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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허청미/본색을 고백하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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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허청미
본색을 고백하다
―가을 나무 이야기
푸르른 날에 우리는 한통속이었나요
나는,
이념을 신봉하다 불온해진 붉은 삐라입니다
테호가 없는데 철철 넘치는 고흐의 노랑 물감통입니다
처형대 선 헤스터 프린 가슴에 주홍글씨입니다
골수까지 표백된 수도승의 뼛속입니다
수만 볼트 번개에 오그라든 이 조막손은 허무의 끝이죠
푸르른 날의 가래호두 같은 침묵이 부서집니다
이때쯤 창공은 숨 멎도록 섬뜩한 칼날이죠
순환과 질서를 신봉하는 집행자 앞에서
민낯으로 버선목을 뒤집어야할 때라는 거
한통속은 오해였다는 거
여기저기 까발려진, 갖가지 본색은 참말입니다
벚꽃나무에 걸려있는 검은 비닐봉지
사월 벚나무 가로수 밑에
꽃잎이 쌓인 바닥은 퍼즐판이다 우듬지엔,
검은 비닐봉지 하나 계양해 놓은 깃발처럼 펄럭인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비닐봉지는
추측에서 억측으로 캄캄하게
웅크려 있던 것들 다 비우고 훨훨, 발길에 채이다 바퀴에 휘감기다
바닥에서 허공으로 부양했을
검은 비닐봉지는
다시 부활하는 존재의 은유 같은
저 검은 비닐봉지는
죽어서도 눕지 못하는 숙명에 대하여
칼바람에 저항이 매몰된 잔인한 계절에 대하여
팝콘처럼 터지는 열꽃에 대하여
하르르 추락하는 허무에 대하여
벌거숭이 되어 참아낸 치욕에 대하여
아무도 모른 척 서로서로 그렇게
꽃비 내리면 동문서답들이 꽃길을 걸어간다
꽃길은 온통 비문의 모음 자음처럼 쌓이고
밟고 밟히는 신발 신발들에게 짓눌려 뭉개지고
단초가 묘연해지는 시절 하나 또 가고 오고
바람아, 쉬어 가자 저 아래 모두 환한 낯빛들
누구를 위무하는지 그저 안심이다
검은 비닐봉지 꽃구름 타고 햇볕 든 쥐구멍이라 여길 것인가
아무도 알 수 없는 유령처럼 바람은 분다
허청미_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꽃무늬 파자마가 있는 환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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