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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고전 읽기/권순긍/피눈물 나는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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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고전 읽기/권순긍/피눈물 나는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권순긍
피눈물 나는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뒤주 속에 갇혀 처절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을 다룬 영화 <사도思悼>가 이준익 감독에 의해 2015년 9월에 개봉됐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맡은 영조英祖는 다소 거친 성격으로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반항아의 이미지가 강한 유아인이 맡았던 사도세자는 이런 정조의 기대를 번번이 저버리고 28세의 젊은 나이로 뒤주에 갇혀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 인물로 등장한다.
무수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무엇보다도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으며, 그래서 자기의 뒤를 이을 자식만큼은 보란 듯이 제대로 키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기대에 부응했으나 자유분방한 기질의 세자는 영조의 바람과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모두가 세자에 대한 영조의 지나친 집착이 부른 화였다. 영조는 무려 5회에 걸쳐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양위파동’을 일으켜 세자와 신하들을 힘들게 했으며, 1749년(영조 25)에는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기도 했다. 영조는 “잘 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라고 했지만 자유분방하고 무인적 기질이 많았던 세자는 완벽을 추구하는 영조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요즘도 부모의 지나친 집착이 자식을 잘못되게 하지 않던가.
세자는 왕으로서의 혹독한 교육과 꾸지람보다 아버지의 따스한 정이 더 그리웠던 것이다. 영화에서 세자는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라고 하소연 한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결국 역모를 일으켰다는 죄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해야 했던 ‘임오화변壬午禍變’, 그 비운悲運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세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영조는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로 하라.”고 회환의 시호諡號를 내려 죽은 자식을 위로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명은 이렇다.
사도세자는 휘는 선愃이요, 자는 윤관允寬이라. 재위 11년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에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太甲을 배워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 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라,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를 나는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여기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더 아낀다는 우리의 정서에서 애비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무엇이 이 가족을 이런 끔찍한 비극으로까지 몰고 갔는가?
네 번에 걸친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은 『계축일기癸丑日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더불어 ‘궁정소설’ 혹은 ‘궁정실기문학’의 하나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의 작품이다. “한가로운 가운데 적은 기록”이라는 제목과 달리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지는 친정에 대한 보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어, 흔히 ‘한스럽다’는 의미의 『한중록閑中錄』으로 알려져 있으며, ‘피눈물 나는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두 후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당연히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친정에 대한 모함을 밝히는 것이 내용의 중심 줄기가 된다.
그런데 『한중록』은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4번에 걸쳐 작성된 글들의 모음이다. 그만큼 글의 내용이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예사롭지 않다는 얘기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편은 본제목 그대로 『한중록閑中錄』으로 지은 것이다. 작가가 회갑이 되던 해(1795, 정조19년)에 친정 조카 홍수영洪守榮의 청에 따라 지은 것이다. “본집에 마누라 수적이 머문 것이 없으니 한번 친히 무슨 글을 써 내리오면 보장하여 집에 전하여 미사美事로 삼겠다.”는 청이 있어 미루어 오다가 “회갑 해를 맞으니 추모지통追慕之痛이 더하고 세월이 더 가면 정신 근력이 이제만도 못할 듯하기에” 써주었다 한다. 여기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출생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궁궐에 들어와서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부터 세도가勢道家 홍국영의 몰락, 순조의 탄생에서부터 혜경궁의 회갑연까지 궁중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한가롭게 회고하는 형식’으로 쓴다하여 『한중록閑中錄』이 되었기에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차마할 수 없다고 회피하였다. 그리고 1편의 끝 부분에서 “내 경력한 일과 축원하는 말을 동생에게 써 줄 것이로되 네 청하는 바를 조차 너를 주니 제부諸父에게 뵈고 장藏하여 두어 내 수적手蹟을 네 자손에게 멀리 전하기를 바라노라.”하여, 동생에게 줌으로써 조카 등 자손에게 전하기를 바란다하여 임오화변의 증인으로서 그 진상을 친정에 남기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가 있다.
