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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집중조명/길상호/사북 외 2편/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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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길상호
신작시
사북 외 2편
식은 이름을 읊다 일어난 아침
입술에도 차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북사북, 꿈속 발자국들을 주워 가방에 담고
나는 사북 행 기차를 탔다
구름과 함께 딱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
역사 앞 공중전화박스에 서서
혼선 중인 당신 목소리를 내려놓고
멎지 않는 눈발만 멍하니 바라보던 곳,
지문 속에 말아 넣어둔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탄가루 뒤집어쓴 약방 간판이나
고드름 매달린 다방의 연통을 떠올리면
기억들은 그 맛이 텁텁했다
탄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덜컹덜컹 잔기침을 해대고
나는 사북사북,을 가루약같이 털어 넣으며
창유리에 맺힌 검은 얼굴을 닦았다
언제나 과거형의 철로 끝에 놓여있던 곳,
그러나 폐쇄된 몇 개의 역 이름을 거치는 동안
결코 사북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발자국들도 어느 틈에 가방을 열고 나와
눈구름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숨은 고양이 찾기
책을 펼쳐놓으면 고양이들이
줄무늬를 맞추며 문장마다 들어와 앉았다
눈이 내린 아침 담장 위에는
흰 고양이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빈 택배박스가 다시 무거워졌다
열어보니 삼색 고양이가 보자기처럼 묶여 있었다
검은 고양이를 편애한 밤은
제 눈동자 속에 아이들을 숨겨두었다
참을성 없는 울음만 튀어나오지 않으면
영영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꼭꼭 숨은 고양이를 찾다 찾다 못 찾으면
철컥, 아껴둔 참치 캔 하나를 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꺼번에 달려들어
니야옹니야옹 보채는 고양이들
캔 하나를 순식간에 비우고 나서는
나의 비린 눈까지 깨끗하게 핥아주었다
화한
갈비뼈 사이사이 꽂아둔 꽃들은
손금 없는 사람들이 모두 뽑아갔어요
괜찮아요, 더 이상은
초라한 진심을 들키는 일에 당황하지 않아요
당신들의 죽음에 한없는 축하를
우리들의 만남에 심심한 위로를
사실 장례와 결혼은 한 몸이에요
꽃잎처럼 색이 빠지고 나면
조문객과 하객이 어울려 술잔을 들겠죠
눈길 밖에서 쓸쓸하게 취한 사람들은
서로의 신발을 바꿔 신고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리본 끝에 새겨둔 이름이 하나둘
차가운 묘비 안으로 자리를 옮겨가듯이
꽃들은 언제나 마지막을 위한 제물이에요
골격만 남은 채 쓰러진 밤은
누구도 수거해 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자선 대표시
빈티지 외 1편
식은 이름을 읊다 일어난 아침
입술에도 차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북사북, 꿈속 발자국들을 주워 가방에 담고
나는 사북 행 기차를 탔다
구름과 함께 딱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
역사 앞 공중전화박스에 서서
혼선 중인 당신 목소리를 내려놓고
멎지 않는 눈발만 멍하니 바라보던 곳,
지문 속에 말아 넣어둔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탄가루 뒤집어쓴 약방 간판이나
고드름 매달린 다방의 연통을 떠올리면
기억들은 그 맛이 텁텁했다
탄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덜컹덜컹 잔기침을 해대고
나는 사북사북,을 가루약같이 털어 넣으며
창유리에 맺힌 검은 얼굴을 닦았다
언제나 과거형의 철로 끝에 놓여있던 곳,
그러나 폐쇄된 몇 개의 역 이름을 거치는 동안
결코 사북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발자국들도 어느 틈에 가방을 열고 나와
눈구름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민들레
찢어진 비닐하우스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낳아놓고
어미는 오지 않았다
밤바람이 영혼 하나를 데려갔는지
한 마리는 이미 식어 있고
나머지 셋은
서로의 숨결 끌어안은 채
데워지지도 않은 햇살을
돌아가며 핥았다
비닐에 깔려 있던 꽃들이
서둘러 노란 가스 불을 켰다
▶길상호_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모르는 척』, 『우리의 죄는 야옹』 등. 사진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 출간.
