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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책 크리틱/김동현/종횡무진의 ‘식도락’, 삶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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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935회 작성일 17-01-04 12:07

본문

책 크리틱

김동현

 

종횡무진의 ‘식도락’, 삶을 노래하다
-강우식 시집 『꽁치』

1. ‘먹는다’라는 섭생의 굴레
   우리는 늘 먹는다. 혼자서 먹기도 하고 함께 먹기도 한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의 조건이자, 섭생의 굴레이다. ‘먹다’라는 서술어가 발화될 때 우리는 ‘먹는다’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의 신체가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먹는다’라는 행위는 단독의 서술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다’라는 서술어를 발화하는 순간 그것은 종종 삶의 구체성,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조건들을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강우식의 『꽁치』는 단순히 음식을 시의 제재로 삼고 있지 않다. 그가 음식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것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섭생의 굴레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실존의 자리로 옮아간다. ‘끝시’라는 표제어의 앞자리에 놓인 다음의 시를 보자.

포도를 가볍게 보지마라/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있다./어떤 눈물이든 사연이 있다는 얘기다./알알이 눈물과 기도와/가난과 용서와 겸허함과 사랑이 있다./드넓은 들에 불어오는 바람의 따스한 입김과/흙의 부드럽다 못해 견고한 너그러움과/초록 잎새를 닮은 희망과/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줄기로/뼈대를 만들고 짠 피와 살이다./완벽한 너무나 완벽한 우주다/그 속에 하나님이 있으시다./하나님의 피와 말씀이 있다./대저 오늘 우리가 입에 대는 음식이란/저 포도와 다름없나니/먹는 것 앞에서 지나치게/자신을 드러내 뽐내지 말며 죄짓지 말 일이다./가끔은 하늘의 천둥과 벼락이/우리들 세상의 무슨 계시처럼/왜 머리칼이 곧추서도록 때리고/시퍼런 바다의 파도는 온몸이 전율토록/흰 이를 드러내며 허리를 꺾는지/그 무언의 말씀과 헌신의 소리를 들을 일이다./포도와 다름없는 모든 일용할 양식에/오늘도 감사의 두 손을 모을 일이다.
                                                                                                                                                                                                                         ―「포도」전문


   포도는 단순히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포도는 “알알이 눈물과 기도”, “가난의 용서와 겸허함과 사랑”이 담겨진 하나의 “우주”로 존재한다. 그에게 음식은 섭생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로서만 인식되지 않는다. 음식은 그 자체로 우주이며, 삶의 구체성의 순간들과 마주하는 비의秘意를 간직한 물物의 총합이다. 그렇기에 포도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피와 말씀”이 담겨져 있다. 그에게 음식은 생의 섭리를 구명究明하기 위한 물物, 그 자체이다. 일견 식상해 보이는 “포도와 다름없는 모든 일용할 양식에” “감사의 두 손을 모”으는 행위가 고루해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음식을 바라보지 않는다. ‘먹방’을 넘어 ‘쿡방’이 대세가 되어 버린 요즘,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것인가’라는 말초적 관심이 아니라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내재된, 그래서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음식에 담긴 삶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그가 음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시집 말미에 실린 ‘여적餘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맛은 역사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축적이다. 맛은 그리하여 생기지만 꽃의 절정과 같은 최상의 맛은 찾지 마라. 맛의 끝은 어떤 먹거리에도 없다. 음식이라는 짐승에게서 자족의 기본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보다 간교하고 영리하여 맛보기 위해서 입에 넣고 그 맛의 감고신산을 혀로 느끼며 즐기고 또 그것도 미진해 온갖 산해진미를 포만지도록 먹고 다시 윽윽 악악 깨악질 하는 작태를(그래서 천벌을 받은) 로마시대의 유적 폼페이의 귀족 집 벽화에서 보고 알았다.

   그에게 음식은 맛을 느끼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음식의 맛에는 인간의 역사와 일상이 집적되어 있다. 맛의 극치를 탐닉하는 대상이 아니라 맛에 담긴 삶을 노래하기 위해 그는 음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먹는다’라는 행위에 담긴, 어쩌면 섭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그렇게 지속될 밖에 없는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노래하고 있다.