(2) 2편은 작가가 67세(1801, 순조원년) 때 쓴 것이다. 임오화변 후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이간책, 홍봉한(작자의 친정아버지)이 세손 외입(外入)을 직언하여 세손의 미움을 산 사건, 홍인한이 미움을 받게 된 동기, 홍국영이 자기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바치고 세도를 누리려다 좌절된 일, 홍낙임이 화를 당한 일을 밝히면서 손자인 순조에게 은근히 부탁을 하고 있다. 특히 천주교 박해에 억울하게 얽매어 죽은 동생 홍낙임의 신원을 “하늘아 하늘아 나를 머물러 계시다가 동생의 신원하는 양을 보고 죽게 하실까 주야에 읍혈축수泣血祝手 뿐이로다.”라고 손자인 순조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3) 3편은 작가가 68세 되던 해(1802, 순조2년)에 썼다. 2편의 후반부와 같이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항변하였으나 좀 더 담담한 어조로 표현했다. 선왕인 정조가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소년시절 외가에 한 일들을 뉘우치며 효도하던 일들을 상기시킴으로써 친정 집안이 무고하게 화를 입은 억울함을 밝히고 있다. 내용은 정조의 효성과 영우원永祐園의 이장, 화성행궁崋城行宮에서의 자신의 회갑잔치 회상에 이어 임오화변 때 홍봉한과 ‘뒤주사건’ 관련성의 해명, 김구주 일당의 무함 폭로 등의 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구주가 충신까지 되고 내 집은 혹화酷禍가 갈수록 더하여 극역이 되니 말고에 이런 세도와 이런 천리가 어디 있으리오.”라고 한탄하였으며 마지막 대목에서는 “피를 토하고 고대 모르기를 판득치 못하는 줄만 한하노라.”라고 끝맺고 있어 자신으로 말미암은 집안의 화를 자책함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4편은 작가가 71세 때(1805, 순조5년) 쓴 마지막 작품으로 “주상이 임오화변의 진상을 알고 싶어하여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嘉順宮이 써내라 하므로 쓴다.”고 서문에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서문을 보면 68세 때 3편과 함께 미리 써두었던 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주상에게 보이지 못하고 있다가 가순궁의 요청으로 순조에게 보인 것으로 보이며, 이 해는 영조의 계비로 대왕대비로 있던, 노론 벽파의 후원자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승하한 직후임을 알 수 있다. 정순왕후 생존시 미처 못 했던 말, 즉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던 부자간의 갈등요인을 밝히기 위해 사도세자의 탄생과 성장 과정, 병환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갈등을 심도있게 묘사하였으며, 사후 세손의 보존에 이르기까지를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 4편은 네 편중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차마 쓰지 못할 마디는 뺀다.”고 하고, “후일 주상이 보신 뒤에는 없애고자 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임오화변의 진상을 손자인 순조에게 알려 시비를 가려 알리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70이 넘어서 마지막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 그 사건의 전말과 이후
『한중록』 4편의 핵심은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 일명 ‘뒤주사건’이라고 하는 ‘임오화변壬午禍變’에 관한 세밀한 기록이자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만 봐야 했던 아내의 피 눈물 나는 육성이다. 그 기막힌 임오화변의 전말은 어떠하며 실상은 무엇인가? 그 끔찍한 사건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도세자가 처형된 날은 1762년(영조38) 윤 5월 13일이다. 작자는 그 순간을 “천지합벽하고 일월이 회색하는 변”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 부분을 자세히 보자.
천지합벽하고 일월이 회색하니 내 어찌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오. 칼을 들어 명을 그치려 하니 방인傍人의 앗음을 인하여 뜻 같지 못하고 다시 죽고자 하되 촌철이 없으니 못하고 순문당으로 말미암아 휘령전 나가는 건복문이라는 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뵈지 아니하고 다만 대조(大朝:영조)께서 칼 두드리시는 소리와 소조(小朝:사도세자)께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하옵시는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하시는 소리가 들리니 간장이 촌촌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드려 아무리 한들 어찌하리오. 당신 기력과 장기로 궤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안 드오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가시던고 처음에는 뛰어나오려 하시옵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미치오시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화를 엿듣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작자의 심정 또한 핍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실제 사건의 전말은 어떠한가?
그 날 영조는 창덕궁 선원전에 행차하였다. 이 날 아침에 들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은 사도세자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깜짝 놀랐다 한다. 휘령전으로 들어오라는 영조의 명이 내려지자 불길한 예감이 든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불러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이 무서워”라며 영조에게 다가갔다.