시론
-사북과 고양이 사이에서
짐을 챙겨들고 사북으로 갔다. 20여 년 전 들렀던 그곳은 온통 흑백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탄가루가 시커멓게 내려앉은 건물들, 그리고 군데군데 잿빛으로 쌓여 있는 눈 더미,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바람이 골목을 드나들었고, 그 와중에도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흑백TV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곳은 시간을 거슬러서 존재하는 도시 같았다. 원래 세워놨던 계획을 틀어서 사북으로 향한 것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오래 전의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예전의 사북은 이미 없다는 걸 깨닫고야 말았다. 1월인데도 날은 따뜻했고, 후줄근한 다방이나 약방을 대신해서 호텔과 모텔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 들어있는 사투리의 억양 정도였다. 플랫폼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서둘러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고, 나는 어디로 발길을 옮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음 기차 시간까지 간격이 있어서인지 매표소 직원도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고 나자 더 이상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디론가 발길을 옮겨야 할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여행을 하면서 마음은 홀가분하지를 못했다. 집에 두고 온 물어, 운문이, 산문이, 세 마리 고양이가 순간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셋이니까 서로 챙기면서 잘 놀고 있겠지, 하다가도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들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어딜 가나 고양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사북에서는 그 흔한 고양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행 내내 발견한 고양이는 딱 한 마리였다. 까만 색깔에 흰 턱시도 모양이 인상적인 작은 고양이가 도로를 건너 재빠르게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도로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여행의 경로인 이 길이 고양이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건너야 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위태로운 한 생을 건너고 있을 고양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나는 읍내를 빠져나왔다.
나는 과거를 만나려던 계획을 내려놓고 어천이라는 물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경험상으로 머리를 비워내는 데에는 걷기만큼 효과가 있는 처방이 없었다. 모처럼 걸어서 그런지, 좀 더 쌀쌀해진 바람에 근육이 긴장을 해서 그런지, 여기저기 몸에 안 좋은 신호가 왔지만 마음만큼은 상쾌했다. 도로 양쪽의 기암괴석과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소리, 사진기 속에 연신 그 풍경들을 담으며 사북에 도착했을 때의 그 허무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한나절을 그렇게 걷다가 보니 이제 서울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사북역에서 청량리 행 마지막 기차는 18시 46분, 산촌이라 어둠은 더 빨리 두꺼워졌다. 기차 안에는 돌아가는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성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 칸 건너 앞자리에 앉은 일행 중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눈에 띄는 사람들마다 시비를 걸고 있었다. 승무원이 아무리 진정을 시키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것이 다시 현실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소란은 기차가 청량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무자비한 현실을 마주하며 사북 행 여행은 막을 내렸다.
밤 12시가 다 되어 도착한 집, 현관문을 열자 물어와 산문이가 문 앞에 마중을 나와 앉아 있었다. 운문이는 안방 이불 속에 숨어들었다가 내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나와서 나의 다리에 얼굴을 비벼댔다. 이제 나의 생활과 시가 된 고양이들을 차례로 쓰다듬으니 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울음의 고백록
―길상호 작품론
이재훈 (시인)
