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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천수호/피의 강박에 관한 고백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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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천수호
피의 강박에 관한 고백
마당 귀퉁이에 빨간 꽃을 피우던 동백나무가 베어졌다
나란히 서있던 하얀 동백이 꽃잎을 떨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피칠갑에 대한 그의 강박과 측은지심의 아내 강박이 나란해졌다
그는 꽃보다 색에 집착했지만 아내는 색보다 꽃에 집착했다
희고 붉은 꽃이 뒤섞여 마당을 이루던 그 꽃의 세계가 단조로워졌다
붉은 꽃보다 흰 동백을 더 좋아한 날들도 함께 지워졌다
나무를 잘라내는 동안 밑동 짬에는 붉은 꽃송이가 질서도 없이 포개졌다
그는 빗자루를 들고 꽃들의 아우성을 쓸어 모았다
겹겹 싸여서 다 풀지 못한 피의 말들이 작은 부삽 가득 시끄러웠다
갓 떨어진 빨간 꽃으로 그 소복한 말들을 다 쏟아 버리고
그는 떠났다 그의 뼈 항아리도 따뜻할 때 봉해졌다
나무가 있던 자리엔 꽃숭어리 대신 그가 했던 말의 뼈대가 묻혔다
흰 동백꽃이 푸른 잎사귀를 벌떡벌떡 치켜들고 필 때
꽃보다 색으로 생각이 옮겨진 아내는 붉은 꽃이 마냥 그리웠다.
빨간 동백이 수제비처럼 제 몸을 툭툭 떼어내던 옛 기억이
어떤 글씨처럼 형상화되었다
피의 강박에 관한 그의 고백이었다
희미한 적敵
외출에서 돌아오니
욕실 바닥에 동물 발자국이 찍혀 있다
포유류 같은 큰 짐승의 발자국
이런 돌연한 사태라니
방범창이 사방으로 빽빽하여 들어올 곳도 나올 곳도 없는 아파트에서
짐승의 출현이라니.
이 방 저 방 기웃거리고
베란다까지 들춰가며 발자국을 쫓는다
대치상황인지 추적상황인지
발자국은 선명한데 적敵은 희미하다
원시적인 미행을 지나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
짐승의 덩치와 분노의 무게를 가늠한다
공격 의지가 두드러져 더욱 선연한 자국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어디선가 덤벼들 태세를 하고 이를 꽉 깨물고 있을 그 놈
화火가 발끝까지 전달된 흔적 앞에서
나는 감히 내 욕실화를 뒤집어
발자국과 맞춰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천수호_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현재 명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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