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8호/책·크리틱/안성덕/울음의 사회학 ―김유석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페이지 정보

본문
78호/책·크리틱/안성덕/울음의 사회학 ―김유석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안성덕 시인
울음의 사회학
―김유석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울다’의 사전적 의미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아파서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다”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울 일이 참 많다. 기쁨에 겨워 우는 일이야 많을수록 좋겠지만, 문제는 슬프거나 어딘가 아플 때다. 현대인은 자주 울고 싶다. 그 원인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만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여러 아픔을 겨우 견뎌내자, 풍요 속의 빈곤이, 인간성을 포함한 여러 상실이 더 아프게 다가온 것이다. 사람에 속고 돈에 울고, 속도에 치인 현대인들은 병이 깊다. 그렇다, 휙휙 도망치고 변해가는 세상에 멀미한다. 멀미란 속도가 다른 두 물체 사이의 어지럼증 아니겠는가.
이렇듯 날마다 울 일이 쌓여만 가는데, 정작 우리는 울 줄을 모른다.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는 것은 지는 것이라 세뇌되어 있다. 모름지기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지 않던가. 태어날 때 한 번, 부모상 당했을 때 한 번,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한 번……. 그래서일까, 울 줄을 모른다. 우는 방법을 모른다. 제대로 우는 법을 학습(?)하지 못했다. 특유의 콧수염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웃음의 아이콘이었던 챨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의 가슴속도 한 꺼풀만 벗기고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인 경우가 허다하다. 울음은 쌓아두면 독이 된다. 꺼이꺼이 한바탕 울고 난 후 가슴이 후련해지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의 비극 편에서 말한 카타르시스다. 심리학에서도 답답한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고 본다. 울음과 눈물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병든 사람을 씻어 준다. 옛날 양반집 상가喪家에 곡哭을 파는 곡비哭婢가 있었다. 곡비의 구슬픈 곡소리가 슬픔을 상실을 쓰다듬었다.
김유석 시인의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울음’과 ‘붉음’이다. 울음을 붉음이라 읽어도, 붉음을 울음이라 읽어도 무방하겠다. 붉은 피를 토하며 눈이 빨개지도록 운다.
유실수가 낫다는 어머니를 우겨 느릅나무 몇 뿌리 마당귀에 들인 지 수 삼 년
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담한 홍시 몇 알 항상 가슴에 품고 사는 어머니는
내내 매미울음이나 허투루 달아 익히다가
늦서리 다 지도록 비질소리에 얹히는 잎새들을 성가셔하였으나
한여름 문간 앞에 그늘을 내어놓고
잠시 들렀다 가는 것들의 기척을 기울이던 일은
마른 잎 태우는 연기에 휘감기는 느릅나무 저도 몰랐다.
- 「공空」 전문
울음에도 형식이 있다. 속엣것을 다 토해내는 ‘통곡’과 울음의 이유를 가만히 안으로 곱씹는 ‘흐느낌’과 너무 깊고 너무 커 차라리 눈물조차 말라버린 ‘마른 울음’이 있다. 어머니는 평생 울지 않았다. 울음 같은 건 애당초 사치(?)였다. 자식 앞에선 한 번도 눈물 보이지 않는 어머니, 당신이라고 울고 싶은 적 없었을까. 다만 눈물이 다 말라버려 그 속울음을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야 당신이 감추었던 울음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그슬린 호야 등피 속 검게 감춘 당신의 속내를 읽어낸다. 감나무나 대추나무, “유실수가 낫다는 어머니를 우겨 느릅나무 몇 뿌리 마당귀에 들인”다. 왜 하필 느릅나무였을까? 민간요법에 느릅나무는 각종 염증과 속병에 특효라 했다. 그러니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울 수 없는 어머니의 문드러진 속을 고쳐드릴 요량으로 자식은 느릅나무를 마당귀에 들였으리라.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어머니가, “늦서리 다 지도록 비질소리에 얹히는” 느릅나무 “잎새들을 성가셔하”신 어머니가, “마른 잎 태”운다. 그 연기 속에 여태껏 숨겨왔던 당신의 마른 울음이, 당신의 설움이 사라질 터이다. “울음보다 긴 적요를 끌고 다음 생을 건너는 늦 매미”처럼 평생 살아온, “끝물 고추 솎으러 가는 홀어미”(「처서「) 속내 후련 해지라고 마당귀에 느릅나무를 심었겠다.
