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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단편소설/장시진/상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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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12회 작성일 17-01-0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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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장시진




상실에 대하여




   눈을 뜬다.
   지극히 당연하게 눈을 떴을 뿐인데 뭔가가 이상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마치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가 어중간한 지점에서 멈춘 것 같은 이 느낌. 온갖 오물들이 심장과 폐 속을 가득 채운 것 같은 아찔함. 뜬금없이 이대로 그 오물과 하나가 되어 하수구 속으로 가차 없이 버려질 것만 같은 허기진 생각이 든다.

   일어나 앉을 수가 없다. 뭔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만 같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 잘못된 것이 한 가지 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다는 것. 그 어떤 기억의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다. 내게서 무엇인가가 쏙 빠져나간 것이 분명하다. 칼날이 내 뇌의 한 부분을 도려낸 것 같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멍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순하게 숨을 쉬거나 눈을 끔뻑거리는 것밖에는 없다. 아마도 나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아주 심각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뭘까? 무엇 때문에 나는 내 기억의 전부를 상실해 버린 것일까? 아니, 아직은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 기억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이없는 일이다.

   겁이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제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소리의 흔적을 가늠할 수가 없다. 시계의 초침 또한 존재하지 않는 이 방, 이 한쪽, 이 침대 위에서 나는 역겨운 숨을 쉬고 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폐가 오그라들 지경이다. 이대로라면 나는 얼마 가지 않아서 과다한 호흡으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온갖 잡생각들이 나를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그러다가 다시 또 들어 올린다.

   내 존재의 부재.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 나에게 답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누군가도 나에겐 두려운 존재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내게 믿어야 할 대상은 오직 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쇠약할 뿐이다. 삶의 방향도 시작도 없는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20인치 정도의 TV와 방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화장대, 그리고 낡은 옷장. 작은 창문과 에어컨도 있다. 모텔인가? 여인숙쯤으로 해두자. 요즘은 모텔도 호텔급으로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을 터.

   내가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화장대 위의 지갑을 발견했다. 나는 후다닥 화장대 쪽으로 다가갔다. 지갑과 휴대전화 그리고 자동차 폴딩 키. 나는 지갑을 꺼내 나에게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한, 이를테면 신분증 같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두 장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마일리지 카드가 전부다. 운전면허증의 나는 바로 나다. 그렇다면 <장기하>라는 사람도 바로 나다.

머리가 복잡했다. 거울을 바라보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생수 한 통을 모두 비웠지만 아무 기억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넋을 잃은 채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샤워라도 하면 괜찮을 것 같아 욕실로 향했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 샤워 꼭지를 올렸다. 그 순간 나는 기겁을 했다. 찬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발신표시제한의 전화벨. 누굴까? 어쩌면 나의 부재를 되찾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낯설고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 대답이 없자 저쪽에서 조금은 담담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아니 누군가를 찾았다.

-당신 정말 이러기예요?

지금 여자는 화를 내려던 참인 듯했지만, 묵묵히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구세요?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제가 누군지, 왜 이 전화를 받고 있는지도 알려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만. 제가 누군지 아시죠? 이름은 알아요. 장기하 라고. 그것도 좀 전에 운전면허증에서 알 수 있었어요? 전 누구죠? 제집은 어딘가요? 운전면허증에 나와 있는 주소로 찾아가면 그곳이 바로 제집인가요?”

한동안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그리곤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 쉬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장기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기억도 흔적도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을 상실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 하는가? 나를 채근하고 자책도 해 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지난밤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해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물증도 찾을 길이 없었다. 전화에 찍힌 발신제한표시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휴대전화에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나 식구들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정말이지 낭패다.

시간은 12시를 향해 가차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을 비워 줄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찬물에 샤워를 끝낸 뒤 서둘러 옷장 앞에 섰다. 옷장 안에는 검은색 정작과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색 넥타이가 걸려 있었다. 나는 의심 없이 옷을 입었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섰다. 차림으로 보아 영락없이 문상객 차림이었다.

