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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특집/제7회 김구용시문학상/안명옥/자작나무 숲 외 5편/심사평/수상소감/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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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제7회 김구용문학제
김구용시문학상
안명옥
자작나무 숲 외 5편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 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 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아침입니다
눈이 오려는지 흐린 날의 아침
몇 년째 월급이 없는 밤을 자고 나간 남편의
구겨진 이불 같은 아침
밤새도록 공부하다가 비몽사몽간에
알바 하러 간 딸의 잠옷 같은 아침
가족이 잠든 밤에도
홀로 깨어 컴퓨터 앞에서 웅크리다가
아침에 노랗게 잠든 아들의 양말 같은 아침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아침입니다
나는 지난 일 년 간 강사로 쌀값이나 벌었을까
긴 겨울방학 강사료 끊기고
피부양자 인정요건 상실에 따른 의료보험료 부과통지서를 보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울화병을 선사하는 아침
아들의 입영통지서를 받아든 아침
배워야 잘 살 수 있다는 말
더는 할 수도 없는 검은 아침입니다
생략된 아침을 사는 아들의 아침
시래기 주워 팔던 할머니가 대통령 팔 붙잡고 우는 아침
나도 누군가의 팔 잡고 싶은 절름발이의 아침
6개월 이상 근무해야 받는 실업급여수당
영세 노동자들이나 일용근로자들에겐 꿈에 불과한 아침
시집을 내어도 살림이 펴지지 않는 아침
미친 세상이 미친 바람으로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아침
나의 기도가 늘 턱없이 부족한 아침
하느님은 아직도 아침을 사랑하시는지
환한 햇살을 쏟아 붓는 이 찬란한 아침
발칸산맥의 장미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딴
장미로부터
장미가 최고 향을 뿜어내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
제부도 동창회
입 안 가득 개펄을 물고 있는 조개의 해감을 빼내고
친구들은 불판 주위로 모여든다. 여기저기 조개 굽는 냄새
조개가 불판 위에서 몸을 열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누구는 미소를 짓고 누구는 침을 흘리고 누구는 담배를 문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 굽는 냄새
영재는 농사짓다 집 나간 아내를 생각하듯 전어를 정성껏 뒤집는다
성질이 급해서 서울까지 못 온다는 전어를 고향에 와야 맛본다며
학수는 전어를 찜해둔다
짜디짠 바다가 비릿한 바다가 출렁이는 바다가 싫어 고향을 떠났다가
빈털터리로 돌아와 어망을 다시 손질해온 기찬이는
수온이 바뀌어 물고기가 바뀌듯
동네 커피숍에 또 다른 미숙이가 왔다고 한다
밀물과 썰물에 시달리다가 머리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모래톱의 물주름이 목까지 차오르고 말랐으니
이젠 서로 위로한다 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누군가를 사랑하여 회춘한 얼굴이라고
언제 왔는지 동렬이가 내 어깨를 치고 밀물처럼 들어와 앉고
추억의 풍랑 심한 파도에 시달리는 동안
우리 몸이 끝없는 유년시절로 잠수해 들어갈 때
병을 앓아 수척해진 재훈이가 가시 많은 게 맛있다며
전어를 가시 채 삼키듯이 먹는다
나는 잠자코 침묵하는데 전어 가시가 목에 걸리고
바다에 사로잡힌 이 영혼들이
조개였다면 전어였다면
바다와 뻘밭을 산책하기 좋아하는 구름처럼 갈매기처럼 바람처럼
노을 지는 제부도가 쓸쓸하고 두렵진 않았으리라
바다에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제부도다 서해다
엄마가 캐온 굴과 바다 비린내가 집안을 굴러다녔다
야, 조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잖아
우리 매운탕 하나 더 시켜 밥 좀 먹자
누군가 매운탕을 가져오고 술잔이 돌고 누구는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바다냄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맡아온 것이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이젠 뭐든
