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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이인성/흑백사진 속의 가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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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인성
흑백사진 속의 가을
늦가을 햇살이 아스팔트 찻길을 쓸고 지나갈 때
플라타너스 나무가 어루만지는 골목 어귀는
행인들의 서성이는 소리에 깨어난다
그 아래 익숙한 빨간 우체통도 기지개를 켠다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 간 바람처럼 수신되지 못한 엽서
가을바람이 읽고 내가 읽는 동안
의미 없는 수다
낙엽, 저만치 가버린 계절의 뒷자락을 지우고 있다
잎사귀를 다 떨구어낸 나무들의 생채기에 바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둔한 청각을 자극하며 떠오르면
잊었던 가슴앓이를 느끼는 나, 아직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까마득한 기억 너머 보낸 편지, 회신 되지 않는 걸 보면
너 또한 살아있음일 테고
흑백사진 속 단발머리의 너
어느 망각된 시간 속에 꼭꼭 숨은 것이다
햇살 몇 겹 내려앉는 오후, 어느 시간 속에 숨어 있을 너를 찾다가
플라타너스 잎 수북수북 쌓인 골목길을 밟으며 표정 없는 나는
편지에 미처 쓰지 못 한 낱말들을 이리저리 쓰다듬어 보는 것이다
맑은 눈동자를 가진 짐승에게
친구와 오랜만의 동행,
그가 이끈 먼 외곽지 한적한 식당 뒷마당
철창 속 작은 짐승 한 마리 있었다
경계심도 저항할 생각마저도 버린 듯
멍하니 무심한 표정의 새끼 오소리
작은 생명체의 뒷다리는 살이 찢겨져 처참했으며
노을이 지는 돌아갈 수 없는 산
초점 풀어 놓은 채 바라보는 눈동자엔
생명에 대한 집착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다
아직 어려 정력에는 그만이라고 히죽거리는 얼굴 붉은 주인
그놈에게서 역한 냄새가 났다
모처럼의 대접을 몰라준다는 친구의 투덜거림
망나니의 풍월이 되어 내 귓전 허전히 때렸다
올무에 살이 파일 정도로
몸부림쳤을 새끼 오소리
주변을 애타는 마음으로
수없이 맴돌았을 어미
그 울음은 우리가 잊은 봄밤을 울렸을 것이다
돌아오는 나의 길, 바람이 메말랐다
지금쯤, 충혈된 눈의 식당주인 자랑처럼
몸보신 찾는 누군가가 먹고 있겠다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던 작은 짐승의 맑은 눈동자
도솔천에는 그렇게 맑은 영혼을 가진 이들이 살 것이다
작은 짐승아, 차라리 그곳으로 가거라
미쳐 뒤집힌 이 땅에는
너의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다
담배연기 짙게 허공으로 뿜으며
나만의 천도제를 만들어 보는 봄밤이 아프다
이인성_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빛이 아프다』, 단편 「소말리아」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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