누가 죽었나?
   격식을 갖추어 차려입은 것으로 보아 친한 사람이 죽은 것이 분명하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두통약이라도 사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 방을 나서면 기억들이 한순간 확 깨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곧 방문 앞에 섰다. 망설였다. 이대로 기억이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막했지만 나는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담담하게 걸어나갔다. 순간 아찔해졌다.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문을 잡고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은 방문들을 지나 나는 안내대 앞에 섰다. 관리인은 없었다. 나는 텅 빈 곳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몇 차례 더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잠에서 덜 깬 50대 중반의 여자가 안내대 안으로 연결된 방에서 문을 열었다. 여자가 눈에 낀 눈곱을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벌써 가시게요?”

벌써 라니, 정오를 지났는데 말이 되지 않았다. 모텔을 찾는 사람들은 피곤을 무기로 낯선 방에서 밤을 보낸 뒤에 아침 9시가 되기도 전에 방을 나서기 마련이다. 아니면 연인이나 불륜의 관계가 두어 시간 시간을 벗 삼아 즐기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제가 여기 몇 시에 들어 왔나요?”
“그때가 아마 새벽 5시였을 거예요.”

   새벽 5시면 나는 지난밤을 어디에서 보낸 것일까?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6시간 동안 나는 방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칙칙한 곳을 택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혼자 들어 왔나요?”
“네. 혼자 오셨어요. 왜 그러시는 데요?”
“아, 아닙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여기가 어딘가요?”
“홍성이에요.”
“홍성이요?”

   내가 집에서 떨어진 이 먼 곳까지 오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옷차림에서 나는 한 가닥 지푸라기를 잡았다.

“그렇다면 여기 장례식장이 있나요?”
“네. 10분만 걸어가면 홍성의료원장례식장이 있어요.”

   실마리 하나를 찾았다. 내가 조문객이라면 그곳에 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모텔을 나섰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가려다가 아까부터 손에 들려져 있던 자동차 키를 그제야 의식했다.

모텔 근처에 차를 세워 두었을 것이다. 모텔 앞에 서서 자동차 열쇠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자동차의 잠김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승용차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뒷바퀴 윗부분 차체에 접촉사고가 난 볼품없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인데.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승용차에 올라탔다. 혹시 내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수석 옆에는 명암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다시 기억을 찾기 위해 명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쪽에서 흔쾌히 전화를 받았다.

“차에 명암이…….”
“아, 내. 죄송합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내가 교통사고를 내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지난밤에 사고가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요. 제가 바쁜 일 때문에 보험 처리하기로 했는데요. 그리고 몸이 아프시면 병원에 입원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곧 그리로 갈게요. 거기가 어디쯤이죠?”
“아닙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우선은 나를 찾아 나서는 것이 우선이었다.

   장례식장을 향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장례식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차를 한 뒤에 장례식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넓은 장례식장에 상갓집 한 곳도 없다니.

막다른 길에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지갑을 꺼내 운전면허증을 살폈다. 운전면허증에 나와 있는 주소로 찾아가면 끊겼던 실마리도 다시 이어질지 모른다.

나는 다시 승용차에 올라탔다. 주소는 서울이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나서야 나는 홍성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나는 온갖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가끔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휴게소에서 한바탕 속을 게워낸 후에야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휴게소의 가락국수의 국물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하지만 면발은 먹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겉도는 면발의 덜 익은 텁텁한 탄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가락국수를 싫어했을 것이다.

국물을 반쯤 마시다가 식판을 반납하고 나서 커피 판매대 앞에 섰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 것인지 망설였다. 커피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새삼 놀라웠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켜 받아들고 휴게소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나에 대한 생각에 다시 빠져들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는 나는 주소지로 등록된 그곳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약에 그곳에서도 내 실체를 알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월요일이라는 것은 휴대전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휴게소에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저들은 어디를 향해 저렇게 몰려들 가는 것일까? 저들에게는 내가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그래서 저들은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다.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 나는 외톨이다.

