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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책 크리틱/백인덕/시적 ‘개성화’를 위해 기억을 ‘재편再編’하는 두 가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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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백인덕
시적 ‘개성화’를 위해 기억을 ‘재편再編’하는 두 가지 방식
―정승열 시집 『연기煙氣』와 권순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1.
시간의 세 축(과거, 현재, 미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기억은 과거의 것이고 그 방향은 ‘현재’를 향하지만 지나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기대가 현재에서 미래로 쏘아지지만 결국 그 방향이 현재로 소급되는 것보다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일단 ‘기억(순수 내용물)’과 ‘회상(기억하는 작용)’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회상이 ‘현재의 강력한 필요’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특히 시에서는 저장고에 가지런히 잘 쌓아놓은 기억은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군가는 그걸 그저 문틈으로 들여다보거나, CCTV를 설치해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도 있겠지만, 던져진 그대로 확정, 고정된 사물, 사건, 인상들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현재적 필요’, 즉 갈망이 저장고의 어둠을 뚫고 들어가 자리를 바꾸고 자세를 비틀 때, 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완벽한 유추로서 ‘지금-여기’를 뚫고 미지를 향해 쏘아 올려 질 수 있다.
정승열 시집 『연기煙氣』는 기억을 재편하려는 방법으로서 ‘형질形質의 변화’라는 과격한 기법을 선언한 근래 보기 드문 작품집이다. 시인의 기획, 의도가 일정한 목표를 향해 밟아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색을 지우는 화가
싱크대 설거지물에다 변기 물을 섞고
라디오 음악 소리에 전화소리를 뒤섞어
버스 뒷좌석 바퀴가 돌고 있는 즈음에 배설을 하면
하루라는 그림이
뭉개진 조간신문 활자들처럼 한없이 시커멓다.
그래서 나는 까매진 생명들의 흔적에서
색을 건져내어 하나씩 하늘에 흩뜨린다.
누구도 나를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투명하다.
바다에 빠진 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허공에 파란색으로 흩뜨릴 때에도
사람들은 정작 내 죄를 보지 못했다
내가 노랑, 빨강, 연두, 주황색을 거두어
하나씩 하늘에 그림으로 그려낼 때에도
누구도 그 감동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린다
모든 주검으로부터 색을 걷어내어
하나씩 허공에 흩뜨리는 나는
투명의 화가다.
―「연기」 전문
시인은 자신을 ‘연기’로 치환하고, ‘색을 지우는 화가’라고 선언한다. 그의 작업을 보면 앤디 워홀이 울고 갈만큼 충격적인데, 그 이유는 더 충격적이다. “나는 까매진 생명들의 흔적에서/색을 건져내어 하나씩 하늘에 흩뜨”리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하루’가 하나의 색(까매진)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다에 빠진 아이들’이 제 각각 품었을 온갖 색의 꿈을 빼앗아 “허공에 파란색으로 흩뜨”리기도 하는데, 이는 바다와 하늘을 연결하는 손쉬운 사고에 집착하는 세태에 대한 일종의 반어反語로도 읽힌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투명의 화가’라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즉 매질媒質이 ‘허공’이라는 점이다. 연기가 땅으로 스며들거나 물에 빠지면 그 성분의 일부가 침전沈澱되어 땅과 물을 오염시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연기는 허공중에 흩어질 때만 비로소 제가 실어 온 모든 독소를 풀어내고 이른바 승화昇華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슬픔, 분노, 절망’과 같은 독소를 내포한 색을 허공중에 흩어 탈색, 탈각하고자 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허공이 소통의 최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반증된다. ‘투명’이야 말로(우리는 현실공간의 ‘유리’와 같은 단절의 투명에 더 익숙하지만) 상호 소통의 기본 전제이며, 또한 가장 강력한 자세가 아닐까, 이 작품은 묻고 있다.
