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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권이화/그가 떠난 자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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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권이화
그가 떠난 자리
흑과 백, 진하거나 덜 진하게
영화 속 마부가 문을 열고 나왔지만
광풍이 부는 것에 대해
말이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자 밖은
북쪽으로 날아가는 빈 모래시계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나무가 쓰러지는 것에 대해
말이 먹지 않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젯밤 꿈속에서 만난 새는
조종弔鐘을 물고 돌고 돌아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마부는 딸과 함께
빈 마당에 나와 마지막 신화를 쓴다
나비야 청산에 살자
어머니는 죽었지만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은 계속된다네
한 끼의 만찬에 올라온 썩은 감자에 대해
아궁이에 묻혀있는 꺼진 불씨에 대해
한 겹 두 겹 옷을 벗으며
나비야 춤을 추자
밖에서 노는 햇빛은 나의 아들
집에서 곰팡이를 빚는 어둠은 나의 아버지
청산에 살자 나를 불렀지만, 우물이 마른 데 대해
등불이 꺼진 데 대해 묻지 않았다
흑과 백, 진하거나 덜 진하게
마부는 딸과 함께 여섯째 날로 옮겨가고
빛을 실은 순찰차가 오고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
청산은 어디일까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다시 잠이 깼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여행
팔레스트리나를 들으며 장례미사가 끝났을 때
천사의 신발과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기대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새들은 백지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까, 그때 유성이 떨어지는 행간으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을 맞으러 나간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고요한 새벽길을 달려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는
기도처럼 아름답고
나는 마리아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작은언니는 어디까지 갔을까
권이화_2014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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