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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신작시/강윤미/오늘의 경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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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강윤미
오늘의 경험
그러면서 매력적이다
폭설에 갇힌 동물원은 생각만으로
왼쪽 콧구멍에 눈 뭉치가 들어가 코허리가 시큰해진 하마
기린의 무늬를 기억하며 녹는 눈
며칠째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동물원
눈을 맞으러 따뜻한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착각을 하는 어리둥절들
치타의 속도 속으로 달려 들어간 눈이 치타에게
고양이 엄마와 호랑이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의 사슬에 빠져들게 한다
낮에 등 위로 내린 흰 눈이
밤이 되어 까맣게 변했는데
아침이 되어서도 아침으로 돌아오지 못한 어떤 시차 때문에
얼룩말은 얼룩말이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는
착각을 하게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똥이 뭉쳐 있고
길고 짧고 뚱뚱하고 날씬한 종자들이 모여 있으며
사납고 연약하고 보호하고 보호받는 성격들이 웅성웅성,
온갖 울음소리들이 합쳐지고 쪼개지고
다시 부서졌다 사라지기도 하는 경험이
눈에게는 기이한 풍경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몸이 돌돌 말린지도 모른 채
사각의 거울 속에서 나는 조련을 당한다
잠에 갇혔다가 깨면
우스꽝스러운 거죽을 입고 앉아 있는
내가 낯설다
꽁꽁 얼어버린 머리카락이
길들여진 거울 위에서
고드름처럼 돋아난다
앞머리까지 뒤로 넘긴 얼굴은
뒤통수가 생기기 전 태아의 몰골일까
조금 더 일그러져야 할까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음에 드는 시차의 값으로
미용사에게 돈을 지불한다
미용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동물원이 온데간데없다
숨비
당신이 늘어뜨린 그림자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색칠해둔 마음
주황이었을까 진한 갈색이었을까
감기에 걸렸을 때 나오는 파란 목소리
모든 감정을 껴안은 검정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꿈틀대는
수줍은 병아리 발톱 같은
허밍, 속으로 빠져든
분홍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웅얼거리는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당신의 목소리
떨림과 감정이 만나 우리의 몸은 사라져버려요
공기가 훔쳐 달아난
목,
숨,
소,
리,
목은 잃어버린 숨에 가장 어울리는 포즈를 떠올리죠 어떤 소리가 당신과 가장 닮았나요 이름을 불러줄까요 배꼽 주위를 맴돌던 우주, 나팔처럼 후 불면 깨어나던 당신의 울음, 발가락을 간질이고 겨드랑이를 만지작거리면 태초의 목소리를 기억해내고 웃음은 웃어 보일테죠 당신이 한숨을 내쉴 때 마음은 사뭇 겉늙어가요 내가 사랑하기 이전의 날숨은 휘파람을 불며 날 유혹해요 가끔은 아버지 어머니의 고함이 들숨에서 걸어 나와요 고아인 당신은 씹히지 않는 질긴 고기,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죠
당신이 숨을 고르다 멈춘 그날 그 자리,
누군가 색연필로 칠하다 만 목소리의 봉분
비명이 숨보다 먼저 반응하는 목숨의 절기
**약력:2010년 〈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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