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9호/신작시/이세영/못나게 보이기는 싫어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79호/신작시/이세영/못나게 보이기는 싫어 외 1편
이세영
못나게 보이기는 싫어 외 1편
30년 만에 만났다는데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는데 나중에 차나 한 잔 하자는 말로 돌아섰다는데 진짜로 차나 한 잔 하려고 만난다는 그날이 오늘이란다 요 앞에서 잠깐 보고 오지 뭐 아무렇지도 않게 눈만 껌벅껌벅하는 남자 전화번호는 누가 먼저 건넸을까 물어보려다가 넥타이만 쭉 당겨준다 무슨 일 생겨도 혼자만 골똘하던 사람이 웬일로 일러바치는지 따져보려다가 내 남자 못나게 보이기는 싫어 매무새를 고쳐주는데 별의별 생각이 따라붙는다 30년 전 애인은 이 남자에게서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내가 끼어들어 황급히 몸만 나갔을까 오랜 시간 주섬주섬 마음도 챙겨갔을까 한 번도 묻지 않고 여태 살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집 앞 커피숍이라니 혹시 전화라도 올까 싶어 거울 앞에 앉는다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옛 애인을 만나면 정말 차나 한 잔 할 수 있을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거울을 다시 보고 얼굴만 도닥거린다 못나게 보이기는 싫어
말귀를 꿰다
말하자면 희미한 말의 꼬리를 따라 타박타박 자판 위를 걷다가 손을 놓쳤던, 망연히 서 있던 내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슬며시 돌아섰던, 그러기 전에 당신이 먼저 등을 보였던
얼굴이 생각나지 않고 뒷모습만 어른거리던 말, 기다리다가 지쳐갈 즈음 참을 수 없이 당신의 뒷모습을 맨발로 따라간 새벽에는 말꼬리에 매달린 시치미를 읽는다.
나를 품으려거든 초저녁부터 눈을 맞추고, 입맞춤으로 밤이 늦고, 새벽까지 몸을 묻고, 서리 내리는 가을밤의 실연을 녹이라는
나를 떠난 이유 몇 마디 적힌 시치미를 떼고, 방에 갇힌 말은 늘 창에 눈을 둔 채 묵은 책들로 가로막힌 벽을 두드린다.
눈치를 보며 달아나려는 말을 붙들려고 허공에 손짓한 기억이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귀를 한 꺼풀 벗겨 곶감 걸어 말리듯 하나씩 꿰는 꿈을 꾸었다.
*이세영 2015년 《문예연구》로 등단.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 이전글79호/신작시/최영랑/분장법 외 1편 23.01.05
- 다음글79호/신작시/박광영/구름의 그림자 외 1편 23.01.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