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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특집·편견과 차별에 맞서다/남태식/파국破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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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특집·편견과 차별에 맞서다/남태식/파국破局
남태식 시인
파국破局
이 이야기는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였다.
자기표현은 까다로운
문제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간신히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할 때, 그때는 또 남들에게
자기 자신을 정당화해야 한다.
―이르사 데일리워드‘어떤 부류의 남자’130~136행 (『뼈』, 문학동네, 2019년, p149~150)
크로스드레서는 취미로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국내에만 약 2,300명가량의 크로스드레서가 있다고 추정하는데 인터넷 동호회만 30여 개로 가끔씩 ‘예쁜 시디CD(크로스드레서의 줄임말) 선발대회’ 같은 행사도 연다. ‘게이’나 ‘트랜스젠더’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전혀 아니다. 다만 철저하게 취미로 여장을 즐길 뿐 보통의 남성과 똑같은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그중에는 이미 결혼해서 가족을 둔 사람도 많다.(출처 : 지은실 『인적자원관리용어사전』, ‘다음’에서 검색, 이하 용어에 대한 뜻풀이는 ‘다음사전’을 활용)
그는
실수했다. 그는 보통 의상을
베니의 집에 숨겨두었는데 찰나의
부주의로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는 옷장의 오른쪽 문을 열어
구두 한 짝을 꺼냈다. 펌프스
한 짝. 섬세한 하이힐
펌프스. 그의 발 사이즈인데도 우아하다.
은빛 밑창의 파란 새턴
펌프스.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진 신발.
―위의 시 204~213행(위의 책 p154~155)
크로스드레서는 한때 복장도착자服裝倒錯者로 번역되어 불리어졌다. 위의 크로스드레서에 대한 뜻풀이와는 달리 복장도착자는 의상도착증을 앓고 있는 환자로,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만 일어난다고 간주 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지만 필자의 기억으로는 여성 중에서도 남성의 복장을 입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것이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도착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자 하니 관습상 남성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남성 크로스드레서만 문제로 삼아서 굳어진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거 내 거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을
보자마자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위의 시 251~254행(위의 책 p157~158)
도착倒錯은 관습에 반하는 비정상적인 것을 일컫는다. 주로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하고자 하는 성적 욕망을 이르는 변태變態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크로스드레서를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소아성애증, 성적피학증, 성적가학증, 접촉도착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성도착증의 하나로 인지될 수도 있는 복장도착자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번역자가 애초부터 잘못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복장도착자를 오독할 수 있는 성도착증의 하나인 이성복장착용증은 심리적 안정감과 성적 흥분을 느끼기 위하여 이성의 옷차림을 하는 행동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누군가의 여자로
옷을 차려입은 그를 상상하자 위장이 또 한번
뒤틀렸다. 그이가 어떻게 그럴 수가.
두 사람이 수년에 걸쳐 쌓아온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망가뜨린단 말인가.
―위의 시 258~262행(위의 책 p158)
크로스드레서가 비정상적인 성적 상상이나 성욕 또는 성적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성도착증을 보일 수도 있다. 그가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내 이외의 다른 ‘누군가의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상상은 가능한 상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의 문제이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중성의 한 면이거나 여러 면일 뿐이다. 하지만 크로스드레서의 기본 개념은 단순히 취미로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기본 개념에 충실하자. 민감한 문제일수록 좀 더 냉철하게 근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자가 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가 여자 옷을
만들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를 죽도록 두들겨팼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유명한
디자이너들 대부분이 남자라는
사실 따위 다 필요 없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자기는 그런 아들을 키우지
않았다면서 생업으로
다른 걸 배우라고 했다.
―위의 시 171~179행(위의 책 p152)
그는 아마 어디에서건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자라면서 그와 같거나 그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 무수하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보고자 했으니 보았을 것이고, 그들은 보고자 하지 않았어도 보였을 것이다. 탈출을 감행할 수 없다면 회피하거나 무심을 가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크로스드레서인 그의 성장기 이야기는 위 시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가 입는 ‘대안적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의 성장기를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유명한/디자이너들 대부분이 남자라는/사실 따위 다 필요 없었다.’ 사회적 편견은 통념으로 고착화하고 이것이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개인적인 신념으로 굳어진다. 디자이너는 잠시 도피하였다. 그는 도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는 계속 변명하려 했다. 그가 처음
변명했을 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변명했을 때 그녀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더 말하려
할수록, 그녀는 더 알고 싶지
않아졌다.
