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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신작시/조남희/구멍을 뚫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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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조남희
구멍을 뚫자
구멍을 뚫자. 지구 저 편으로 가는 구멍
이곳의 산소는 더 이상 쓸모없어
아주 오래 전부터 외계인의 간식거리일 뿐
굶주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 토사물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산소가 곰팡이로 피어나기 전에
가야 해. 지구 저 편으로,
그냥 가는 것은 이제 재미없어
그래. 내 몸에 구멍을 뚫는 거야
유일한 친구로 남아 있는
뱀의 도움을 받아야지
그 친구가 민첩하게 지나가고 나면
저 편으로 가는 직항로가 만들어지겠지
뱀처럼 쓰윽 미끄러져 가야겠지
내 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미끄러질 거야. 더 이상
토사물을 먹지 않아도 되는
산소를 맘껏 들이키는
안전한 터를 찾아 구멍 속으로
들어 갈 거야. 지구 저편으로 갈 거야
고흐의 스피커
밤이 되면 고흐는 스피커로 귀를 자른다
어둑해지면 고흐를 닮은 사람들이
그가 사는 주변을 서성인다
그를 만나기 위해
스피커를 하나씩 등에 짊어지고
사람들이 주변을 몇 바퀴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굳게 닫힌 문이 빼꼼 열린다
열린 문틈으로
절망으로 색칠한 고흐가 서 있다
고흐는 붉게 물든 스피커를
하나씩 안으로 잡아 끈다
스피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표들이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고흐는 벽을 타고 오르는 귀들을 본다
하나 둘 바닥에 엎드린다. 그들은
귀를 길게 빼서 바닥을 훑는다
피투성이가 된 귀를 쫑긋 세운다
소란을 떤다. 귀들의 아우성이다
오늘 밤에도 고흐는 스피커로 소리를 자른다
조남희_2016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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