2. 삶의 비의秘意를 노래하는 ‘썩음’의 시학
   맞춤하게 늘어진 엄니의 젖이다//뚜껑이 덮인 그릇은//귀두의 테가 분명한 아버지의 물건이다//음과 양이 상하 잘 조화를 이룬 그릇 속의//성스러운 밥을 내가 먹고 커왔다.
                                                        ―「밥그릇」전문


   밥그릇은 “맞춤하게 늘어진 엄니의 젖”이자 “귀두의 테가 분명한 아버지의 물건”이다. 그 “물건”에서 나와 “늘어진 젖”을 먹으며 우리는 자랐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아비와 어미의 교합으로 세상에 나온 생生이란 에로스의 결과물인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타나토스로 옮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밥그릇’은 단순히 밥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성스러운’ 물物이며, 삶을 가능하게 한 원초성이다. 음식을 담아내던 그릇이 그러할 터인데 아내와 함께 하던 밥상, 아내가 생전에 자주 내어놓던 ‘물미역’은 어떠한가. 아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손도 안 대던 물미역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홀로 먹을 때 그는 아내의 생존을, 아내와 함께 했던 삶을 함께 ‘먹는다’.(‘물미역’)
    음식은 사랑이다. 음식은 죽음이다. 삶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시소에 매달려 있다. 삶의 평형이란 어쩌면 “철퍼덕 뜨거운 번철에 퍼질러 누워서” “속까지 다 까발린 누울 댁이 해물파전밖에 더 있는가”(‘해물파전’)라며 노래하는 ‘에로스’의 순간과 “서로 한물간 팔자인데 냉동이면 좀 어떠랴”라며 늙음을 받아들이는 그 자조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삶은 산다는 일의 지난함과 먹고 사는 일상의 번잡함을 버텨내는 것이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산다는 일은 “하필이면 밥 먹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제는/저승 간 사람들과 인연이 더 많이 걸리는 연륜”(‘밥을 먹다가’)이며 “세월 속에서도 잘 삭혀 익혀야 되는” “썩은 냄새”(‘밥을 먹다가’)를 풍기는 일이다. ‘썩는다는 것’은 ‘숙성’이다. 사랑도 “몸서리쳐지도록 시큼 새콤”한 “묵은지”(‘묵은지’)이다. 썩어가는 것이 삶이고, 썩음을 견뎌내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의 냄새는 “최고급 향수”의 냄새가 아니라 “시큼”하고 “새콤”한 “묵은지 냄새”이다. 묵은지 같은 사랑, 묵은지 같은 인생. 음식은 그 썩음의 향내와 함께 하는 일이고, 그 썩음의 섭리를 견뎌내는 일이다.
   음식은 썩음으로써 비로소 섭생을 가능케 하고, 사람도, 사랑도 썩음의 과정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썩는다’는 것은 자기를 버려야 가능한 일일 터. 음식이 음식의 형태를 버려야 하듯이, 삶도 삶의 형식을 버려야 비로소 삶의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꽁치』 시편은 ‘썩음의 시학’으로 써내려간 삶의 비의秘意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튀겨졌다고 해도/재빨리 꺼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다./맛을 낸다는 것이 착각의 연애 같으다.//사람도 저와 같다./다시마는 스님의 입에 가면서도/“다시 갈고(摩) 닦으라”는 계율 같은 것인가.//다시마를 단순히 맛만으로 튀긴다고/보지 마라, 나 같은 중생도 그 튀김에서/제 부피대로 부풀어 오르는 사물의 이치와/불과 기름의 오묘한 중용을 터득한다.