   식은 커피는 맛이 없다. 커피를 쏟아버리고 쓰레기 분류함에 던져 넣었다. 저렇게 내 인생도 분류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게 닥친 상황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감당해야 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나는 휴게소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 가자, 나의 기억을 되찾으러.

   승용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노트북을 켜자 바탕화면에 한 여자의 사진이 떴다. 여자는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 여자가 나의 연인일지도, 아내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나에게 희망이 되었다.

노트북의 내 문서라는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여러 개의 폴더가 있었다. 그중에서 또 내 작업실이라는 폴더를 열었다. 또 폴더가 여러 개 보였다. 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수필, 드라마, 동화, 평론 등의 폴더를 하나씩 열었다.

작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짐작하건대 나의 직업은 작가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출판사를 다니는 회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장기하의 이름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나는 작가다. 하나씩 하나씩 나는 옷을 벗어가고 있다.
내 사진이라는 폴더를 열었을 때 바탕화면의 그녀가 화면 가득 장식된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여자는 나와 아주 긴밀한 인연이 있을 것이다. 나는 노트북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인터넷을 클릭했다. 대뜸 떠오른 것은 SNS 화면이었다. SNS를 시작 페이지로 설정해 놓은 것을 보면 나는 SNS를 즐기는 편일 것이다. 하지만 SNS에 접속할 수는 없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디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이디 입력창에 마우스를 대는 순간 내 아이디로 보이는 영문단어가 떴기 때문이다. 문제는 패스워드였다. 패스워드를 찾기 위해 생각나는 단어들을 입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계에 부딪히자 나는 그만 노트북을 접고 말았다.

비단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잃은 기억을 어떻게 생각할까? 스스로 기억을 지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의 상실은 교통사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진탕.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빌미를 제공할 만한 일이 없다. 빌어먹을 교통사고. 먼저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병원에 입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길을 오른다. 길 위에서 또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운전을 했다.

무뎌진 정체성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늦장을 부린다면 나는 영영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도로는 정체를 반복했다. 짜증이 날 즈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실망이야.

   발신번호제한의 바로 그 여자였다.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굴까? 누구기에 발신제한까지 해가며 나를 비난하는 걸까? 알 수 없이 나는 짜증이 났다. 그것은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기억만 잃지 않았더라도 여자의 정체를 쉽게 알아냈을 텐데. 여자의 존재가 궁금했다.

노트북 바탕화면의 그녀는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여자는 도대체 나에 대해서 무엇을 그렇게 실망했다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그것도 모자라 길을 잘못 들어 나들목으로 빠지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은 재탐색에 들어갔지만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재탐색을 감행한 내비게이션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며 아우성이었다. 되돌아가면 다시 정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국도를 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노트북 바탕화면의 그녀를 만나고 싶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나는 곧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내 주소에 가면 그것은 저절로 해결될 일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자꾸만 이상한 길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틀에 박힌 내비게이션의 특성. 혹시 나도 그런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도 그 틀에 박혀 내 실마리를, 기억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홍성에서부터, 홍성의 그 여인숙 같은 모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홍성으로 다시 발길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목적지는 내 주소지다. 이미 출발한 이상 되돌아설 수는 없다.

도로의 정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길을 옮길 걸 그랬다. 나는 내비게이션의 추종자가 되고 만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데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내겐 시간이 촉박하므로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찾고 싶다. 내 지난 기억들을 모두 끌어안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 어떤 조건도 달고 싶지 않다. 단지 내 기억에 대한 회상을 나는 찾고 싶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진다. 정체가 심해질수록 나는 안절부절못한다. 나란 존재의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를 찾고서야, 나란 존재를 알고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나는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막돼먹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휴대전화기에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전화번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제 잘난 맛에 살아온 독불장군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불행하든 행복하든 간에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달린다. 무감각해진 내 기억 속을.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 간다. 길 위에서 헤매는 사이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3시간이었으면 도착했을 거리였다. 그런데 가당치도 않은 오기로 내비게이션을 신용하지 못한 탓에 나는 하마터면 더 긴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그동안 휴대전화는 실어증에 걸린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넌 잘난 녀석이다. 나도 너처럼 이렇게 길 위에서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소지의 도착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주소가 확실한지 아닌지가 문제다. 나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한다. 하지만 두렵다. 내가 생각하던 내가 아니라면 나는 좌절하게 될 것이 뻔하다.

