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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집중조명/윤종환/빨래집게 외 4편/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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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윤종환
빨래집게 외 4편
바람에 등 떠밀려 떠나려는 옷가지
악착같이 잡고 있는
빨래집게의 숙명처럼
끝자락 붙잡는 가냘픈 울음은
맞물린 주둥이 사이로 새어나올 수 없다
그 입을 벌리면
그 말을 뱉으면
언제든 당신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이름 모를 나락에서 묻은 먼지
혹여나 얼룩으로 번질까
마르지도 못한 가슴에 다시금 때가 묻을까
집게는 입을 다물 뿐
소리도 없는 악력으로 그를 잡는다
빨래집게의 가슴을 관통한 줄은
빛바래지고 때가 묻고 강풍에 깎여나가고
세월의 풍파를 맞은 조언자처럼
바람 부는 대로
마치 그를 놓아주라는 듯 집게를 흔드는데
악착같이 잡을 수밖에 없는
비운의 숙명은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틸 뿐이다
이쑤시개
당신들의 씻지도 않은 주둥이에
내 몸을 헌신하는 것이
탄생의 목적이라 배웠습니다
단단한 이빨마저 벌려 놓는
씹는 것에 대한 욕망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잡식성 잔인함
그것을 후벼 파는 것이 오늘의 임무
나는 당신의 엄지와 검지에 짓눌린 채
벌어진 틈새로 내 머리를 처박고
부식된 찌꺼기들이 얽힌 공간을
뾰족한 혓바닥으로 핥습니다
그러다 혀가 닳아버리면
온몸을 써서라도 모두 긁어내야 합니다
당신의 온전한 쾌감을 위하여,
그대는 나를 잔인하게도 굴려 먹지만
더러운 이빨 사이에 껴
죽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저항한
수많은 음식물들의 잔해
그들을 보니 침묵할 수밖에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에 죽어간
수만 생물들의 시체
그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이쑤시개
삶의 존재를 원망합니다
내 몸뚱이의 날카로운 부분은
불현듯 포악한 당신의 잇몸을 찔러
피비린내 맡게 하라는 천명일지 모릅니다
벌어진 이빨 사이 선홍빛 허약함
이기심 사이 숨어 있는 두려운 잇몸
짜증이 나면 찔러버리렵니다
어차피 나도 버려질 몸
당신의 주둥이에서 숨진 영혼을 긁다
썩은 내 풍기며
시체처럼 던져지는 처참한 하루살이
이것이 탄생의 목적이라 배웠습니다
당신의 온전한 쾌감을 위하여,
그래서 뭐라도 찌르다 가야겠습니다
비누
손을 씻는 동안에
그의 몸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손바닥에 때처럼 박힌 부끄러움이
그가 손 틈새를 미끄러져 나갈 때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지우고 싶은 손금의 기억
격렬하게 두 손을 비벼댈수록
그는 거품을 물며 자지러졌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자
그는 향만 남기고 모습을 잃었다
짧은 순간에 욕심을 녹이고
속속들이 박혀있는 허점을 녹이고
흔적도 없이 유유히 떠났다
그는 나를 위해
제 몸을 지저분히 녹이며 떠났는데
두 손은 매섭게도 그를 녹였다
박박 문지르며 비누의 숨통을 조이다
말끔히 하수도 저편으로 보냈다
그 후에 유서처럼 남긴 은은한 향기
향불처럼 고스란히 피어오르는데
이 두 손은 또 다시 더러울 일만,
다시 씻을 날만을 기약할 뿐이다
도라지꽃의 속사정
보라색 별의 뿌리를 씹었을 때
입안을 메우는 도라지의 쓴맛
흙의 깊은 숨결까지 끌어 모은 듯
풍성하게 퍼지는 별의 혈관 냄새
우주는 이 특유의 쓴맛을
도라지의 애환이라 일컫는다
태초에 도라지꽃 씨를 뿌릴 때
신은 영원한 사랑이라 꽃말을 붙여줬고
태생이 쓴 씨앗은 이름을 얻었다
신은 일방적인 약속을 했다
꽃말처럼 살아가고 싶거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버텨내라
그 대가로 빛을 약속했다
땅 위로 별처럼 얼굴을 내밀어
한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리다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버리면
모두 주겠노라 약속한 우주의 보랏빛
아프로디테도 샘할 미美의 영롱함
우주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영원히 사랑에 빠지는 빛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사람들은 도라지꽃의 뿌리를 탐했다
계속해서 파헤치는 흙