가끔 나는 고층 건물의 고독을 생각해
이웃이 있어도 이웃이 없고
건물은 나에게 그림자를 선물해
그런 날이면 나는 그림자놀이를 즐겨
타인의 시선에 무심한 삶이 편안해지고
낡아 갈수록 여유도 생겨
얼굴을 세멘으로 도포하고도
유머를 잃지 않게 해준 건 허공이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삶도 괜찮아
붉은 구름은 호기심 많은 나를 충만하게 해
당 현종은 양귀비에게 젖은 머리카락 말리라고
누각을 다 지어주었다지
내 남은 생애동안 그런 사랑이 올까 몰라
겨우내 씨앗 하나 허락하지 않던 내 자궁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민들레꽃을 피워
콘크리트 심장을 가진 후로 뜨거운 여자가
됐나 몰라
뭐 하냐고? 그냥 햇빛을 오래 바라보고 있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도 덜 일하고 내 시간을 가져
일만 하러 지구별에 온 건 아니거든
모처럼 뇌에 따듯한 에너지가 차올라
나 좀 안아줄래? 나는 꽃샘추위
바람을 꼭 안아주지
내 젖무덤에 얼굴을 묻은 바람이 순해져,
사납던 마음씨도 착해지지
착해지지 않아도 돼, 이젠 뭐든
다 이해 해
생각 따라 구름 색깔이 변하고 누군가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 하나 자유로워지고
배회하는 비닐봉지야, 내 품 안으로 오렴
흔적
자동차가 제 생의 속도로
길을 질주한다
속도는 자동차를 앞지르다
자동차를 버린다
자동차는
길을 버리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원해
구름 속으로 다가가
집이 된다
집이 느리게 걸어간다
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내며
다음 생엔 빗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저 집
조바심 나는 희망 같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집
저 집 창문엔 풀벌레 소리 들리고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인
누군가 찍어놓은
붉고 푸른 지문 몇 개 얼룩져 있다
▶안명옥_2002년 《시와시학》 신춘문로 등단. 서사시집 『소서노』(한국문화예술 위원회 2006우수문학도서 선정). 시집 『칼』(한국문화예술 위원회 2009우수문학도서 선정). 장편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한국문화예술 위원회 2012우수문학도서 선정).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2016 세종나눔 우수문학도서 선정).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네 권. 성균문학상 우수상 수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수상, 만해 ‘님’ 시인상 우수상 수상.
심사평
역설을 원융圓融으로 육화肉化한 감각적 성취
문학의 시대에서 위기 아닌 시대가 없었지만, 지난 2016년은 한국문학 전반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한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중 몇 가지만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의 섣부른 기대와는 달리 노벨문학상은 가수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그의 수상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결국 한국문학은 소수 언어라는 한계성과 인류적 시각의 부재라는 문제를 극복하기도 전에 더 이상 문학이 활자에 의지하거나 그 후광에 기대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점까지 염두에 둬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물론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권위 있는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말의 위로가 되었지만, 이는 또한 하반기 문학 단행본, 특히 소설이 괄목할만한 성장률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롯이 한강의 작품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허약한 저변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을 뿐이다.