설혹 막이 열리고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로
찬란한 내 춤이 펼쳐진다면
너울너울 내 춤사위만 보지 말고
날갯짓 사이로 흐르는 어리고 여린 색깔들의
숨죽인 노래를 들어 보아라
―「나비」 부분
사람들은 알까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저들이
저만큼 앞서 산을 오르며
뒤에 오를 사람들을 위해
발을 디딜 스탠스를 깍고
손가락을 비집어 넣을 홀드를 파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종내는
산위에 올라 세상을 반추하며
바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산 위에 오르며」 부분
주지의 사실이지만, 의인화라는 비유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인이 지나치게 시적 정조에 몰입하여 감정노출이나 자아도취가 심해지는 것을 미연에 방비防備하고 싶을 때, 다른 하나는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사실(그것이 꼭 진실이거나 교훈적이 아니더라도)을 시 속에 용해溶解시키고 싶을 때이다. 정승열 시인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인용한 ‘연기’처럼 ‘나비’도 시인을 전치한 것이라고 보이는데, 그 전언은 ‘춤사위’에만 집중하지 말고, “날갯짓 사이로 흐르는 어리고 여린 색깔들의/숨죽인 노래를 들어 보아라”라는 것이다. 색色을 춤舞으로, 춤을 노래音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은 시인의 시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므로 굳이 다른 언급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린 색깔들의 숨죽인 노래’의 중요성은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앞 시 「연기」와 결합해 보면, 모든 생명은 제 각각 자기에게 딱 어울리는 색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하루’의 삶으로 비하卑下하면서 본래의 색을 잃게 한다. 현대 우리는 대부분이 생명 앞에서 색맹色盲인 셈이다. 이때 그 원초적 색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노래’만이 남는다. ‘숨죽인’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과 기쁘게 듣지 못하는 곤란 사이의 긴장, 정승열 시인이 기억을 재편성하며 의도했던 바가 바로 이 긴장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두 번째 인용 작품은 시인이 시적화자로 곧바로 등장하면서, 긴장의 완화 대신 전언의 명료성을 획득한다. 멀리서 보면, 산등성이에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사람들, ‘허공’(이 허공도 의미가 남다르다)에서 겨우 버티는 사람들이 결국은 ‘스탠스를 깎고’, ‘홀드를 파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뒤에 오를 사람들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어린 손자와 앉아 그림책을 보다, “장담壯談과 허언虛言으로 역인 석쇠에 갇혀서/낚시꾼은 밤새도록 구워졌습니다.”(「석쇠」)라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담담한 시업詩業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시인도 과거 한 순간에서는 멈춰 서게 된다. “집나간 셋째야, 나 아직 019와 유니텔 하고 있단다/옛날옛날 그대로야/히히”(「히히」)처럼.
도봉산 기슭을 헤매다가
해질녘에야 만월암滿月庵에 올랐습니다.
만월암에 막 떠오른 둥근달을 보며
“저는 인천의 만월중학교滿月中學校 교감입니다.”
스님이 합장하며
“어찌 이 험한 델 오셨는지요?”
“만월암의 저 보름달을 저희 학교로 되찾아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스님이 혀를 차며
“괜한 고생을 했군요. 보름달은 이미 만월중학교로 가고
이곳엔 없습니다.”
나는 만월암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며 짐짓 분개해서
“아니, 저기에 저렇게 보름달을 걸어두고 이곳에 없다니…….”
스님이 다시 한 번 합장하며
“저 달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만월중학교 것이지요.
단지 만월중학교 보름달이 너무 지고至高하여
이곳에서도 저리 환하게 볼 수 있는 게지요.”
나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온 골짜기의 나뭇잎이 모두 빨개졌습니다.
―「만월滿月-단풍·14」 전문
정승열 시인은 이번 시집의 4부, 「단풍」 연작에서 앞의 인용 시와 같은 해학이 넘치는 우화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방향이 시인이 지향하는 어떤 ‘승화’의 경지를 겨냥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이 길 또한 시인으로서 그 소임에 걸 맞는 의미가 충분히 생성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일련의 과학적 실험에 의하면, 우리의 기억은 1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약 40% 정도의 오류, 착각, 바람 등으로 채워진다고 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40% 정도가 거짓 기억이라는 것이고, 에둘러 말하면 그만큼 기억조차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닌지 싶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기억이란 상상력을 풍부하게 작동하기 위한 연료에 지나지 않을 뿐, 그 자체의 진실성은 다른 문제 영역이기 때문이다.