숨은 살갗을 건드리는 무심한 손길
그 끝에 필연코 드러난 가녀린 존재
순간 무너진 꿈에 대한 갈망이
모세혈관 사이마다 독극물처럼 퍼지다
이내 뿌리에 스며들었다
도라지꽃은 꺾이지 않은 채
허공에 별처럼 피어있을 때 비로소
제 꽃말처럼 살아갈 수 있다
빛을 얻고 싶어 우주만 바라보다
그 뿌리가 드러날 때
뿌리 깊숙이 스며드는 애환
그 속사정은 쓰디쓰게, 무심히도 씹힌다
해감
바다에서 한 잔 마신 모시조개들이
잔뜩 취한 상태로 누워 있다
그곳이 갯벌인지도 모르고
방향감각 잃은 취객처럼 비틀대다
검찰보다 더 투철한 검거정신의 어머니
거침없이 벌을 파헤친 손에 잡혔다
겁먹은 모시조개들
잘못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체포자는 미란다 원칙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에
눈물로 짠 내를 풍기는 녀석들
꿀꺽 삼킨 게 뭐 이리 많은지
어망에 묶여오는데 어찌나 조용할까
진실을 토하는 조사장
어머니는 큰 대야에 물을 받으시고
잡귀를 쫓아내듯 왕소금을 뿌린다
그곳에 사정없이 내팽겨진 모시조개들
녀석은 하릴없이 꿈틀대다
이내 주둥이를 열고 속내를 드러낸다
진실처럼 흙을 뱉어낼 때마다
뽀르륵 올라오는 무명의 기포들
점점 탁해지는 대야의 소금물
어떤 놈이 사실을 불어버리자
심술 난 딴 놈이 주둥이를 열고
냉큼 침을 찍 뱉더니 입을 닫는다
화가 난 어머니의 손이
대야를 흔들어 조개를 솎아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 벌리는 조개 탁해진 물 짙어진 짠내
밝혀지는 갯벌의 진실
걸러지는 작은 알갱이에 어머니는 웃는다
▶윤종환_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별빛학개론』.대한민국 인재상 대통령상 수상. 대한민국 청소년 인재상 수상. 인천독서교육대상 수상.
그윽한 연민의 힘
―윤종환 작품론
이현호 (시인)
시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드러나는 현상에서 남다른 의미를 길어 올린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미미한 사물과 무심한 일상 속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그 현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어떤 진실이다. 시인은 입이 없는 사물을 대신해 그들의 말을 전해주고,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 무감해진 일상에 감동을 돌려준다. 사물의 말과 환기된 감정은 거창하고 별난 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잊고 지내던 것들이다. 그것들이 시인의 상상력을 입고 돌아온 것을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시인은 유별난 존재가 아니다. 시인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작동하는 공간은 보통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그곳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여느 사람들처럼 시인의 두 발도 특별할 것 없는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상상력이 틈입하기 힘든 비시적非詩的 시공간이다.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오래 들여다볼 뿐 시인 역시 그 속에서 유다를 것 없는 생활인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 없는 총성이 오고 가는 가운데 희로애락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우리네 일상이 시의 산실이다.
시를 쓴다는 건 세계의 이면을 지향하는 상상력과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누추함을 하나로 녹이는 일이다. 지나치게 상상력에 의존한 시는 뜬구름 잡기가 되기 쉽고, 상상력이 배제된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시인은 현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을 타는 광대이자 땅에 굳건히 버티고 선 채 상상력을 수신하는 안테나와 같다. 아무리 엄혹한 현실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하고, 아무리 작고 연약한 것들의 목소리일지도 귀를 기울이는 시인은 시로써 거기에 숨어 있던 가치를 되살려낸다. 시를 통해 현실과 상상이라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두 세계의 조화를 꿈꾸는 것이다.