정치 상황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촛불 시위와 대통령 탄핵안 국회가결이라는 격랑에 휩쓸렸지만 문단은 최순실이 살렸다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위태로웠다. 이름을 알 만한 소설가, 시인들의 온갖 종류의 성추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기 때문이다. 문단의 고질적 폐습이란 자탄에서 멈추지 않고 문인 전부가 의심의 눈초리를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말에 터져나온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은 작성 의도나 해당자들의 불이익라는 문제 이전에 가뜩이나 취약한 문학 기반이 정치적 상황에 더 종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혼란상은 시인 김구용이 한국전쟁 이후 직접 목도目睹했던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불협화음에 다름 아니다. 한국시의 선각자로서 김구용을 다시 생각하며 이 위기 속에서 제7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또한 거기에 있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된 안명옥 시인의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은 개인적 서사라는 점을 제외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무의미, 그리고 불협화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서 김구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진부해졌거나 느슨해져 버린 관계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존재의 역설을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다. 특히, ‘맨홀’이나 ‘못’, ‘창문’, ‘의자’, ‘방’과 같은 낯익은 사물들을 통해 친숙함의 이면에 감춰진 날카로운 각角을 섬세한 감각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감정의 흐릿한 윤곽을 거둬낼수록 사물 자체만 남는다는 릴케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부조리와 무의미를 걷어내고 어떻게든 관계의 맥을 다시 뚫으려고 하지만, 종국에는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발칸산맥의 장미」)고 선언해버린다. 이는 최소한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러고 나서 매장하는 지상의 역설이다”라고 말한 칼 샌드버그의 명제를 뛰어넘는 시적 인식의 지평을 보여준다. 김구용은 후기에 당대의 혼란을 넘어서는 ‘원융’의 경지를 개척하고자 분투했다. 이에 견주어 수상자 안명옥 시인은 이후 어떤 경지를 향해 그의 시를 갈아갈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심사위원:강우식, 허형만, 장종권
수상소감
먼 이명 같은 수상 소식
수상 소식이 먼 이명 같았습니다. 실내온도 16도. 냉기 가득한 집안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우우,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멍해져 있었습니다. 찬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얼굴이 얼얼했고 다시 얼이 통로를 통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차가웠던 피는 데워졌지만, 어떤 생각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시에 빠져 보낸 시간들이 언뜻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김구용 선생님 참배하는 데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조금은 어여쁘셨던 걸까요. 선생님께서 분에 넘치는 영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을 알아갈수록 시정신과 인품에 숙연해집니다. 선생님께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성균관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새삼 뜨겁습니다. 김구용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시작업으로 큰 인연에 보답하겠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들, 관계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더욱 빛나는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게 기적 같은 민규와 지영이에게도 모자란 엄마 늘 응원해줘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언제나 제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든든한 마음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남깁니다. 제가 받는 수상의 기쁨은 다 이런 인연들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이 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치열하게 살겠습니다./안명옥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
― 안명옥 작품론
이민호 (시인·평론가)
1. 뜨거운 자작나무의 뿌리
시집을 건네며 “다시 달이 돌아왔다(‘시인의 말’).”라고 안명옥은 말한다. 그래요? 잠시 멈칫했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군요.” 시 한 구절로 답해본다. 달의 귀환은 나무의 재생처럼 반갑고 설렌다.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무언가 기쁜 소식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불의 시인으로 꼽았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시 「야상곡」 중에 눈에 들게 자리하고 있다.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는
땅으로 향해 굽은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창공에 높이 솟은 종려나무일 뿐이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느낀다.
나무는 땅에 묶인 존재다. 땅은 본질이며 삶이지만 구속이다. 새롭게 태어남은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그리고 대지를 떠나 창공으로 뿌리의 근원을 옮길 때 신성한 신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불같은 역설의 핵심이다.
그처럼 안명옥은 자작나무 숲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재가 된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안명옥의 시는 그 뜨거움과 차가움을 모두 안고 있다. 뜨거운 불의 기억과 차가운 물의 실존은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처럼 자유와 기쁨의 흔적으로 읽힌다. 거기에 접신했던 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가 ‘달’이 되어 ‘돌아온’ 사연이다. 엘리아데의 말처럼 ‘달’과 ‘나무’는 모두 신의 연속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뜨거운 자작나무’의 뿌리에 가 닿게 된다.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의 뿌리에서 불의 여자로 변신했다 물의 여자로 재생하는 안명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쿠오 바디스 포에타Quo vadis, poeta(시인이여, 어디로 가나요)!