문심조룡의 ‘비흥比興’ 편을 보면 비부比附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 말은 사물의 이치를 연결하여 사물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비유인데 비유는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이다. 기흥起興은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즉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 있는 사물에 감정을 맡긴다는 말이다. 마지막 찬贊의 문장에서는 “시인들은 비와 흥의 수법을 사용하기에 사물들과 접촉해서 그것들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네.”라고 정리하고 있다.(유협, 김관웅 김정은 역, 『문심조룡』, 올재, 200~203쪽.) 비比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수사적 방법론이며 흥興은 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정서적 특질이다. 우리는 흔히 비흥比興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이를 구조화하는지에 따라 시의 완성도를 말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길상호의 시는 서정시의 원리를 누구보다 가장 모범적으로 선보이면서 자신만의 정서를 그 안에 함유하고 있는 시인이다. 길상호는 시적 대상과 소통하면서 특유의 쓸쓸함과 고요함이 묻어나온다. 길상호의 시가 망라하고 있는 여러 지점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관찰과 기억이라는 산책자의 명상법을 잘 호흡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시집 『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에서 고양이의 말로 대표되는 새로운 언어 소통에 대한 탐구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나는 야옹야옹, 새로운 언어를 연습한다.”고 말한다. 이어 “말이 되지 않는 고양이어를 듣고서도 눈치가 빠른 고양이들은 나를 정확하게 이해해준다.”고 한다. 시적 주체가 말하는 새로운 언어에 대한 연습과 그것을 이해하는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시 쓰는 방법적 행위를 은유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제1부와 제2부, 제3부의 첫 번째 시가 모두 ‘책’을 소재로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죽은 글자들을 모아놓은 책
나는 오늘 책을 묻었다
굽은 자음과 모음을 펴려고
흙이 된 당신들이 모여들었다
땅이 느릿느릿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빗방울과 눈송이가 번갈아
지워진 나이테를 복원해냈다
당신들이 다녀간 행간,
아픈 단어마다 싹을 틔웠다
책을 묻었다
죽은 글자들을 위해서는
더 깜깜한 죽음이 필요했다
―「썩은 책」 전문
1부의 「썩은 책」은 시인의 지향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이다. 시인은 책을 “죽은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상정한다. 죽은 글자들이기에 책을 묻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죽은 글자들을 살리려고 하는 존재는 “흙이 된 당신”이며 “땅”이다. “굽은 자음과 모음을 펴려”는 주체자가 “땅” 혹은 “빗방울과 눈송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땅”과 “빗방울과 눈송이”가 결국 아픈 단어에게 싹을 틔워주는 존재이다. 이는 시인이 관계 맺으며 이 세계의 비밀을 전하고 싶은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자연의 특수성은 늘 순환한다는 점이다. 자연은 하나의 생명을 탄생하기도 하지만 한 생명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시인은 자연의 순환성을 “죽은 글자들을 위해서는/더 깜깜한 죽음이 필요했다”는 의지로 표현하고 있다.
2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책은 ‘물 먹은 책’이다. 종이가 빗물에 불어 있는 책을 떼어내며 읽는 화자의 행위와 불은 책에 존재하는 말들이 서로 교감을 주고받고 있다. 이를 통해 책과 소통하는 화자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불은 책에서 나온 말들은 “씹어도 단물이 배어나오지 않”는 문장들이지만 그것을 받아주는 존재는 뜻하지 않게 고양이이다. 2부에 등장하는 ‘물 먹은 책’은 3부에 와서 ‘말없는 책’으로 변화한다. “하얗고 매끈한 혀”를 가진 “책은 수백 장의 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후 혀는 썩기 시작하고 이 혀와 말을 섞은 혀에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독니를 지닌 문장의 허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썩은 책에서 물 먹은 책으로 다시 말없는 책으로 이어지는 말과 말을 보관하는 존재들에 관한 메타적 사유는 세 편의 시를 이어서 읽어보았을 때 새로운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각 시편들은 각 부의 색깔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길상호의 시에서 감지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이 세계를 의인화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을 직접 그리지 않으며, 인간 세속의 문제를 관념이나 진술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의 모든 이치를 자연에서 어우러지는 생명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얘기한다. 서정시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인식은 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가령 “연못은 독서에 빠져 있”으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라든지(「연못의 독서」), “파도 한 장을 뽑아/서로의 때 낀 입술을 닦아주었다” 혹은 “담장을 걷던 고양이가 같이 뽑혀와/붉은 혀로 쓰윽,/우리의 눈길을 핥고 가기도 했다”라든지(「물티슈」) “안개는 뿌연 손가락을 풀어/얼음 위에 그림을 그려넣는 중이었다”(「녹아버리는 그림」), “젖은 고양이처럼 바람이/백태 낀 혀로 골목을 핥고 있”고 “웅크려 누워 있으면/지나간 비는 허리가 아팠다”(「비는 허리가 아프다」) 등등의 표현들은 시를 읽는 재미와 함께 시를 풍요롭고 다양하게 읽히게 하는 지점을 마련해주고 있다.