윤종환 시인의 시가 그리는 세계의 모습도 그렇다. 그의 시는 현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다. 「빨래집게」, 「이쑤시개」, 「비누」, 「도라지꽃의 속사정」, 「해감」이라는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는 보잘것없는 사물과 평범한 일상에 관심을 쏟는다. 쉽게 소모되고 버려지는 사물들의 운명과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헤아리는 시인의 눈길은 따듯하고 정의롭다. 현실을 응시하는 관찰력과 그것을 포용하는 상상력의 이음새도 예사롭지 않다. 먼저 「빨래집게」를 보자.
바람에 등 떠밀려 떠나려는 옷가지
악착같이 잡고 있는
빨래집게의 숙명처럼
끝자락 붙잡는 가냘픈 울음은
맞물린 주둥이 사이로 새어나올 수 없다
그 입을 벌리면
그 말을 뱉으면
언제든 당신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이름 모를 나락에서 묻은 먼지
혹여나 얼룩으로 번질까
마르지도 못한 가슴에 다시금 때가 묻을까
집게는 입을 다물 뿐
소리도 없는 악력으로 그를 잡는다
빨래집게의 가슴을 관통한 줄은
빛바래지고 때가 묻고 강풍에 깎여나가고
세월의 풍파를 맞은 조언자처럼
바람 부는 대로
마치 그를 놓아주라는 듯 집게를 흔드는데
악착같이 잡을 수밖에 없는
비운의 숙명은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틸 뿐이다
―「빨래집게」 전문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했던 이별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각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빨래집게」는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가지와 그것을 집고 있는 빨래집게의 모습을 절절한 이별의 장면으로 그려낸다. 세상에 안타깝지 않은 헤어짐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이 시의 이별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것을 대하는 빨래집게의 태도 때문이다. “이름 모를 나락에서 묻은 먼지/혹여나 얼룩으로 번질까/마르지도 못한 가슴에 다시금 때가 묻을까”에서처럼 이별의 목전에서도 행여 자신 때문에 상대가 받을지도 모를 상처를 걱정하는 빨래집게의 순애. “가냘픈 울음”마저 “주둥이 사이로 새어나”오지 않게 꾹 참은 채 “바람에 등 떠밀려 떠나려는 옷가지”를 “소리도 없는 악력으로” 붙잡고 있는 빨래집게의 모습은 범상한 연애의 파국을 넘어서는 데가 있다. 오랫동안 “세월의 풍파”를 견뎌온 빨랫줄의 조언에도 아랑곳없이 “악착같이 잡을 수밖에 없는/비운의 숙명”을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틸 뿐”인 빨래집게의 몸부림에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숭고한 구석이 있다. 이처럼 윤종환 시인의 시는 ‘빨래집게’와 같은 미시적인 것에서 ‘숙명’ 같은 거시적인 의미를 끌어내어 우리가 일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시야를 열어준다.
당신들의 씻지도 않은 주둥이에
내 몸을 헌신하는 것이
탄생의 목적이라 배웠습니다
단단한 이빨마저 벌려 놓는
씹는 것에 대한 욕망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잡식성 잔인함
그것을 후벼 파는 것이 오늘의 임무
(…중략…)
더러운 이빨 사이에 껴
죽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저항한
수많은 음식물들의 잔해
그들을 보니 침묵할 수밖에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에 죽어간
수만 생물들의 시체
그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이쑤시개
삶의 존재를 원망합니다
(…중략…)
벌어진 이빨 사이 선홍빛 허약함
이기심 사이 숨어 있는 두려운 잇몸
짜증이 나면 찔러버리렵니다
어차피 나도 버려질 몸
당신의 주둥이에서 숨진 영혼을 긁다
썩은 내 풍기며
시체처럼 던져지는 처참한 하루살이
―「이쑤시개」 부분
사람들의 이 사이에 낀 밥찌꺼기를 제거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이쑤시개에서 육식성의 폭력과 일회성의 소비 욕망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시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의 욕망과 하찮은 이쑤시개가 대립하는 수평적 구조가 “천명”과 “수만 생물들의 시체”를 통해 입체성을 띄는 부분이다. 앞선 시의 ‘빨래집게’가 그랬듯 이 시의 이쑤시개는 “천명”이라는 거대함과 마주친다. 이쑤시개와 천명의 멀고먼 거리를 좁히는 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잡식성 잔인함”을 통찰하는 시인의 상상력이다. 데페이즈망과 같은 이 상상력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시적 대상에 몰입한 시인이 끝내 대상의 “탄생의 목적”과 “삶의 존재”까지를 이해한 데서 가능하다. 이것은 또한 몰입이 이입이 되는 갸륵한 연민의 마음이 있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잘것없는 이쑤시개가 “더러운 이빨 사이에 껴/죽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저항한/수많은 음식물들의 잔해/(…중략…)/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에 죽어간/수만 생물들의 시체”를 보며 “침묵”하는 장면은 시인이 품고 있는 연민의 깊이를 잘 드러낸다. 시인은 인간의 욕망과 “처참한 하루살이”에 불과한 이쑤시개의 이항 대립이 가질 수 있는 밋밋한 구도를 너른 마음의 진폭으로 극복한다. 윤종환 시의 이런 특색은 「비누」에서도 이어진다.