주차하고 나는 망설인다. 나를 알게 되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 대한 존재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두꺼운 기억들의 옷을 벗어갈수록 나는 점점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이 종료되었다. 종착역이다. 이 종착역에서 나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악몽에 빠져버릴지 모른다.

시동을 껐다. 이제 차에서 내려야 한다. 나를 찾아온 기나긴 여정을 끝내야 한다. 습기 가득한 찬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을의 은행나무는 일찌감치 옷을 벗는다. 그리고 고약한 냄새의 열매를 떨어뜨린다. 그 열매의 본질은 겉과 속이 다르다. 속은 영양가가 풍부하지만 겉은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은행나무는 번식의 방법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 그러기에 그 많은 열매를 떨어뜨리며 안전장치를 해 둔 것이 아닌가. 나 또한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 그것은 운전면허증에 나와 있는 주소지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차에서 내렸지만 나는 주소지로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한 번쯤 더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을 법도 한데 아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이들의 부재로 놀이터는 휑하다. 나는 놀이터를 걸었다. 낙엽이 제법 깔렸다. 하지만 마른 낙엽이 아니라서 그런지 바스락거리지 않았다.

주인 잃은 벤치, 주인을 잃은 놀이터, 기억을 잃은 나. 동병상련이랄까, 나는 침울하다. 내 인생도 이처럼 침울하다면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찾아봐야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이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본다.

놀이터를 서너 바퀴 돌다가 나는 상가의 호프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제정신으로는 주소지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어 잔을 마셨을까?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취기라고 해봐야 새하얀 백지의 어중간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소지로 찾아가는 것밖에 없다.

“저 혹시 저를 본 적이 있나요?”

계산을 마치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종업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주소가 맞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 호프집에서 몇 번은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른다고 하니 다시 걱정되었다.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그리고 동수를 확인했다. 이제 올라가면 알 일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막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7층 버튼을 눌렀다. 알 수 없이 느껴지는 이 중압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7층에서 멈추었다.

701호 앞이다. 나를 반겨줄 바탕화면 속의 그녀가 나오길 나는 내심 기대했다. 그녀는 분명 나를 일깨워 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노트북 바탕화면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나는 한껏 기대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뭔가 잘못됐다. 인터폰에서는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701호 맞나요?”

나를 반겨줄 사람이라면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꼭 그녀가 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낯선 목소리다. 휴대전화 속 발신제한표시로 전화를 걸어오던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뭐고 또 아이의 목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습니까?”
“누구시죠?”
“잠시 문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문을 열 턱이 없었다. 낯선 사람에게 누가 문을 열어 주겠는가.

“그러고 보니 전에 사시던 분이네요.”
“전에 살다니요?”
“부동산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요. 급하게 집을 처분해야 한다고 해서 제가 샀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저는 무슨 말씀인지 통…….”
“우리가 이사 온 지 일주일쯤 됐어요. 착각하셨나 보네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초인종을 다시 누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여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란 존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계단을 통해 아파트를 내려왔다. 한 계단 한 계단 되씹으며 나 자신을 갈구했다. 나 자신을 갈구하면 할수록 나는 더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내 보금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내가 쉴 수 있고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곳을 나는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

승용차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경찰도 와 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이 차의 주인 되세요?”
“네, 그렇습니다만.”
“운전면허증 좀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경찰이 내 차와 옆 차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경찰은 내 운전면허증을 조회한 후에 다시 돌려주었다.