전지剪枝하다가 본다, 제 몸통 말아 쥔 포도나무 넝쿨손들.
뜨거운 생의 한순간을 움켜쥔 채 식은 망자의 손아귀 같다.
몇 번이나 허공을 젓다가 간신히 붙잡은 것
제 몸인 줄 모르고 소용돌이처럼 휘감았을 더듬이들 좀처럼 펴지질 않는다.
밑동까지 뒤틀리게 한 이 힘이 공중에 포도송이들을 매달았을 터
태양이 다 식도록 익지 않는 시디신 몇 알이 온몸을 쥐어짠 증거,
마디를 자르던 손바닥 슬며시 펴 본다. 세상에 올 때
꼬옥 말아 쥐고 울음을 터트리던 그 아이의 조막손에
악력을 잃은 손금들 허공으로 뻗쳐 있다.
-「악력」 전문
는개에 적시는 몸이 붉다. 는개가 내려온 허공을 바닥으로 바꾸어 몸에 두르는 울음이 붉다.
밟히면 꿈틀하는 것은 몸이 아닌 울음.
늘였다 줄였다, 주름으로 이룬 것들의 몸은 길다. 제 살보다 무른 데만 뒷걸음질 치듯 짚어가는 그것의 울음도 가지런하게 길다.
일획의 생, 머리에서 꼬리까지 땋는 길이 허공보다 아득하여
는개가 오는 날은 길고 붉은 것들이 공중에서 기어 나와 운다. 지르렁 무지르렁, 묽은 초저녁 뒤안을 자기공명하며 저렇게.
-「울음이 길고 붉다」 전문
“포도나무 넝쿨손들”이 제 몸을 움켜쥐고 있다. 허공을 기는 것들은 무엇을 붙잡지 않으면 천길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만다. 팔을 휘저어 닿는 것을 휘감아야 한다. 포도나무 넝쿨손들도 “몇 번이나 허공을 젓다가 간신히” 그것이 허공에 뜬 “제 몸인 줄 모르고 소용돌이처럼 휘감았을” 터이다. 그것은 “세상에 올 때//꼬옥 말아 쥐고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의 손 같은 것이다. 포도나무가 “포도송이들을 매달”기 위해 “밑동까지 뒤틀리게 한” 그 힘으로 제 몸”을 움켜쥐는 것은, 마치 하늘의 절대자에게 도움을 청하듯 우는 통곡 같은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줄도 모른 채 이번 생을 드난 온 거미”(「천고天孤」-아우)처럼 허공을 향한 울음은 쓰리다.
허공을 향한 통곡이 크고 쓰리다면 바닥을 향한 흐느낌은 짙고 붉다. 지렁이 한 마리 “는개가 내려온 허공을 바닥으로 바꾸어 몸에 두르는 울음이 붉다.” “밟히면 꿈틀하는 것은 통곡이 아닌” 흐느낌이다. 어쩌면 통곡보다 더 크고 깊은 울음이 조용히 어깨 들썩이는 흐느낌인지 모른다. 땅에 머리를 박고 조용히 우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몸이 붉은 지렁이가 “묽은 초저녁 뒤안을” 제 울음통 제 몸으로 공명시키며 가는지 모른다.
여름이 드난살던 방구석에서 쓸려 나온 청개구리 한 마리.
하루살이에 끌려왔나, 들판에 창을 달고
바깥울음 내통하던 내 설은 귀를 타고 흘러들었나
울음으로 다가와 울음으로 멀어지는 것들.
-「울음화석」 부분
비긋이 열린 마당을 적시는 눈시울이 생혈 같다. 푸른 몸에 밭은 붉음은 공연히 서럽고
빈집을 들른 저 빛은 뒤늦게 건네는 기별 같아서 마당귀 늙은 감나무의 귀가 닳고
붉음이 제 몸을 휜다. 가지 아래 더운 숨결이 고인다.
그늘을 쓰면 해묵은 배고픔이 내려 얹히는 한 철
저 붉음은 어디서 오는가, 보리누름 들판 망연히 지켜 선 몸에
사무치듯 벌레가 끓는다. 붉음이 벌레들을 끈다.
