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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신작시/하기정/구멍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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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519회 작성일 17-01-0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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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하기정






구멍



맨홀 뚜껑은 위태로운 배꼽입니다
텅텅 울리는 빈 뱃속을 들어가 보는 일이란
숨을 불어 넣는 일이어서 식도에서 직장까지
세상의 모든 길을 뚫고 가겠다는 야망이 숨어있죠
담장 밑에 뚫린 뱀 구멍처럼 꿈틀거리며 말입니다


터널 속에서는 꿈이 반 토막 나기도 합니다만
구멍을 빠져나온 순간 나무 한 그루가 순식간에 뽑히기도 합니다
금지된 상상을 하면 풍선처럼 가벼워지죠


숲 밖으로 빠져나와도 나무들이 줄지어 따라옵니다
구멍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쥐가 더 큰 구멍으로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고양이를 빠져 나와도 야옹, 하고 웁니다만
도너츠는 구멍 안에서만 구멍인 채 합니다


섣불리 구멍을 막아버릴 수 없는 까닭은
구멍들이 간혹 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맷돌은 돌아가고
구멍도 단단해지면
꽃나무 한 그루 쯤은 피워 올릴 줄 아니까요


머리도 꼬리도 없이
앞뒤가 바뀐 변명 같습니다만


혀는 침의 맛을 모르고 식도에서 직장까지
나는 나를 빠져나와도
사람인 척 합니다








서쪽 방




방을 치우기로 했어
참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늘 하던 버릇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방의 모서리를 걸어 본 적이 있어
몰락하는 커튼 뒤로
바람이 마음인 듯 만져질 때가 있어
손등인 것 같기도 하고
귓불인 것 같기도 하고


얼다 녹은 빨래처럼 시계에 물이 흐르겠지
마음이 바람처럼 접혀질 때가 있어
절벽인 것 같기도 하고
허방인 것 같기도 하고


냄새를 풍기는 설치류의
지나간 자국 같은 것
물로 쓴 편지들의 묶음이
꽃다발처럼 버려질 때가 있어
귀 없는 말의 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입 없는 말의 귀였던 것 같기도 하고


호젓한 길로 들어설 때가 있어
혼자여서 당신은 아름답겠지
못에 옷을 박고 몸이 살을 빠져나올 때가 있어
당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하고
등을 돌려 세운 것 같기도 하고
손가락들은 모두 흩어졌겠지


내 방의 모서리를 닦아 본 적이 있어
볍씨의 껄끄러운 감촉들이
눈알을 찌를 때가 있어
당신의 혀로 그것들을 빼내주겠지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인 것 같기도 한







**약력:2007년 5·18 문학상 수상.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가의 눈》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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