2. 불의 기억 - 제1부
첫 번째 길은 여성적 글쓰기로서 시 쓰기다. 엘렌 식쑤Hélène Cixous가 『메두사의 웃음』에서 선언했던 것처럼 “여성의 경험에 기반 한 글쓰기를 통해 여성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율적인 주체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시집 제1부를 지배한다. 그것은 ‘참숯처럼 뜨거운 역사(「볼펜」)’다. 참숯이 지니는 불의 상징성은 여성적이다. 순식간에 타올라 소멸하는 남성적 불태움과 달리 은근히 불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시에서 보듯 그가 ‘어둠의 자식’의 일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 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 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자작나무 숲」 전문
참숯 같은 가슴에 품은 불의 경험은 ‘어둠과 추위와 촉기’를 배경으로 한다. 부정의 힘이 그를 타오르게 한다. 자작나무 숲에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어둠은 무의식의 세계이며 의식이 억압했던 공간이다. 거기에 그는 웅크리고 있다. ‘뜨거운 짐승’은 ‘자작나무’로 변신하고 ‘축축한 달’로 또 몸을 바꾼다. 이 모두 ‘어둠의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숲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자식을 품고 있다. 젖었음에도 활활 타오르는 역설과 어두울수록 빛나는 아이러니는 안명옥의 시적 주체의 특성이다. 변형과 재생의 과정이다. 이는 불의 상징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중심에서 쫓겨난 어둠의 자식을 자기 안에 두고 있다. 어둠의 지향은 주변성의 추구이기도 하며 불의 상승적 욕망을 역설적으로 꿈꾸는 일이다. 여성적 글쓰기의 면모라 할 수 있다.
변형, 변주, 변모를 쉽게 할 수 있는 자율성, 자유야 말로 주체적인 여성 상징의 도구다. 안명옥은 ‘둥글게 살려고 하던 공’에서 탈주하여 ‘더 멀리 더 오래 날아가던 공’을 욕망한다(「공」). 기존 중심에서 튀어 올라 날아가려는 욕망의 귀결이 비록 ‘늪에 처박히는’ 추락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를 몸속에 지니고 있다. 이 변형의 힘을 상징화한 기호가 ‘구멍’이다. 제1부의 시편들에서 변모하는 ‘구멍’의 계열체와 만나게 된다.
매운 향기, 파란 싹을 피워내는 자궁과 같은 ‘양파’(시 「양파」에서), 적막하게 버려져 있으며 주인 없는 ‘신발’(시 「적막한 한 켤레」에서), 시간에 삶을 내어주는 이치를 알고 있는 증여적인 ‘의자’(시 「고흐의 의자」에서), 그믐달처럼 이지러지는 ‘맨홀’(시 「맨홀」에서), 남성지배에 신음하는 ‘단추구멍’(시 「못」에서), 봄볕에 달구어진 ‘빈집’(시 「빈집」에서)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어둠의 자식이며 자작나무 숲에서 온 것이며 뜨거운 참숯이 품은 불을 기억하는 여성적 물질이다. 이 불의 기억 혹은 여성적 경험, 여성으로서의 역사가 표명하는 핵심 메시지는 남성적 기호인 모든 ‘창문(틀)’을 부수고 상승하는 자유와 해방이다.
3. 물의 실존 - 제2부
제2부 두 번째 길은 물의 이미지로 넘친다. 이는 여성적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타자성의 지향이다. 이타적 증여의 삶은 오로지 여성적 행위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잉태와 출산을 경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안명옥은 불의 기억 속에서 한때 ‘겨우내 갇혀 있던 뱀 한 마리’였으며 ‘독 오른 몸뚱이’였다(「꽃샘추위」). 불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불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불도마뱀과 같았다. 스스로 불타올라 소멸하는 변화무쌍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뜨거운 본질은 삶의 실존 앞에서 물을 바라보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물을 바라보는 그는 물에 비쳐 바라보여지는 대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의 총체적 인식이다. 대상 즉 타자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지붕 위 고추가 햇살에 익으며
붉게 긴장해 있는 오후
뒤란 장독들 침묵을 삭히고
돌담길 피어난 맨드라미
여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들녘 늙은 황소의 노래가
자꾸 가라앉는 하늘을 간신히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방죽으로 나앉은 나팔꽃들
내려앉은 노을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린 채
제 속에서 키운 빛을 꺼낸다
―「나팔꽃」 전문
고추, 장독, 맨드라미, 황소, 나팔꽃이 꺼내는 ‘빛’은 강렬하지 않다. 불태워 버리리라 군림하고 위협하는 기운이 아니다. 긴장하고 있고, 침묵하고 있으며, 내려앉은 것들을 향해 꺼내는 모성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이 빛을 몸속에 키웠음으로 그러하다. 이 잉태와 출산의 행위야 말로 새로운 탄생을 상상하는 타자의 수용이라 할 수 있다.
