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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서범석/짐작되는 평촌역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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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서범석
짐작되는 평촌역
초등학교 6학년일 것 같은 여자 안경이 지나간다
고1 여학생일 것 같은 핸드폰이 아기 같은 가방을 업고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질이다
꽃뱀일 것 같은 카키색 재킷이 만남의자 주위에서 맴돌며 핸드폰의 귀에다 입을 맞추며 독백하다가 같은 색가방을 메고 이마트 쪽으로 사라진다
신입사원일 것 같은 푸른 점퍼가 등뒤로 카메라를 얽어 메고 운동화를 끌면서 화장실로 쏟아진다
일터에서 이미 잘렸을 것 같은 스마트폰이 비닐봉지 속에 시든 꽃다발을 모시고 주머니 속에 쑤셔박힌 것처럼 절뚝거린다
이어폰 줄에 체포된 셀룰러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독경하듯이 청바지가 ‘타는 곳’ 녹색 화살표 사이로 사라진다
비 오지 않는 날에 우산을 들고 작은 가방을 엇멘, 이혼 직전일 것 같은 털신이 아주 긴 손전화기와 말싸움을 끝내고 기둥에 감겨 안정된 팔각의자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평촌역에는 게이트단말기가 한 곳에만 있어서 모든 승객은 이놈의 승낙 없이는 출입할 수가 없다
또 하루
비 내리는 늦가을 스산한 아침
스마트키가 전원이 약하다고 발신한다
쉽게 배터리를 갈 수 없다, 내 실력으론,
포기하고
임대아파트 월세를 보내려고 컴퓨터를 켠다
OTP가 작동하지 않는다, 전기가 나갔다,
포기하고
티브이라도 보면서 망가진 안정이라도 다듬으려는데
T.V겸용인 모니터의 리모컨 배터리가 또 방전됐구나,
모든 걸 포기하고
푸른 손들의 서비스 센터로 가서
운명 직전의 스마트키를 구조 요청한다
3000원을 배터리 값으로 지불한다
이제 마음 놓고 은행으로 가서 OTP를 교체한다
5000원을 내가 부담하는 게 맞다는 텔러 아가씨의 주장에,
포기하고
세븐일레븐에 들러 리모콘 배터리를 사서 주머니에 담았지
돌아오는 길
늦게 뜬 태양이 가을 하늘 아래 구름담배에 불을 붙이고
왕방산은 낯선 일진을 굵직한 연기로 뿜어 올리고 있다
서범석_ 《시와의식》 신인상(평론부문 1987), 1995년 《시와시학》 신인으로 등단. 시집 『풍경화 다섯』, 『휩풀』, 『종이 없는 벽지』, 『하느님의 카메라』 등. 학술저서 『한국 농민시 연구』, 『한국 농민시』, 『한국 농민시인론』, 『우정 양우정의 시문학』 등. 비평집 『문학과 사회 비평』, 『한국현대문학의 지형도』, 『비평의 빈자리와 존재 현실』 등. 계간 《시와 소금》 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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