손을 씻는 동안에
그의 몸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손바닥에 때처럼 박힌 부끄러움이
그가 손 틈새를 미끄러져 나갈 때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지우고 싶은 손금의 기억
격렬하게 두 손을 비벼댈 수록
그는 거품을 물며 자지러졌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자
그는 향만 남기고 모습을 잃었다
짧은 순간에 욕심을 녹이고
속속들이 박혀있는 허점을 녹이고
흔적도 없이 유유히 떠났다
그는 나를 위해
제 몸을 지저분히 녹이며 떠났는데
두 손은 매섭게도 그를 녹였다
박박 문지르며 비누의 숨통을 조이다
말끔히 하수도 저편으로 보냈다
그 후에 유서처럼 남긴 은은한 향기
향불처럼 고스란히 피어오르는데
이 두 손은 또 다시 더러울 일만,
다시 씻을 날만을 기약할 뿐이다
―「비누」 전문
자신의 몸을 녹여가며 다른 존재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비누의 희생정신도 별반 새로울 게 없는 얘기다. 윤종환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런 익숙함은 일상적인 사물을 시의 제재로 삼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한계다. 문제는 이 식상함을 어떻게 돌파하느냐는 것이다. 시인은 끈질긴 관찰력과 시적 대상에 온전히 몰입하는 특유의 측은지심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시인은 비누가 두 손에 의해 녹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유서처럼 남긴 은은한 향기”라는 구절을 얻어낸다. 이것이 윤종환 시인이 가진 관찰력의 힘이라면, 그 유서와 다름없는 향기를 “향불처럼 고스란히 피어오르는데”라는 표현으로 애도하는 것은 측은지심의 힘이다. 관찰력과 거기서 비롯하는 품이 넓은 상상력 그리고 미천한 존재를 가련하게 여기는 연민의 마음은 윤종환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특징이다. 이렇게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의 입이 되기를 자처하는 그의 시는 으레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을 둘러보던 시인의 시선은 아래 시에서는 좀 더 멀리 자연으로 뻗어나간다.