물은 누구나 체험하는 보편적인 물질이지만 결코 누구도 동일한 물, 한 가지 물을 체험하지는 않는다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물은 각자에게 각자의 기억과 추억, 서로 다른 느낌과 감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명옥이 체험한 물은 ‘구멍’이 변주되는 물질 속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시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방’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렸을 빈 의자’로, ‘고독한 해바라기를 위해 준비된 빈 꽃병’으로, ‘뻣뻣한 수염의 진실을 말해주던 거울’로 옮아간다(「고흐의 침실」). 궁극적으로 ‘구멍’은 물의 상징적 상관물인 ‘거울’에 종착한다. 그 물의 상상력은 ‘진실’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안명옥의 시는 전력을 다해 기다림 끝에 탄생한 것이며, 고독하지만 진실을 말하려 한다. 이 물의 나르시스적 상징은 그에게 고백을 강요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이는 ‘어둠의 자식’의 재생이다. 그래서 에코의 환상 속으로 넘어가길 욕망한다. 이때 반향하며 확장되는 물의 물질성이 바로 타자의 수용이라 할 수 있다.
안명옥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우리는 달빛을 잃었다」)’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 아이는 어둠의 자식이며 미친 사람들이며 ‘어두워야 빛나는’ 존재다. 이는 기쁜 소식이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곧 오리라는 희망이다. 이 수태고지의 신화는 매우 구체적이다. ‘베트남 처녀(「낮술」)’의 수용으로 ‘검은 쥐(「검은 쥐」)’와의 일체성으로 드러난다. 검은 쥐는 한때 ‘내쫓아도 다시 들어와 살고/거저먹으려는 습성’을 가져 비난 받았던 존재들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는 스스로 자기화하여 여성의 이미지와 겹쳐놓는다. ‘슬픔이 서린’, ‘자식을 낳’는 여성의 실존과. 이러한 타자의 수용은 ‘살아가는 존재 이유에 대한’ 골똘한 사유에서 비롯한다. 이처럼 안명옥 시의 특성은 “오려면 더 떼로 몰려오라”는 타자성의 확장과 개방성에 있다.