                                                                                                                      ―「다시마튀김」 중에서


   불을 만나 제 몸을 튀겨내는 ‘다시마튀김’을 보며 그는 “제 부피대로 부풀어 오르는 사물의 이치”를 자각한다. 이때 다시마는 다시마가 아니다. 불과 기름이라는 화염火焰을 만나 썩어갈 때 다시마는 다시마튀김으로, “불과 기름의 오묘한 중용”을 일깨우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우리네 삶도 버티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견딤의 과정이야말로 에로스로 시작된 우리의 삶이 걸어가야 하는 일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3. 기억으로 차려낸 일상의 순간들

   논산은 신병훈련소에 입대하여/일과처럼 맞아야 잠자던 시절이/기억의 저편에 작대기 하나로 서 있었다./내 마음속의 이를 악문 멍과 분노를/고요히 잠재우고 다시 논산이 좋아진 것은/탑정호수에서 먹은 붕어찜 때문이다./사랑하면 음식도 따라 달라지는지/붉은 고추장 꽃이 핀 붕어찜이 있었다./사랑은 초콜릿에만 깃든 게 아니라/비리고 비린 붕어에도 깃들어 있었구나./냄비 속에서도 붕어가/꽃잎처럼 붉게, 붉게 물들어 가며/맵고 알싸한 고춧가루로 끓는구나./뜨거운 불 속에 죽어가면서도/사랑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아하는/살신성애殺身成愛의 헌신이여./그 사랑에 만세 부를 수 없는 나는/속옷 벗고 은가락지 찬 꼴로/붉은 혀가 들통날까 봐/시치미 떼고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붕어찜」 전문


   ‘붕어찜’을 먹을 때 그는 훈련병 시절의 한 때를 기억해낸다. 분노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처참한 기억의 공간이 논산 훈련소이다. 하지만 그 논산의 기억은 ‘붕어찜’의 맛으로 다시 호명된다. 처참했던 기억마저 잠재우는 것, 그것이 맛이 가진 힘이다. 오로지 미각의 쾌락만이 전부가 되어 버린 시대에 그는 맛의 진정한 힘을 잔잔히 노래한다. 이 때 맛은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동상 든 손가락에 머물”던 고드름의 맛까지도 환기된다. 음식은 미각의 대상만이 아니다. 맛의 기억은 삶의 구체적 순간을 환기하며 기억의 성찬을 차려낸다.

   화혼까지 가자던 아내의 시간이 멈췄다./죽지 못해서/혼자 차려 먹는 밥상//밥과 국/누군가 혼자 산다고 보내준 김치./멸치꽈리고추볶음/생일처럼 더해 먹는 가지나 호박 무침.//밥 한술 입에 떠 넣고/오물거리는 내 몰골 너무 빈티 나/숟가락 탁 놓고 연극처럼/차라리 죽는 게 낫지...//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박사보다 더 높은게 밥사라며/곡기 끊으면 죽는다고 걱정해주면/그래 내 일찍 죽어/마누라 곁에 가려고 그런다/불경 읽듯이 되뇌다가도/하기야 그 말이 옳긴 옳지.//차라리 무슨 교회의/천사무료급식소에나 가 밥을 빌까./그 짓도 죽는 날까지 못할 거 같고//고작 위로 아닌 위로는/멸치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는/남해 죽방림 멸치인데 하며/젓가락을 넣었다 뺐다 한다.