선전관을 불러 은밀히 무엇인가를 지시한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정성왕후의 신령이 나에게 변란이 바로 앞에 닥쳤다고 간절하게 말하고 있네.”라며 변란의 주역으로 의심받던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부왕의 명에 따라 옷을 찢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쓰러졌다. 강관講官이 급히 달려 나와 옷을 풀어 주었다. 부왕 명으로 세자가 다시 옷소매를 찢어 목에 감자, 강관이 또 뛰어나와 풀어 주었다. 세자는 마지막으로 세손(정조)과 이별하고 싶다 부탁하여 세손이 들어왔고, 세손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며 매달렸지만 영조는 나가라고 엄하게 호령해 내쫓았다. 세손이 나가자 영조는 또다시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세자는 옷을 찢어 목을 매고 강관이 달려 나와 풀어주는 광경이 다시 반복되었다.
이때 휘령전으로 뒤주가 하나 들어왔다.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 속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랍시는 대로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잘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영조는 손수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판목을 가져오도록 하여 못을 친 후 동아줄로 묶도록 지시했다. 그 순간을 혜경궁 홍씨는 “아무쪼록 안 드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가시던고”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차라리 뒤주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후 아흐레 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때 나이가 28세였다.
임오화변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영조38년(1762) 5월 액정별감 나경언의 고변으로 영조가 진노해 있던 차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종용으로 대처분이 내려졌다는 설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세자가 주변의 환관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은 세자를 고변한 일로 영조에게 친국을 받던 중 세자의 비행 10여조를 담은 글을 올리기도 했다.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여 무고죄로 다스렸지만 20여일 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버렸다. 이런 결과를 본다면 나경언의 고변과 사도세자의 죽음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자는 영조37년(1761) 3월에 자기 대신 내관을 앉혀 놓고 아버지 몰래 평양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바로 이 평양행이 영조를 몰아내기 위한 역모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조는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축이지만 정신이상으로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었던 세자가 과연 역모를 기획했을까는 여러모로 의문이 든다. 더구나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오자 평양 밀행을 문제 삼은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라 올라올 정도로 세자의 움직임은 공공연하게 간파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역모를 꾸미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이 영조에게 참언하여 뒤주를 드렸다는 설이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점차 악화되어가자 장인인 홍봉한은 세자를 적극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자칫하다가는 세손(정조)의 지위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기에 결국 세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 영조에게 “이번 일은 전하가 아니셨으면 어떻게 처리하였겠습니까? 외간에서는 전하께서 결판을 짓지 못하실까 염려하였는데, 필경에는 결판을 지어 혈기가 장성할 때와 다음이 없었으니, 신은 흠앙하여 마지않았습니다.”라며 처분이 마땅했음을 고하기도 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세자의 죽음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던 홍봉한은 이 때문에 결국 뒤주를 갖다 바쳐 사위를 죽인 인물이라는 혐의에 시달리게 되었고, 정조가 등극한 후 보복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이니 영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는 친정을 위해 이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결정짓는 계기는 혜경궁 홍씨가 말했듯이 바로 ‘사도세자의 병환’ 때문이다. 어린 시절 위엄있게 키워야 한다는 영조의 소신에 따라 백일도 안 되어 생모 품에서 떨어져 저승궁儲承宮의 나인들 손에 컸다. 그런데 당시 세자의 주변에 있던 나인들은 선왕 경종을 모시던 사람들로, 영조와 세자의 생모 영빈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영조와 영빈은 점차 세자 곁에 자주 가지 않았고 세자는 부모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제멋대로 자라게 되었다.
