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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미니서사/김혜정/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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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25회 작성일 17-10-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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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서사


김혜정





나타샤



  눈은 사흘째 계속되었다. 오늘도 나타샤는 오지 않았다. 남자는 이곳에 홀로 당도한 뒤 거의 자지 못했고 그나마 깊이 잠들지도 못했다. 언뜻 든 잠에서 깨어 마주한 어둠의 민낯은 공포에 가까웠다. 심장을 내어주면 삼켜버릴 것 같은 어둠이었다. 벌거벗은 시체 같은 나무들이 쉴 새 없이 바람을 일으켰다. 남자는 소주를 병째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짜릿한 전율이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전해졌다. 머릿속에서 깜부기불이 반짝, 했다.
  남자는 거적 데기를 걷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남자는 살이 에이는 한기를 느끼면서도 정신의 균형감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썼다. 미친 듯이 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기억속의 모든 것을 동원해 나타샤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얼굴과 가슴, 젖꼭지와 배꼽, 그녀의 냄새와 숨까지 모두 몸에 기억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였다면 지금쯤 사랑을 나누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녀가 오지 않았으므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이 지상에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들을 지상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 웃음소리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끌어 모은 눈에 어둠과 바람, 달빛을 버무렸다. 
  어느 결에, 눈밭에 그녀가 서 있었다. 다리까지 눈 속에 파묻힌 채였다. 언젠가 그녀가 남자에게 털실로 짠 모자를 씌워주었다. 모자 위로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했다. 숱처럼 까만 눈썹 아래로 이제 막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별이 박혔다. 나뭇잎 모양의 입술이 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남자는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그녀가 오기 전까지의 절망과 자신을 향한 저주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제 남자는 그녀와 함께이므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오래 살아 있으면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에 앞서 자신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남자는 지금처럼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그녀 옆에 앉았다. 세상이 날것으로 다가오고, 자신의 모든 것이 그녀만을 향해 있었다. 그녀에 의해 세계가 생성되고 소멸할 거였다. 그녀에게 할 말을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언어의 몸이 달아나버린 느낌.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침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덧없음에 대해 남자는 생각했다.
 
  바람이 세어지고 기온은 큰 폭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둠과 추위, 푹푹 내리는 눈, 처연한 달빛. 이 정도라면 그녀는 끄떡없을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작고 영롱한 얼음구슬들이 남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제 남자의 몸은 굳어가고 있었다.*





▶김혜정_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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