보라색 별의 뿌리를 씹었을 때
입안을 메우는 도라지의 쓴맛
흙의 깊은 숨결까지 끌어 모은 듯
풍성하게 퍼지는 별의 혈관 냄새
우주는 이 특유의 쓴맛을
도라지의 애환이라 일컫는다
태초에 도라지꽃 씨를 뿌릴 때
신은 영원한 사랑이라 꽃말을 붙여줬고
태생이 쓴 씨앗은 이름을 얻었다
신은 일방적인 약속을 했다
꽃말처럼 살아가고 싶거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버텨내라
그 대가로 빛을 약속했다
땅 위로 별처럼 얼굴을 내밀어
한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리다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버리면
모두 주겠노라 약속한 우주의 보랏빛
아프로디테도 샘할 미(美)의 영롱함
우주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영원히 사랑에 빠지는 빛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사람들은 도라지꽃의 뿌리를 탐했다
계속패서 파헤치는 흙
숨은 살갗을 건드리는 무심한 손길
그 끝에 필연코 드러난 가녀린 존재
순간 무너진 꿈에 대한 갈망이
모세혈관 사이마다 독극물처럼 퍼지다
이내 뿌리에 스며들었다
―「도라지꽃의 속사정」 부분
이 시의 얼개도 앞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빨래집게」에서의 ‘바람/빨래집게’, 「이쑤시개」에서의 ‘욕망/이쑤시개’, 「비누」에서의 ‘두 손/비누’의 대립각이 여기서도 펼쳐진다. 연민의 대상이 되는 “가녀린 존재”로서 도라지가 등장하고,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존재로서 “무심한 손길”이 따라붙는다. 재밌는 것은 둘의 관계를 풀어내는 수단으로서의 이야기다. 시인은 정말 ‘도라지꽃의 속사정’을 듣기라도 한 듯이 조곤조곤 도라지의 쓴 맛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놓는다. “신”과 “꽃말”과 “아프로디테”와 “판도라의 상자” 따위를 시어로 부리면서 한 편의 시를 하나의 설화로서 완성한다. “우주”, “신”, “사랑” 같은 시어는 「빨래집게」의 “숙명”, 「이쑤시개」의 “탄생의 목적”, 「비누」의 “향불”처럼 이 시를 대승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요소인데 이것들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만나 시의 외연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관찰력과 측은지심이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 상상력을 만나면서 그의 시는 ‘필연적인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해감」은 이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펼쳐질 그의 시 세계의 전모를 가늠하게 한다.
바다에서 한 잔 마신 모시조개들이
잔뜩 취한 상태로 누워 있다
그곳이 갯벌인지도 모르고
방향감각 잃은 취객처럼 비틀대다
검찰보다 더 투철한 검거정신의 어머니
거침없이 벌을 파헤친 손에 잡혔다
겁먹은 모시조개들
잘못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체포자는 미란다 원칙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에
눈물로 짠 내를 풍기는 녀석들
꿀꺽 삼킨 게 뭐 이리 많은지
어망에 묶여오는데 어찌나 조용할까
진실을 토하는 조사장
어머니는 큰 대야에 물을 받으시고
잡귀를 쫓아내듯 왕소금을 뿌린다
그곳에 사정없이 내팽겨진 모시조개들
녀석은 하릴없이 꿈틀대다
이내 주둥이를 열고 속내를 드러낸다
진실처럼 흙을 뱉어낼 때마다
뽀르륵 올라오는 무명의 기포들
점점 탁해지는 대야의 소금물
어떤 놈이 사실을 불어버리자
심술 난 딴 놈이 주둥이를 열고
냉큼 침을 찍 뱉더니 입을 닫는다
화가 난 어머니의 손이
대야를 흔들어 조개를 솎아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 벌리는 조개 탁해진 물 짙어진 짠 내
밝혀지는 갯벌의 진실
걸러지는 작은 알갱이에 어머니는 웃는다
―「해감」 전문
그리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전문을 인용한 건 이 시가 어느 한군데를 솎아낼 수 없이 잘 짜인 까닭이다. 유기적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일단 읽는 재미를 준다. “모시조개”라는 미물, “해감”이라는 일상적 사건, ‘모시조개/어머니’의 대립 구도, “진실”이라는 거시적인 시어 등 「해감」은 윤종환 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면서도 이로써 또 다른 경지를 선보인다. 관찰력, 측은지심, 이야기의 삼위일체에 보태 시의 전언이 품고 있는 시의성과 사회성은 시의 완성도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검찰보다 더 투철한 검거정신의 어머니”가 해감으로써 “꿀꺽 삼킨 게 뭐 이리 많은지” 모를 “모시조개”의 “잘못이 없다는 듯” 다물고 있던 입을 벌리는 모습은 하 수상한 요즘의 현실을 환기한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대로 「해감」은 현실과 시적 상상력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윤종환 시 세계의 매력을 오롯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론 「해감」을 포함한 이상 5편의 신작시에는 투박한 면이 없지 않은데, 앞으로 소시민적 일상성이 어디로 촉수를 내뻗느냐가 윤종환 시의 관건이라면 「해감」은 그에 대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현실이 참담할수록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 현실을 향한 그윽한 연민을 잃지 않는 시선은 더없이 귀하다. 우리의 마음을 해감해줄 윤종환 시인의 시를 기대해본다.
▶이현호_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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