-「유월」 부분
각각의 울음의 형식이, 각기 다른 크기와 각기 다른 깊이의 슬픔의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울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슬픔의 크기와 눈물의 양이 다르기도 할 터이다. 허공을 향한 울음과 땅이 꺼질 듯 내려앉는 울음은 다르기 마련이다. 또 울음의 유형과 향하는 지점이 같더라도 울음의 주체에 따라 아픔은 다를 것이다. “들판에 창을 달고//바깥울음 내통하던 내 설은 귀를 타고 흘러들었나” “청개구리 한 마리”가 “울음으로 다가와 울음으로 멀어”진다. 청개구리 울음을 지키는 내가 곧 “울음화석”이다. 청개구리가 나이고 내가 청개구리인 물아일체의 울음이다. “붉음이 제 몸을” 휘고 “그늘을 쓰면 해묵은 배고픔이 내려 얹히는 한 철”, “보리누름 들판 망연히 지켜 선 몸에//사무치듯 벌레가 끓는다. 붉음이 벌레들을 끈다.” 제 몸을 휘는 붉음이 제 울음인 것, 벌레들을 끄는 붉음이 제 울음인 것, 울음이 화자와 벌레를 공명시킨다. 하여 “비긋이 열린 마당을 적시는 눈시울이 생혈 같”은 것이다. 짐짓 “저 붉음은 어디서 오는가,” 자문해 보지만 실은 “보리누름 들판”을 건너는 제 몸이 “사무치듯” 울음을 끈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겠다. 그렇다, 처처에 울음이 넘친다. 챨리 채플린의 말처럼 가까이 들여다보면 삶은 비극임이 틀림없다.
인간의 언어에는 문자, 말, 울음, 몸짓 등이 있다. 일상적인 상태라면 사회의 관습에 따라 이미 학습한 문자와 말로써 소통할 것이다. 공감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감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우리의 말문을 턱, 막아버린다. 눈앞이 그만 캄캄하여 글자를 쓸 수가 없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글이 되지 못한 문자가 울음으로 솟구치는 것이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누구에게나 사회적 책무가 있다. 서로의 슬픔을 달래주고 위무해 줄 곡비가 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정작 곡비 자신의 슬픔에는 어떻게 울음 우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의문은 김유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몇 편만 읽다 보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던 곡비의 속울음이 곳곳에 서늘하기 때문이다.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에 이어 세 번째 나온 김유석의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에는 어머니와 동생 외 수많은 곤충과 벌레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의 삼십여 년 업인 시詩 농사가 그 혼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개구리, 매미, 지렁이, 꽃뱀, 메밀잠자리, 거미, 하루살이, 기러기, 고라니, 개, 소까지 모두 그의 식구이자 벗이다. 그러니 그가 序에서 밝힌 대로 “맨발로 무논에 들”어가 “물렁하고 존존하고 은연”하게 그들과 살을 섞는 것이다. “한 발을” 뺄 때 “바닥이 쑤욱 들려 나오는/그런 느낌”으로 하나하나 그들을 호명하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에 쑤욱 들려 나오는 땅덩이만큼의 의미를 부여한다. 식구로 인정하고 그들의 슬픔에 기꺼이 동참한다. 꺼이꺼이 울음 울어준다. 눈물을 흘리면 엔돌핀, 엔케팔린,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 물질이 많이 분비된다. 이 물질들은 면역세포를 많이 생산하게 한다. 항체를 증가시켜 암세포를 억제하거나 감소하게 한다고 한다. 철석, 울음통 막힌 이의 뺨을 갈긴다. 울고 싶은 이의 뺨 한 대 제대로 올려붙인다. 세상의 곡비 김유석 시인의 눈은 한층 멀어졌고, 귀는 한결 커졌다. 그의 가솔家率이 더없이 늘었다.
*안성덕 2009년<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몸붓』. 원광대학교 출강.
- 이전글78호/고전 읽기/권순긍/피눈물 나는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23.01.03
- 다음글78호/책·크리틱/손현숙/궁핍한 시대를 위한 사랑의 푼크툼 ―허형만 시집 『바람칼』을 중심으로 23.01.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