4. 역사 속으로 - 제3부
세 번째 길은 제1부의 시편들이 간직한 불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불이 표명한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3부의 시편들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공간과 마주한 안명옥을 담고 있다. 그는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식하고 있다. 특히 잉여의 문제에 답하려 한다. 이는 소수자를 지향하는 태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4월만 되면 무성한 녹음을 환하게 피우며
둔락을 이룬 보랏빛 비명소리 듣는다
아랍에 봄이 왔듯
거창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신원면 하늘도 내려다보고
울창한 산의 나무들은 다 보고 다 들었어도
박산 골짜기에서 피바다를 이루고
학살된 영혼들을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부등켜안은 무덤은
총질하는 햇볕을 지천으로
보랏빛 제비꽃을 피웠다
거창의 봉분 같은 능선을 구름은 무심히 지나가고
학살은 역사교육관 사진들 속에서만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무덤가 울컥울컥 객혈하듯 흐드러진 제비꽃
아무 말 없이 아름다웠다
―「제비꽃」 전문
안명옥은 불의 이미지를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정형물이 아니라 ‘둔락을 이룬’ 제비꽃의 보랏빛 감각처럼 역동적인 동형물로 인식한다. 그래서 4월의 시간은 한 날 한 시에 묶여 있는 정지된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4월이 오면 무성하게 피어나는 제비꽃처럼 움직이는 공간성을 지닌다. 그러한 인식이 바로 불의 역사의식이다. 그는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미학의 차원으로 상승시키려 한다. 이 상승 욕망이야말로 여성적 글쓰기의 변주라 할 수 있다. 고정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 새롭게 재생하려는 주체의 자유로운 지향이다. ‘보랏빛 비명’, ‘객혈하듯 흐드러진 제비꽃’은 소멸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 엠페도클레스의 투신을 떠올리게 한다. 에트나 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 의지적 행위를 아름답다 호명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아름다웠다’는 언어의 아이러니는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진달래꽃의 역설과 진배없다. 그래서 거창의 봄은 좁은 공간에 협소하게 갇히지 않고 아랍의 봄으로 확장되는 역사의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 제비꽃(불)의 역사성은 ‘오늘도 누군가/또 바닥으로 내려왔다(「낙엽」)’는 추락하는 존재에게, ‘공장의 연기’처럼 세상 안쪽에서 밖으로 추방된 자들에게(「낙타는 어디로 걸어갔을까」), 이 지상을 캄캄하게 지워버리려는 달의 욕망에게(「달」) 시선을 두고 있다. 부조리와 모순을 인식한 ‘뜨거운 피’를 가진 나에게(「불의 기원」), 무엇인가 상실한 잉여적 삶에게(「놓쳐버리다」), ‘하나 둘씩 못을 뽑아낸 방’처럼 치유를 꿈꾸는 자에게(「느릅나무 방」), ‘언젠가 밥이 될 사람들’에게(「밥」) 부지런히 옮겨간다.
이처럼 세 번째 길에서 타자를 수용하며 시의 경지를 넓히는 안명옥의 사회적 자아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변방에서 창조는 시작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은 조금씩 변화되고 이기려는 자들뿐인 운동장에서 나는 지기 위해 뛰어요 넘어져도 자꾸 웃어요 져주려고 나는 존재하거든요.” 말하는 안명옥의 심중에는 소멸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려는 역사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5. 생의 한 가운데서 - 제4부
네 번째 길에서 안명옥의 삶 속에서 개인화된 사물과 만나게 된다. 제4부의 시편들은 그의 삶을 어지럽게 흩뜨려 놓고 가라앉은 물속 침전물과 같다. ‘부재, 슬픔, 연민, 불안, 희생, 죽음, 두려움, 아이러니, 한계, 비참, 공간, 인내, 종착점’ 같은 언어는 물의 이미지 계열체들이다. 제2부에서 안명옥의 삶의 현실이 꿈에 투영된 것이라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의 꿈이 현실에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처럼 그의 시적 경계는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진동하고 있다.
너는 내가 빠져나와 버린 빈 바다다. 너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그런 바다가 아니다. 폐선처럼 네 기슭에 좌초해 있는 세월, 시간의 파편이 네 여린 살 속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너는 진주를 만들었다. 태풍을 건너온 네 몸에선 물미역 냄새가 난다. 네 곁에는 해국 끝없이 핀다. 네 위로 흐르는 뭉게구름도 너를 닮아간다.
