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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신작시/서윤후/선인장 옮기기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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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서윤후
선인장 옮기기
무심한 사람의 낡은 수첩에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느낌은 생략된 채로
흙 속 깊숙이 파놓은 마음이
알아서 자라나길 바라는 것이다
안전하고 신속한 삶을 사는 동안에는
죽었다고 생각해야 편안해지는 마음도 있다
그런 무관심으로 자라난 선인장을 옮긴다
작은 화분에서 큰 화분으로 가는 일은
좋은 일이다 축하할 일이야
햇빛이 늘어진 발코니에 쭈그리고 앉아
선인장을 꺼낸다 죽은 것을 대하듯 살살
선인장에 들킨 맨손이 따가울 때
찔리기 싫어 뾰족해진 날도 있었지만
나는 비좁아진 곳에 어울리는 화분으로
아픈 것 뒤에 올 건강한 것을 기다렸다
손을 털고 작아진 화분의 쓸모를 생각하면
가시는 선인장의 경험만큼 자라날 것이다
물주는 일을 자주 잊는다는 게 그렇다
단순히 살아있는지 궁금한 안부도 있었다
생각날 때마다 물을 흠뻑 줘서
익사한 사람의 숨소리를 듣듯 선인장을 살살
불 꺼진 방안에서 물 마시러 가는 사람이
실수로 선인장에 손이 닿거나 미치지 못할 때
그런 거리에서 내다보이지 않는 것을
수첩에 받아 적기도 한다
아직 누구도 읽지 않은 것을 잔뜩 가진 자는
언젠가 목말라 할 것이니
그런 안부가 궁금해서 선인장을 키웠다
돌아갈 수 있는 화분을 깨버린 채로
단지 모든 게 이 화분에서 끝나길 바라며
큐빅
너는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 창문을 열면 춥다 말하고 방문을 닫아주면 어둡다고 속삭이는, 그런 변덕으로부터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네 것은 없고 온통 네 이름만 붙여놓은 것들로 저지른 세계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셰퍼드처럼, 킁킁거리게 되는 코를 박고 싶은 심정을 모아 영에서 영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 덮을 것 없는 날에 뾰족해지는 너에게 걸려 풀려가는 스웨터를 애써 입고 싶었던 사람. 버릴 것 없이 갖고 싶은 것만 많아 의자에서 화분으로 생각을 옮겨 심는 사람. 태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던 힘을 결국 살고 있는 일에 보태는 어리석음과 같이, 함부로 놓인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착시로 곧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 다시라는 말로 자꾸 세공되고 제일 많이 가졌던 아름다움을 깎게 되는 사람. 이번 삶에서 흥정한 것이 있다면 머뭇거림에서 침묵으로 떠나는 지름길을 새겨들은 것. 각인된 이름을 지우려고 이름 없는 것을 파내던 조각칼이 취미인 두 손을, 있어야 할 곳에 놓아두려고 자꾸 닮은 사람을 찾던 사람. 한 다발의 손가락들로 고백하면 가짜도 진짜처럼 보인다는 것을 아는 희귀한 눈썰미로, 자꾸 나에게서 없는 나를 타인의 편지 속에서 찾는 사람. 오늘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이름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 그렇게 진짜가 되어가는 반짝임은 아직 들킨 적 없이 빛나려고 뒤척이는데, 어둠을 깨우는 장면에 놓여 있는 당신이라는 사람.
**약력: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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