드는 것 보니 좋다.


―「이제 나이 들어」, 전문


선생과 내가 첫 대면을 했을 무렵을 손으로 꼽아보았다. 무려 18년 전의 일이니, 선생도 나도 푸름 쪽에서 만났던 것이 사실이겠다. 그는 붉은 빛깔의 와이셔츠와 각이 칼처럼 잡힌 정장 차림이었다. 머리칼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반듯하고 또 반듯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목포대학교의 국문과 교수 시절이었고, 나는 이제 겨우 등단한 새내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내게 깎듯 했다. 사진 촬영을 함께 갔던 나의 남편에게도 시인을 대표하는 듯, 예의를 다해 정성을 기울였다. 아마도 선생의 본성은 선비, 그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시를 읽고 분석하고 그에 맞는 분위기를 찾아서 남편과 나는 여러 차례의 셔터를 눌렀다. 어떤 경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학사상에서 기획하는 특집에 나와 나의 남편이 호출되었던 듯하다. 그 무렵 우리는 부부 사진작가로 여기저기 매체의 부름을 받았었고, 매스컴을 한창 타면서 유명세를 떨구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참을 빗나갔다, 그렇게 푸름 속에서 만났던 선생과 나는 이제 푸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늘 속으로 밀려 난지 오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선생의 시작은 더욱더 왕성해졌고, 그의 시는 침묵의 순간에 더없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생의 시를 일별 하면서 릴케가 말했던 시는 인생을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를 시처럼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일평생인 모양이다, 하고 혼자 읊조린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넥타이도 매지 않고 구두도 닦아 신지 않고 때로는 수염도 깎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면서 통근버스에 매달리지도 않고 딱히 만나자는 사람도 없다. 시간이 화자를 부리는 시간을 통과해서 이제 화자는 시간의 고삐를 잡고 유유자적하다. 산책을 하면서도 시간을 가늠하지 않고 골목 안 빈터에 피어있는 꽃들에게도 하염없이 눈길을 준다. 웬만해서는 바라보지 않았던 하늘도 저절로 고개를 꺾어서 쳐다보고 무엇보다 원고 끝내고 나서의 어슬렁거리는 숲길 산책이 화자를 한없이 자유롭게 한다. 누가 그랬더라, 시는 원래 건달이 쓰는 것이라는데. 이렇게 화자는 시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롯이 주구 위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화자는 이제 오로지 시를 향해 오체투지 한다. 오래 돌고 돌아서 이제 나이 들어 시의 문을 다시 두드리는 시인의 시에서는 뭐랄까, 허공을 칼로 베는 침묵의 검이 손에 들려 있는 듯하다. 아름다운 아래의 시를 다시 읽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대신할까 한다. 선생의 건강과 건안과 건필을 빈다.           


한겨울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이른 봄날 밤 쩍쩍 얼음장 갈라지는 소리

그 벌거숭이 소리 같은 것.


―「그리움」, 전문






*손현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평사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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