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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소시집/강문출/몸의 평지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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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강문출
몸의 평지 외 4편
더는 자신을 지지할 수 없을 때
수련은
물의 평지에다 커다란 제 손을 내려놓는다
내가 왼종일 헤매다
늦은 밤 방바닥에 등을 붙이는 일처럼
높낮이가 없어 큰 갈등 없는
공중도 지하도 아닌 정거장 같은
누구나의 발돋움에 디딤돌이 되어주는
수면과 지면
이 두 바닥을 수련은
손과 발로 꽉 붙들고 있다
뿌리는 북쪽으로 발을 뻗는다
연못가에 큰 삼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저건 태풍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뿌리 탓이다
줄기며 잎들이 자꾸 남으로 뻗어 오르는 동안
뿌리는
더욱 깊게 캄캄한 북쪽으로 발을 뻗어야 했던 것이다
고꾸라진 저, 멸문지화
옥쇄다
석고대죄다
아니다, 뒤엎어
제 분신인 줄기와 잎사귀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저러고 싶을 때가 있다
전쟁타령처럼, 이건 단지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이 순간에도
모든 뿌리들은 캄캄한 북쪽으로 발을 뻗는다
바위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무한한 시간이 너무 좋아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보고 가고 싶은 곳 다 가보고 마침내 원도 한도 없이 다 해보아 이제는 죽어도 좋다 싶을 때
시간이 무한정 있으면 어쩌겠나 뭘 해도 그것이 그것 같고 뭘 먹어도 그 맛이 그 맛 같고 어딜 가도 그곳이 그곳 같다면 어쩌겠나 하는 것을 접고 먹는 것을 접고 가보는 것을 접는 수밖에 죽지도 않는데 숨은 쉬어서 뭘 하겠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요긴한 기능들이 다 퇴화했으므로 마침내 억겁
잠자는 한 개의 바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쾅, 천지가 개벽하면 억만년을 날아 다른 별나라에 가보는 것이다 그곳에서 태초에 몸이 있으라 하니 몸이 생긴 것처럼 잠에서 깨어 새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한 개의 바위가 되는 것이다
둥근 의문
나는 시간을 짓는 시계의 충복이다
나는 날마다 시계불알처럼 일하고
시계가 때를 알려주면 밥을 먹는다
파업을 하면 낙오자가 되고
때를 어기면 속이 쓰리다
이런 수모도 밥 때문이 아니라
시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나만의 고육지책이다 하면 견딜 만하다
시계는
어디에서 시간을 가져와 나를 부리는 것일까
밥 먹다 말고 개가 꼬리를 흔든다
살랑살랑 흔든다
마치 시계가 사랑에서 시간을 가져온다고
귀띔해주는 것처럼
시간을 이기는 침묵이나 고요로
이 모든 질문을 단번에 잠재우려 하는데
한밤 시계 소리, 심장소리처럼 벅차다
돌섬
찬 바다에 발 담그고 묵묵히 돌아앉은 저
등
뼛속까지 시리겠다
한겨울 인력시장에 혼자 남아 꺼져가는 모닥불 쬐고 앉은 저
사람
우긋한 등짝처럼
시작메모
존 카치오포 박사는 자신의 공저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에서 인간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사회적 유대’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그널 차원에서 ‘외로움’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 외로움이라는 유전자는 필요에 따라 습득된 것이 아니라 아담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은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모든 피조물들이 외로움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역시 신은 신이다. 비록 자신은 외로울지라도 자신의 피조물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셨다. 그것이 곧 사랑이다. 생각이 없는 꽃이나 나무들조차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 군락이나 숲을 이루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이 사랑은 외로움만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도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해놓았을까. 이게 다 외로움 때문이다. 멀리서 아장아장 기어와 엄마의 품속에 안기는 아가의 환한 얼굴을 보는 것처럼, 제 피조물들이 모두 자신의 품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을 떠올릴 때 먼저 전지전능을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류요 불행의 단초다. 신의 존재는 전지전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에 있고,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랑에 있는 것이다. 즉 외로움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풀어낼 줄 알아야 신의 한 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겐 영원으로 가는 열쇠인 사랑이 있는데, 그 무엇이 두려우랴.
▶강문출_2011년 《시사사》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타래가 놀고 있다』. 현재 일성산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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