                                                                                                                                                                                          ―「소박한 밥상」 전문


   아내가 죽은 뒤 혼자서 차려낸 밥상. 그 밥상에서 그는 아내의 부재를 몸서리치도록 자각한다. 기억이 차려낸 밥상 앞에서 그는 “젓가락을 넣었다 뺐다”만 반복한다. 그는 밥상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의 머뭇거림은 ‘먹는다’라는 서술어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다’라는 행위에는 삶의 구체성들로 쌓아올린 기억이 존재한다. 그가 마주한 밥상은 아내와 함께 한 일상의 시간들이다. 그 시간의 축적 앞에서 그는 차마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남해 죽방림 멸치”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면서도 그는 아내의 부재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과 마주한다. 그 밥상 위에 얼마나 많은 삶들이 펼쳐졌던 것일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밥상을 앞에 둔 부부의 일상은 얼마간 짐작가능하다. 신혼의 열정과 중년의 안정을 지나 노년의 자리로 시간은 흘러왔다. 그리고 그 시간의 어느 순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움은 밥상 하나로 남아 화자 앞에 놓여있다. 밥상 하나로 차려낸 그리움. 그 기억의 애잔함 앞에서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서 차려낸 밥상 앞에는 “꽃 피고 새 울어 춘정이 무르녹는 봄에는 포경수술”을, “모든 사물들이 성숙해지는 여름에는 항문수술”, 그리고 “가을에는 하필이면 쓸개 없는 놈이 되는 담석 수술”, “겨울은 분에 맞지 않게 식탐했다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위암수술”을 차례로 견뎌내야 했던 시인의 일상이 놓여있다. 삶의 매순간 아프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그 고통의 순간, 그리고 고통을 함께 하며, 위로를 던지던 아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그렇게 그는 밥을 먹으며 기억과 마주한다.
   음식은 단순히 섭생을 위해서만 먹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함께 하는 일은 삶을 함께 하는 것이고, 삶의 기억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그가 음식을 노래할 때 우리는 한 끼의 뜨거운 밥과 국으로 차려낸 밥상을 함께 먹으며 삶을 공유한다. 삶은 그런 것이다. 밥을 함께 먹으며 그 밥상 위에 놓인 음식을 나눠먹을 때 우리는 미각의 힘으로 시간을 우리의 신체에 기입하는 결정적 순간을 경험한다. 그 절절한 신체성이 있기에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 그에게 음식은 이러한 신체성을 각인하는 매개이며 기억으로 쌓아올린 신체의 구체적 감각을 일깨우는 존재들이다.


4. 음식의 맛, 삶의 맛
   그렇기에 시인에게 음식의 맛과 삶의 맛은 다르지 않다. 음식의 맛을 아는 일은 삶의 맛을 아는 일이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던 그가 ‘차 맛’에 대해 노래한 다음의 시를 보자.

   차 맛을 모른다는 것은 물맛을 모른다는 거와 진배없다/맹물 맛이 물맛이겠거니 막 살은 내가/위암에 걸려서야 세상에서/상수약선上水若善의 진실을 깨달았다/물이 명줄 잇는 생명이듯이/차 맛도 여기서 벗어나질 못한다/고향 근처의 오대산에는/신라 때부터의 우통수于筒水 샘도 여태껏 있어/스님께 귀한 차 대접을 받은 바 있으나/이 또한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는 첩첩산중이다/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물맛을 언제 깨치랴/(중략)//여리고 여린 잎들의 중생의 바다에서/우려내는 그윽한 초록빛 향은/갓난아기의 천진함인 양 격 없이 맑다/늘 은은히 감도는 차 한 잔의 운치는/생의 굽이마다 격조를 잃지 않으려 했던/아내의 옅은 살 냄새이기도 하다


                                                                                                                                                  ―「차 이야기」 전문


   삶의 질곡을 경험한 자만이 진정한 차의 맛을 알 수 있다. 물맛이 거기서 거기겠거니 생각했던 그가 “상수약선上水若善의 진실”을 알게 된 이유는 ‘차 맛’이 결국 “물이 명줄 잇는 생명”과 같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물이 삶의 조건이듯이 차 한 잔에도 삶이 담겨져 있다. 차 한 잔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생의 굽이마다 격조를 잃지 않”았던 “아내의 옅은 살 냄새”를 맡는 것은 단순히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다. “아내의 살 냄새”는 관능을 넘어서 일상을 함께 해온 시간의 침전물이 풍기는 삶의 냄새이다. 그가 말하는 ‘차 맛’은 단순히 미각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란 결국 시간을 일깨우는 미각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음식의 맛, 삶의 맛이 다르지 않음을, 음식의 맛이 삶의 맛과 함께 하는 것이며 음식과 삶이 다르지 않음을 그는 노래하고 있다. 그렇기에 『꽁치』는 읽기 보다는 맛보아야 한다. 맛의 성찬으로 차려낸 삶의 밥상에 동석하는 기쁨이 이 시집에 있다.






**약력: 2016년 《리토피아》 문학평론 신인상. 저서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현재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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