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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하두자/새벽을 프린팅 하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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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하두자
새벽을 프린팅 하다
폭설의 감옥을 지나온 우리는 봄이 와도 좋아
붉어지는 꽃비늘을 뜯어 서로 조금씩 사랑하며
퐁, 퐁, 가볍게도 터지며
서로 할퀴는 가늘고도 긴 손톱도 숨기고
봄비를 훔쳐 빗소리에 젖은 지붕까지도 밀어 넣으면서
순정의 목련, 순정의 낭만, 순정의 빗방울들이
터널의 겨울에서 터널의 봄으로
뭉텅 뭉텅 거품을 무는, 아무에게나 열어주는 연두로
그런 순서대로 배열하고 또 누군가 훔쳐 가면 어때
겨울과 봄을 헝클어대는 따스한 햇살이
둥근 혀를 말아서 진실을 말한다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귀 기울여 봐
두서없이 피는 꽃들이
밥알처럼 터지는 사이, 사이를 꽃들은 진실만을 말한다고 하네
상투적인
봄, 봄비
너무 외로워서 웃기는, 너무 쓸쓸해서 알쏭달쏭한
시도 때도 없이 철없이 피었다가 넘어지는
붉게 타오를 꽃들의 봄밤에서 봄날까지
경배하듯 자지러지게 어깨를 두드리는
화창하지 않는 봄, 봄날에
서대신동
노을이 흘러내리는 기와지붕
갈 곳 없는 풍경들이 골목을 휘젓고 다니네
빨간 벽돌을 물고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네
느릿느릿 걷는다는 것은 철학자로 다가서고 싶은 걸까
당신과 내가 주고받았던 기억의
낡은 풍금소리를 품고 있는 해질 무렵이었네
살금살금 걸어 고개를 갸웃 골목 안쪽으로 돌려 보네
저녁이 묻어오는 물 묻은 마음을 좇아
담쟁이덩굴이 담벼락을 입에 물고 있었네
몇 십 년 전 터졌던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푸른곰팡이 꽃을 피우고 있었네
거기가 저 골목 귀퉁이 쯤이었나
물살에 떠밀려 떠나버린 빈 집 창문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버려진 꿈들의 흔적들이
깨진 유리창에 광고지처럼 너덜너덜 붙어 있기도 했었네
나는 중세 성곽의 내벽을 돌 듯 가만가만 걸어
내 안의 텅 빈 마당까지 천천히 돌아나가네
오래도록 삭아 내린 쇠 난간 냄새
쓰러질 듯 맞물린 담장과 벽돌집 기둥 따라
황폐해진 것들은 조금씩 꼬리가 자라나
사구에 쌓이는 진흙 같은 고요의 안부를 묻고 있었네
하두자_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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