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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도혜숙/갱년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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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19회 작성일 23-01-0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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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도혜숙/갱년기 외 1편 


도혜숙


갱년기 외 1편



주말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가 쪽에 누워 있거나 

트롯 신동 정동원 노래를 열 번 스무 번 듣는다 

종일 굶거나 네 끼를 먹는다


나도 모르게 옆 동료의 반찬을 가져다 먹는다

마트에서 무언가를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제 자리에 놓는다

집에 사는 사람들이 눈에 따끔거리고 목에 서걱거린다


빗길 출근하다 숨기 좋은 도로 한 쪽에 주차한다

차창으로 내려온 빗방울들이 글썽이며 나를 들여다본다

투명하고 동그란 비의 눈망울과 몸을 섞는다


차가 스스로 시동을 켰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릎은 덜거덕거리고 엄지발톱은 검게 멍들어 있다

닫힌 콘크리트 문처럼 세상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다


꿈속에서 고절한 대나무 하나가 헝클어진 머리칼로 나를 노려보았다

파열된 어깨 회전근과 충혈된 눈가 사이로 누군가 수호검을 보내주었다 

수시로 잠이 들거나 엎드린 채 세상에 등을 졌으나

다만, 왼쪽 볼만 종일 붉게, 아프게 타오른다


누가 내 볼의 아궁이에, 이토록 뜨겁게 불을 때는가.





화양연화*



저문 골목길 국수통이 세 박자로 흔들린다

선 고운 여자를 스치는 남자는 홀로 단정하다

치파오는 뭉친 격정을 단단히 여미었다

젖은 담배 연기는 슬픔과 배신과 절망을 태운다

여자는 남자의 우산을 거절한다

여자의 마지막 자존은 남자를 경계하는 것

그것만이 여자의 무너짐을 속일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당신을 거절해도 이해한다 사랑한다

빗소리 풀어 이별연습을 한다

폭우가 거칠게 그들을 껴안는다

남자가 떠나고서야 후회가 줄기차게 내리친다

가로등이 참았던 울음을 쏟아낸다

남자의 예의와 미소는 체념보다 처연하다  

절제와 품위는 지구보다 무겁다

자리가 있다 해도 그는 여자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티켓 한 장이 더 있어도 그녀는 함께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격정의 수평을 이루기도 하는 것

앙코르와트 나무 기둥은 남자의 비밀을 봉인했다

나무는 스스로 가슴을 열지 않았다

이별이 세월을 떠나고 희미한 그림자만 남았을 때

비밀을 먹은 푸른 언어들이 구멍을 뚫고 길게 자라났다

비밀은 영원을 끝내 배반하였다


경계가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 있고 거기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 속 무덤 하나 꺼내어 서쪽 하늘에 심는다


  * 화양연화: 왕가위 감독의 대표 영화(2000년), 흔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가리킴.





*도혜숙 2001년 《한국시》로 등단. 시산맥상 수상. 지평선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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