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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이영주/낭만적인 자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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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04회 작성일 17-10-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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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영주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십 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얼마나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의 다리에서 생생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가 뿌린 흙 위에 나는 서 있다. 이 곳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잠깐 동안 그는 앉아 있었는데, 동그랗게 어두워지는 자리였다. 내가 어지러워 돌처럼 흘러나가는 자리. 소파에 앉아서 그는 흩어진 잔해들을 본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집이라는 집은 없다. 고향이 없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지.  





북해도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내가 내 안에 앉아 글씨 쓰는 것이 좋아서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형벌의 세계로 끌려들어갔지. 너를 쓰기 시작한 것. 너와 나를 쓰면서 바깥의 너를 만나게 된 것. 바깥에서 안으로 네가 들락거리는 순간들을 모으는 것. 창문으로만 드나드는 기록의 형식은 산양의 순례처럼 가깝고 먼 것인가 싶었지. 하얗지만 더러워지는 코트를 벗지 못하고 한파에 내던져져 있었어. 폭설에 묻힌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쓰다 지우고 불쏘시개로 쓰다 지우고…… 그렇게 네가 자꾸 지워져서 이 불타오르는 글씨는 무엇인가 생각했지. 눈이 흩날리는 방 안에서 쓰는 동안 모서리에서 네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백지 한 가운데가 검은 빛으로 물들 때 오래된 침묵으로 마모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물었지. 나는 사이렌이 울리면 무관하게 불타오르는 지붕들. 기록할수록 너와 멀어지는 한 줌 재. 창문 밖으로 털모자가 떨어질 때.






이영주_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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