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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백인덕/뼈아픈 근황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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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백인덕/뼈아픈 근황 외 1편
백인덕
뼈아픈 근황 외 1편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꾹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哭)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길을 확 당기는
붉고 정갈한 서체
-폭망,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불타버리는 게 낫다는 듯
요절인 듯
절명인 듯
해 질 무렵 거리에 차가운 불을 뿜는다
저린 다리를 잊고
찬불에 움츠러들어
폐업 직전의 정신을 곰곰 헤집어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망각의 기술,
예상표절.
슬픈 눈빛으로 오가는 짐승들 사이
딱딱한 목 뒤에서
기어이 틀어지는 억센 뼈 하나.
슬픔이 강처럼 흘러
밖으로만 휘는 팔을 가진 이들은
슬프겠다
탈구된 어깨 위에
먼지 한 톨 올리지 않고도
뼈저리게 애통하니
울며 밥 먹겠다
슬픔이 강처럼 흘러
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것들에겐
또 다른 세상도 열어주길.
꽃 핀 자리마다 가려진
진탕에서 죽었지만 먹먹한 것들,
뼈는 아직 날카롭고
살은 낭창낭창 흐물거려
검은 미소가 만드는 노란 꽃 갈래
멀쩡하게 뜨고 면상 맞은 눈을 가진
이들은 슬프겠다.
한쪽을 질끈 감거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훤히 쏘아대는
레이저가 무성히 줄 긋는 밤에
난독(難讀)과 비문(飛文) 아니어도
자주 접히는 발목으로
울며 똥 쌌겠다.
슬픔이 강처럼 흘러
떠날 사람들에게 길 비워주고
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것들에게도
또 한 길 열어주면
야윈 가슴 쓸어 담으며
허연 슬픔 같은 밥을 먹겠네
노란 슬픔 같은 똥을 싸겠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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