권순 시인의 첫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는 기억을 두 층위로 엇갈려 배치하면서, 그 순간의 격랑激浪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위定位를 탐색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사과밭에서 사과꽃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울해질 것이다
우울함은 냄새와 함께 다가온다
사과밭이 보이는 강가에 물비린내가 난다
물비린내 뒤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기 전에
어항 속 죽은 물고기를 버려야 한다
사과꽃 냄새가 애인을 달고 온다
수수꽃다리 냄새를 앞세우고
입 안 가득 하얀 꽃을 물고 온다
커피에서 휘발유 냄새가 난다
소년의 사타구니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난다
날아오르기에 좋은 봄날이다
손이 천 개쯤 되는 냄새들이 날아온다
먼지구름 뽀얀 순례의 길에서 온다
세상에 처음 생겨난 버스정류장에서
아득한 냄새가 날아온다
엄마의 가슴에서 새어나오던 아득함이
타박타박 오고 있다
사과꽃 냄새가 오고 있다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전문
냄새는 기억을 환기하는 촉매다. 그런데 이 촉매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기분(“당신은 우울해질 것이다”)까지 잠식한다. 이는 ‘물비린내’ 뒤엔 ‘비’가 내리고, “커피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면 ‘소년’이 성적 몽환夢幻을 겪는 것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사실 그 실체는 명료하지 않다. 시인은 ‘세상에서 처음 생겨난 버스정류장’에서 ‘아득한 냄새’를 맡지만, 그것이 “엄마의 가슴에서 새어나오던 아득함”이란 것만을 어렴풋이 감지할 뿐이다. 어쩌면, 늦게까지 학원에 있다 귀가하는 딸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냄새’는 아직 확실하게 무엇인가를 회상하게 할 수 없다. 쉽게 흩어지고, 뒤섞이는 냄새에 비해 어떤 물질들은 유년의 기억을 명료하게 되살려 낸다. 가령, “사랑방 앞 살구나무 아래는/아버지의 빈 소주병이 쌓이고/얘기 똥물 같은 것이 흥건했다/엄마가 누구인지 모르던/아버지의 큰 딸 명자 언니”(「산수유」)에서 보이는 ‘애가 똥물’이나 “남도 못 먹게 숨겨놓은 감자떡 때문에/매 타작을 당한 옥이는/옴빵진 눈 밑에 마른버짐이 가시질 않았다//앉은뱅이책상 밑에 그 감자떡은/옥이가 진종일 헛헛함을 달래려고/죽은 엄마 손길을/몰래 숨겨 놓은 건 아니었을까”(「잠실에서」)의 ‘감자떡’과 같은 사물은 기억의 선명성과 함께 시적 의미를 확보하는 데도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권순 시인의 이번 시집은 기억에 관련된 작품들이 대중을 이루고 있다. 시집의 체제로 본다면 대체로 3, 4부가 유년의 기억 등 관련성 있는 작품들로 배치되어 있고, 1, 2부는 그 기억의 표면 위에 시인의 ‘현실’이 기입된(물론 그것이 조화일리는 없다. 이 부조화가 어쩌면 시의 진정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담담한 서술형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마을버스」에서 “영동고속도로 꽉 막힌 차량 행렬 틈에/우리 동네 마을버스가 있다/울란바토르 네거리로/우리 동네 마을버스가 간다”와 같은 사실 체험의 진술이거나 「확」의 “벼르고 벼르던 과일 착즙기가 도착한다/제일 먼저 찐득한 욕망을 적당히 잘라 넣고/버튼을 누른다./빙빙 돌며 욕망의 즙이 떨어진다./마지막 살점까지 짜고 짜서/한달음에 마셔버린다./목안이 얼얼하다./지르고 나면 목이 마른다.”처럼 개인적 행위의 진술까지 다양하다. 오늘의 행위와 과거의 기억을 일대일로 대입하는 것은 시간의 변화를 무시하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다. 그래서 유년의 트라우마에서 모든 범죄적 성향을 추적하는 미드(미국드라마)를 사실 필자는 경멸한다. 지각이 뒤틀리듯 기억은 반드시 자기 변형의 결정적 순간, 시인은 마치 「포인트를 들키다」에서 그 지점이 발각된 것처럼 위장僞裝했지만, 이번 시집을 읽는 진짜 묘미는 그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다.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
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었다
수없이 자맥질을 하는데 물의 결을 스치며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 지나갔다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못가에 구두 한 짝 가지런하였다
그 속에 꽃잎 한 장 날아와 앉았다
검은 구두 속이 연분홍으로 환했다
어쩐지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어스름 속에서
사람들이 술렁였다
귓전이 울음소리로 쟁쟁하였다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달려온 여자가 구두를 끌어안았다
꽃잎이 천천히 떨어졌다
누군가 먼 곳에서 부르는 듯 얇은 생이
하르르 내려앉았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
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 물살에 찢겼다
고요하였다
고요의 내면이 바뀌고 있었다
―「못」 전문
시적 의미가 지나치게 어둡게 무겁게 그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몇 개의 수사적 장치를 걷어내면, ‘보다/꿈꾸다’의 원형이 시의 전반부에 드러난다. “신발을 본 날/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 일반적으로 꿈은 무의식이 드러나는 통로라 이해하지만, 무의식은 반복하는 꿈을 통해 강화된다. 이 작품은 현실/꿈의 경계가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기억은 필요를 넘어 솟구칠 때가 있다. 이어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 지나갔다/본 듯한 얼굴이었다”라는 시행은 이중의 왜곡을 드러낸다. 먼저 꿈 자체에서도 우리는 가장 그립거나 두려운 이를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어서 그 꿈을 언어로 전사轉寫할 때, 즉 시로 작품화할 때 일어난다. 시인은 끝 연에서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 물살에 찢겼다”고 짐짓 현상에 대한 묘사처럼 기술한다. 그러나 ‘한 생/밀서 한 장’의 극단적 대비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시인은 ‘고요’가 아니라 ‘고요의 내면’이 고동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은 서투르다. 그러나 맹아萌芽가 솟아 있다. 그보다 더한 위안이 어디 있으랴?
**약력: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아라문학 주간.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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