얼음은 또 처음이다
생후 구 개월 고양이 산문이는
혓바닥 위에 얼음 조각을 올려놓고
얼음, 서툰 글씨로 적어본다
자꾸만 미끄러진다
쓰면 쓸수록 녹아 사라진다
난감한 눈,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지려면
얼어붙은 구름을 꼬리에 감고
한 계절을 또 열심히 뛰어야겠지
얼음과 물 사이에
어제는 없던 울음이 생겨난다
누추한 처마의 고드름처럼
발톱이 조금 더 자라난다
굴리던 얼음이 다 녹아버리면
다음 과목은 흥건한 바닥,
이제는 좀 쉬었다 이어가자고
장판의 물기를 닦아낸다
―「얼음이라는 과목」 전문
위의 시는 화자가 직접 키우는 고양이 산문이와의 경험을 그려낸 시이다. 이 지점에서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길상호의 시에서 책, 즉 읽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자연의 이치와 순리적 자세의 관점으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의지를 매개하는 존재가 바로 고양이이다. 시에서 고양이 산문이는 “혓바닥 위에 얼음 조각을 올려놓고/얼음, 서툰 글씨로 적어본다”고 한다. 고양이가 새로운 존재를 만나 그것을 체화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어려움이 있는지를 시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고양이 산문이가 얼음을 인식하는 것은 감각적 체험을 통해 익히는 것이다. 감각적 체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적 인식이다. 하지만 얼음 조각을 혓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금세 녹기 마련이다. 얼음이라는 기호를 인식하고 쓰기 전에 녹아버린다. 시인은 그러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지려면/얼어붙은 구름을 꼬리에 감고/한 계절을 또 열심히 뛰어야겠지”라는 방법을 내놓는다. 그 사이에서 시인이 바라본 것은 바로 “어제는 없던 울음”이다. 고양이 산문이가 얼음이라는 낯선 존재를 만나 새로운 울음을 만난 것처럼 우리의 인간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고양이를 통해 세계를 엿보는 시적 정황을 우리는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명태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가리켜 “허기를 버린 눈과 허기진 눈이/서로를 응시하고 있는/참 비린 한낮이었네”(「응시」)라고 말할 때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고장난 기타 속에 들어간 길 잃은 고양이가 새벽 골목을 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기타 고양이(「기타 고양이」), 그 외 「고양이와 커피」, 「겨울의 노래」 등도 고양이를 테마로 삼고 있다. 특히 「그늘에 묻다」는 고양이가 “처음 저질러놓은 죽음에 코를 대고/킁킁킁 계절의 비린내를 맡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그 죽음은 귀뚜라미의 죽음이며 “울기 좋은 그늘을 찾아 들어선 곳”이 바로 고양이가 있는 방일 것이다. 귀뚜라미는 그늘에 자신의 시체를 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귀뚜라미의 죽음을 통해 여러 본질적 물음을 쓰고 있는 작품이다.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 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
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우리의 죄는 야옹」 전문
고양이의 고백록으로 읽혀지는 위의 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세 마리 고양이를 키우는 시인은 고양이와 함께 울음을 연습한다. 시인은 창유리에 빗방울이 고인 장면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고양이는 고백의 존재가 되고, 고백을 하는 존재는 고양이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은 우리가 늘 저지르는 죄의 고백이다. 이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물의 혓바닥이 핥고 간다. 물이 상처를 위무해주는 짧은 시간이 끝났을 때 우리는 일상으로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어떤 면에서는 고백의 장르이다. 우리는 할퀴는 존재들이며 상처주고 상처받는 존재들이다. 고양이를 핑계 삼아 대신 야옹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길상호의 시집을 읽으며 나뭇잎 하나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엿볼 수 있었던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시의 비밀이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며 뜨끈해지는 가슴을 매만져본다. 마무리로 「나뭇잎 행성」이라는 시를 읽으며 나뭇잎과 별과 올챙이가 어우러지는 비밀의 한 순간을 둘러보자.
둥그런 연못 위로
마른 단풍잎 하나 날아왔다
가지 끝까지 펼쳐놓은 나이테의 중력을 벗어나
처음으로 다른 우주에 와 닿았다
소금쟁이가 물속으로 빠져드는 발을 건져
나뭇잎 행성에 걸쳐놓고 쉬는 동안
연못은 팽창을 거듭했고
수십 겁의 물결이 다시 태어났다
어두운 바닥은 오랫동안
신들이 별을 빚어내던 곳,
나뭇잎은 잎맥을 길게 풀어놓고
신의 목소리를 낚아올렸다
드는 물과 나는 물 사이에서
연못은 돌고 또 돌고
나뭇잎은 새로운 공전 궤도를 익히느라
무겁게 젖어드는 것도 몰랐다
물속에 떨어진 별빛을 빨아먹고
올챙이 한 마리가 꼬물꼬물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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