―위의 시 1~6행(위의 책 p141)
어쩌면 말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툭 털어놓고 함께 사는 방법을 도모하자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백이 곧 파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백은 번번이 무산되었으리라. 사회적 통념은 세월과 함께 오래도록 굳어진 것이라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견고한 성이다. 사회적 통념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신념 또한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종교적인 확신까지 더하여지면 일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일이 터지고 난 뒤의 아내의 생각과 행동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을 보면 어쩌면 고백을 포기하고 산 것이 현명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과론적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는 늘 뒤끝이 씁쓸하다.
그는 어떤 부류의
남자였을까? 그는 아내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아들을 사랑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를 바랐다. 그는 그 모든 게
공존하기를 바랐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위의 시 276~281행(위의 책 p159)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는 말했어야 한다. 자신의 취향을 고백했어야 한다. 고백하고 자신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표현일 것이다. 말해야 한다는 당위와 말할 수 없음의 머뭇거림 속에서 그는 많은 고통을 숨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완전히 고백을 포기했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 모든 것은 공존할 수도 있다. 잠시 언젠가 올지도 모를 파국을 잊고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다지고 다지고 다졌을 것이다. 순간 순간 찾아오는 불안은 애써 외면했을 것이다. 만약 고백했다면 파국은 일단 면할 수는 있었을까.
그리고 두 번째 눈길을 던졌을 때는
춤을 추는 듯 보였던 사람들 몇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고 노래 부르는 듯
보이던 사람들은 두 남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건 테사가 각오한
바가 아니었다. 분노. 혐오.
그 말, 그 끔찍한 말의
함성들. 이건 다 잘못되었다.
잘못되었다, 교회가 의도한 바가
결코 아니었다.
위험해졌다. 불안해졌다.
―위의 시 443~453행(위의 책 p171)
이것은 ‘의도한 바가/결코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념만 옳고 대립하는 진영의 이념은 그르다는 많은 진영 논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지금 끔찍한 진영 논리와 마주하고 있다. 수많은 사건들이 이 진영 논리 앞에서 기본 개념조차 잃고 사라진다. 진영 논리라니까 그럴 듯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패거리주의에 기반한 조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이 이기주의가 편견을 조장하고 차별하고 혐오하고 결국에는 사람을 죽인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막가파식 폭력을 목도하면서 그제서야 이것은 ‘의도한 바가/결코 아니었다.’ 고 비명을 지르지만 이미 늦었다. 치솟은 불길은 이제 쉬 잡을 수가 없다. 정의를 가장한 폭력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 선량한 많은 이들을 순식간에 동조자로 만든다.
“회개하라, 젊은이들이여. 회개하라!” 그러자 군중
사이에서 물결처럼 동의가 퍼져나갔고
“회개만이 너희를 구하리라”는
외침들이 이어졌다. 구경꾼들이
합류해서 밀치고 떼밀며
구경하려고 법석을 피웠다.
―위의 시 401~406행(위의 책 p168)
그는 크로스드레서였다. 그는 크로스드레서였을 뿐이다. 크로스드레서는 죄가 아니다. 지은 죄가 없으니 그는 처단받거나 회개해야 할 죄인이 아니다. 회개를 소망한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에게 회심回心을 권유하거나 강권할 수는 있겠지만 그는 결코 회심할 수가 없다. 그가 만약 회심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그가 그를 스스로 추락을 선택할 때까지 더 깊은 곳에 숨겼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저 회개하라 외치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미래의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이곳에 지옥을 건설하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교회 신자가 절대 아닌
사람들이 횃불과 등유를 들고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교회 신자들은 병사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는 신의 군대에서
싸우는 병사들이라네.
우리는 싸울 것이고,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네.”
그들이 피 묻은 깃발을 치켜든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던 그때
집의 뒷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위의 시 417~429행(위의 책 p169~170)
의도한 바가 아니었어도 이 이야기는 파국으로 끝났다. 이 이야기를 파국에 이르게 한 것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파국에 이르기 전 파국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 끝난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더라도 우리는 이제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의 파국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니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 이 이야기는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혐오와 차별 이전에 편견이 있었다. 편견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이제 닫힌 성의 문을 열어야 한다. 깨어져야 할 것은 크로스드레서가 아니다. 깨어져야 할 것은 편견으로 고착화한 통념이거나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다. ‘나중에, 나중에’는 이제 그만하자. 우리에게는 다만 지금이 있을 뿐이다. 이곳이 있을 뿐이다.
*남태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망상가들의 마을』, 『상처를 만지다』. 리토피아문학상,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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