“사고가 났는데 당신 차가 옆의 흰색 승용차를 들이받은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접촉사고는 없었는데요.”
“그럼 이 접촉사고 흔적은 뭡니까?”
“그건 홍성에서 접촉 사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접촉사고를 낸 기억이 없습니다.”

홍성에서 있었던 접촉사고 당사자의 명함을 내밀었다. 경찰은 그 당사자와 통화를 시도했고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명함을 되돌려 주었다. 경찰은 다시 승용차의 접촉면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비교해 본 결과 비슷한 접촉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도 수긍했다. 하마터면 접촉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었다.

경찰은 사고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경찰의 요청으로 차를 빼주어야 했지만, 술을 마셨기 때문에 경찰에게 키를 내밀었다. 대신 경찰이 다른 곳으로 차를 주차 시켜 주었다. 수습을 마친 경찰이 되돌아가려 했다.

“저, 저 좀 찾아 주시겠어요?”

의지할 것은 이제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경찰의 도움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더는 내게 남은 실마리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차에서 노트북을 꺼낸 뒤에 경찰차를 타고 지구대로 향했다.

“그러니까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찾을 길이 없네요.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경찰은 나를 앞에 앉혀 둔 채 내가 제시한 운전면허증으로 나를 조회하기 시작했다. 주민등록 번호를 입력하는가 싶었다. 그리고 주소를 확인했다. 운전면허증에 나와 있는 주소지와는 다른 곳이었다.

“다행히 우리 관내에 주소가 있네요. 결혼하셨고요. 우선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 일어나시지요.”

경찰은 조급해하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경찰차에 함께 탄 채 내 근거지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경찰차는 새로 지은 아파트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경찰을 뒤따라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꼈다. 집을 찾는다 해도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마주치게 될 누군가가 두려울 뿐이다. 나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른다.

경찰이 벨을 눌렀다. 그러자 안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문이 열렸고 안에서 낯선 여자가 나왔다. 그러나 노트북 바탕화면의 여자가 아니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발신제한표시로 온 전화 속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소리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십니다. 아시는 분인가요?”
“네. 우리 남편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난 당신을 모르는데. 나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아니야. 분명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야.”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모시고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이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문을 간다고 하고서 이틀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조문을 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나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여자를 내 아내로 인정하기에는 일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쪽에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여자와 나였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나의 아내라는 말인데. 그럼 노트북 바탕화면의 그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정말 기억이 없어요?”
“네. 정말 내 아내가 맞습니까?”
“당신 정말 왜 이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잘 기억해 봐요? 내가 정말 기억나지 않아요?”

여자의 눈이 그렁그렁 해졌다. 자칭 아내라는 여자는 집안 곳곳을 가리키며 내 기억을 돌이키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적응할 수 없는 낯섦에 나는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노트북을 켰다. 그리곤 아내라는 여자를 불렀다.

“이 여자 아세요?”
“그 여자는 인기가수 하은지잖아요. 당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말이에요.”

하은지? 그 말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도 했다. 인터넷에 접속해 SNS를 열었다. 그리곤 장기하 라는 내 아이디를 치고서 패스워드로 하은지를 입력했다. 그러자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기억나는 게 있어요?”

아내라는 여자는 내 기억의 한 부분을 잡고 싶어 했다.
SNS의 타임라인이 쉴 사이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내가 쓴 글을 찾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장기하 라는 것 외에는 마땅한 것을 꿰맞출 수는 없었다.

“기다려 봐요. 자기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올게요. 혹시 모르잖아요. 익숙한 것을 접하게 되면 다시 기억이 되돌아올지도.”

아내라는 여자는 주방으로 향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나는 타임라인을 살폈다. 그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절박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것에 겁이 납니다.」







**약력: 1970년생.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바쁘면 환절기에 만나자』 외. 에세이집 『내 머릿속의 또 다른 나』 외. 장편소설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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