―「헤밍웨이는 왜 스스로 바다에 가서 죽었나」에서
내 몸을 울려서 꽃을 피우고
내 몸을 울려서
물 넘고 먼 들판을 달려간다
살갗을 뚫고 토해내던 울음
나는 울음으로 성장한다
나는 아픔으로 단련된다
―「종」에서
바슐라르는 물이 표면과 깊이를 지닌다고 했다. 물에 참여하고 물과 만나고 물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물, 모성으로 회귀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안명옥은 불의 기억 속에서 물의 실존을 겪고 있는 병을 앓고 있다. 뜨거운 여성성의 발현을 꿈꾸다가도 모성이 지니는 실존 앞에 다소곳하다. 안명옥은 샘물과 같은 물의 표면에서 기원하지 않았다. 그는 바다에서 왔다. 바다의 깊이를 지니고 꿈꾸는 그의 면모를 시 「헤밍웨이는 왜 스스로 바다에 가서 죽었나」에서 발견하게 된다. ‘비어 있고, 좌초된’ 생을 끌어안으려는 안간힘이다. 그럴 때 그의 시는 소리를 낸다. 시 「종」에서 진술하듯 자기 억제의 틀 속에서 공명하는 파문이다. 그만큼의 깊이로 울리는 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안명옥의 시 쓰기는 깊이를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검은 이미지. 구멍의 상상력은 블랙홀과 같다. 그러나 생의 한 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종말을 예고하지는 않는다. 스티븐 호킹의 말처럼 ‘블랙홀은 그다지 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그가 토해낼 시의 미래, 화이트홀을 예감한다.
6. 영혼의 나무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다시 돌아오는 달」)는 어떤 존재인가. 이번 안명옥의 시집은 두 개의 굵은 줄기가 연리지를 이루고 두 개의 세밀한 뿌리가 얽혀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나는 나무는 재생의 프레임 속에서 주물呪物처럼 보인다. 그 안에 무언가 속삭임이 있다. 나무아래에서 수없이 기원했을 주문이 걸려있다. 살며시 귀 기울이면 다음과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시간을 저축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면/영원히 사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면//고흐의 체온을 기억한다 고흐의 무게를 알고 있다(「고흐의 의자」)
-어두워진다는 건 휴식이 주어지는 것(「검은 꽃」)
-누군가의 눈물사용법은 긴 담배를 태우는 것/나의 눈물 사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인공눈물」)
-봄볕에 달구어진 빈집은/이름 불리기를 기다리는 착한 짐승 같다(「빈집」)
-땅의 살이 굳어지면/길이 된다… 굳는다는 건/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모과」)
-모든 것이 붕괴될 때 새로운 것이 태어난듯(「벽」)
-피를 흘려야 치유된다(「타란튤라」)
-삶이란 이지러진 생채기를 제 안에 새기는 것이다(「가구의 이력」)
-어두워야 별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우리는 달빛을 잃었다」)
-신었던 모든 신발은 그리움의 형태로 남는다(「폼 나는 신발을 샀다」)
-붉은 것은 아래로 비상한다(「낙엽」)
-천천히 걷는 건 사막을 읽는 일(「낙타는 어디로 걸어갔을까」)
-구멍은 귀와 입과 눈을 꿰어서/테두리만 있는 인상을 만들어 버린다(「달」)
-삶이란 뜨거운 불판 무쇠의 틀 밑바닥에서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붕어빵」)
-눈앞이 캄캄하단 걸 인정할 때 길이 되고/돌아갈 힘 남겨두지 않아서 이기는 것(「붉은 게」)
-초원을 달리는 상상이 목마들을 견디게 한다(「친절한 일요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두려움이 없다(「억새밭」)
-집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여우네」)
-장미가 최고 향을 뿜어내는 시간은/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발칸산맥의 장미」)
-지나가는 풍경은 모두 다 아름답다(「기차는 달린다」)
이 명제들은 부정의 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때만이 미학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달이 돌아올 때 나무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이 깃든 나무가 되어 아픈 시를 또 다시 품을 것이다. 안명옥이 뜨겁게 껴안은 시업이다.
▶이민호_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비평서 『한국문학 첫 새벽에 민중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도둑맞은 슬픈 편지』. 연구서 『흉포와 와전의 상상력』, 『김종삼의 시적 상상력과 텍스트성』, 『낯설음의 시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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