부자 사이는 세자가 15세이던 영조25년(1749년)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졌다. 15세밖에 안 되는 세자가 경륜이 부족하여 국정 운영에 미숙한 것은 당연했지만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꾸중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영조의 질책이 심해지자 세자는 부왕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잊기 위해 주색에 탐닉하는 등 노골적인 반발을 보였다. 영조의 질책과 세자의 반발이 반복되는 가운데 20세를 넘기면서 세자에게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학증은 사도세자 스스로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풀린다.”고 부왕에게 고백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여러 명의 내관과 나인들이 세자의 손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어떤 날은 내관의 머리를 잘라 들고 들어와 혜경궁 홍씨를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개미도 죽이지 못하는 영조에게 화풀이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세자는 아들이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조에게는 모종의 결심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고변사건이 터진 것이다.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해 모종의 처분을 내리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자식을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울부짖을 때 혜경궁 홍씨는 담벼락에 기대어 그 처절한 순간을 지켜보고 자결을 결심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모진 목숨을 보전하기로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11살 밖에 되지 않은 세손(정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를 죽게 만든 보복으로 오히려 외가 쪽 인물들을 축출하여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했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외종조부 홍인한을 사사하고, 그를 뒷받침하고 있던 인물의 상당수를 극형에 처했다. “죄인의 아들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시비 속에 권좌에 오른 정조로서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자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을 찾아야만 했는데, 뒤주를 갖다 바친 사람은 다름 아닌 외조부인 홍봉한이었던 것이다. 아들 정조에 의해 자신의 숙부가 사사되고, 부친이 남편을 죽인 장본인으로 의심받는 상황은 혜경궁에게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그렇다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아들 정조의 개혁을 중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혁의 거센 바람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회감을 맞이한 정조19년(1795년)에 가서야 이런 억울한 사연을 처음 풀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한중록』인 것이다.
작가 혜경궁 홍씨와 주변 인물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1735년(영조11)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1713~1778)과 한산 이씨의 4남3녀 중 둘째로 반송방 거평동(현재 서대문밖 충정로)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형제로는 인한, 준한, 용한 등이 있으며, 혜경궁 형제들로는 낙인(첫째), 낙신, 낙임, 낙륜 등이 있다. 1743년(영조19) 9세 때 첫 간택에 뽑혀 이듬해부터 가례를 치르고 궁중생활을 시작했다. 간택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계해년 9월 28일 첫 번째 간택 날, 왕께서는 못 생기고 재주가 남보다 못한 나를 과하게 칭찬하시며 귀여워하셨다. 정성왕후께서는 나를 가지런히 보셨고, 선희궁께서는 간택을 하는 자리에 없으셨지만, 먼저 나를 불러보시고 화평한 기운으로 사랑하셨다. 내 곁에 궁인들이 다투어 앉아 나는 심히 괴로웠다.”고 쓰고 있다.
위로는 시부모되는 영조와 선희궁(영빈 이씨) 뿐만 아니라 인원왕후(숙종계비), 정성왕후(영조원비) 등 이른바 삼전三殿을 모시고 시누이 되는 수많은 옹주들과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영조에겐 딸만도 12녀가 있으니, 2녀 화순용주, 3녀 화평옹주, 7녀 화협옹주, 9녀 화완옹주 등이 특히 『한중록』에 자주 등장한다.
한편 혜경궁 홍씨의 자식인 정조는 박준원의 딸 하순궁 원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세손(순조)을 얻어 왕통을 이어갔다.
정조 대의 문신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쓴 『이재난고頤齋亂藁』에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의 딸 '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 왕비들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어린 궁녀를 딸처럼 기르기도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덕임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정조, 청연 공주, 청선 공주) 셋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조는 어머니가 기르는 궁녀인 '덕임'에게 반해 15살 소년 시절에 애정을 고백했으나 거절당했고, 15년 후에 30살 청년이 되어 고백했으나 또 거절당했다고 한다. 정조가 덕임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속을 책벌할 정도면 혜경궁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혜경궁은 정조를 두 번이나 거부한 덕임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출산할 때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과 유모를 보내 도우는 등 지극히 챙겨줬다고 한다. 이 '덕임'이라는 궁녀가 바로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이다. 즉 혜경궁은 자신의 양녀를 며느리로 맞이한 셈이다. 또한, 의빈 성씨는 궁녀 시절 혜경궁의 딸들인 청연 공주, 청선 공주와 함께 소설을 필사하기도 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혜경궁 홍씨는 28세 되던 해인 1762년(영조38) ‘임오화변’이 일어나 남편인 사도세자와 사별했으며, 그후 삼촌 홍인한의 죽음, 부친의 홍봉한의 실각, 동생 낙임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모친 한산이씨는 50도 채 못 살고 일찍 세상을 떠나 “추모지통追慕之痛을 비길 데 없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한으로 점철된 고통의 세월을 살았던 셈이다. 1815년(순조15) 81세의 나이로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무려 71년 동안이나 궁중에서 생활한 셈이다. 1744년(영조20)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남편인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懿王后에 봉해졌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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