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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고전읽기/권순긍/새로운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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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07회 작성일 17-10-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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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세상읽기



권순긍 교수





새로운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메시지
―『옥갑야화玉匣夜話』 혹은 『허생전許生傳』




  연암그룹 혹은 북학파北學派의 결성과 연행燕行
  여기 우람한 체구를 가진 한 사내가 있다.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명문가 반남潘南 박씨 집안의 출신으로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촉망받았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거를 볼 나이가 지났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20세를 전후해서 과거를 준비했음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심한 두통과 우울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하기도 했다. 이때 지은 작품들이 바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한문단편들이다. 그의 문장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있어 감시監試에서 1등으로 뽑혀 영조에게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고 매번 과거 시험관이 그를 합격시키고자 했으나 일부러 피했으며 어떤 때는 ‘고송노석도古松老石圖’를 그려놓고 나온 일까지 있었다 한다. 과거에 합격시키고자 하여도 본인이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실력과 집안 배경 등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연암이 과거를 거부한 이유가 무엇일까?
  표면적인 이유로는 연암과의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소송)에 패한 선비가 죄를 입어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에 대한 자책으로 과거를 폐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혼탁한 정국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사대부들의 한심한 작태들을 목격하고 과거에 뜻을 잃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35세 되던 1771년(영조 47)이었다.
  요즘도 정부에서 정책을 결정하거나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고자 할 때 상식적인 여론과는 관계없이 소위 전문가라는 학자들이 나와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누가 보아도 아닌 일을 가지고 전문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당연한 듯이 몰아붙이는 어용학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양반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분노했던 연암燕巖이 떠오른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한 국면에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해 권력에 아부했던 지식인의 변절사를 어렵지 않게 목도하게 된다.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가 그랬고, 지금은 흉물이 된 금강산댐 건설과 4대강, 자원외교가 그러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서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그렇다. 역사학자들 90%가 반대하는데 그들을 ‘빨갱이’로 몰고 학생들에게 소위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겠다며 집필진의 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국정화를 밀어 붙인다. 엄정한 역사를 정권의 입맛대로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연암은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아갈 길을 포기하는 대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이른바 ‘실학자’로서 조선의 개혁과 발전 방향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이다.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임진, 계사 년간(1772~1773)에 선친은 식구들을 유안공遺安公(연암의 장인)의 석마향石馬鄕(지금 성남시에 위치)으로 보내놓고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 조계사 옆 우정국 근처)에 늘 혼자 우거해 계셨”으며 당시 드나들던 사람들이 홍대용洪大容, 정철조鄭喆朝, 이서구李書九,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등이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바로 연암그룹 혹은 북학파北學派로 불린 사람들이다.
  이들 그룹은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배태됐기 때문에 상공업의 장려와 시장의 발달, 유통의 개선 등 이른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한 조선의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매일 모여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할 방책을 진지하게 토론한 것이다. 이들을 실학의 제 2기에 해당하는 ‘아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들이 발전모델로 생각한 나라가 바로 청나라다.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청의 발전상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한 것이다. 모임 중에서 가장 선배격인 홍대용이 이미 1775~1776년 북경에 다녀오고 그 보고 느낀 바와 교류한 내용을 『연기燕記』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으로 펴냈으며, 이덕무의 『입연기入燕記』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가 1778년 세상에 나왔다. 『북학의』의 서문을 연암이 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경은 이들에게는 하나의 텍스트이자 도달해야 될 목표였다.
  북학에 대한 열정과 탐구가 계속될 즈음 연암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북경을 드디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암이 44세가 되던 1780년(정조 4), 6촌 형이자 영조의 부마인 박명원朴明源(1725~1790)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정사로 임명되어 그 개인수행원의 자격으로 연행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중국기행의 결과 나온 책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열하일기』는 어떤 책인가
  어쩌면 우리의 숱한 고전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텍스트는 아마 『열하일기』가 아닌가 싶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문명에 대한 보고는 물론 이를 조선에 어떻게 접맥시킬 것인가의 고민과 동아시아의 정치적 판도 및 중국의 정세까지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더욱이 풍자와 역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데다가 중국 대륙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연암의 자세 또한 지극히 유쾌하고 탐구적이다. 정말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다루는 소재 또한 산천, 성곽, 배, 수레, 생활도구, 시장과 점포, 마을, 언어, 복장에서부터 역사, 지리, 과학, 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넓고도 깊다. 마치 18세기 중국문화의 온갖 현상을 만화경처럼 모두 책 속에 집어넣어 다루고자 한 것 같다.
  『열하일기』는 도대체 어떤 책인가? 간단히 얘기하면 중국 기행문이다. 그런데도 일반적 명칭인 ‘연행록燕行錄’을 따르지 않고 ‘일기’라고 했다. 게다가 중국을 대표하는 연경燕京이 아닌 청나라 황제의 여름 궁궐인 ‘열하熱河’를 표제로 내세웠다. 열하는 북경에서 약 230Km 떨어진 하북성河北省 동북부에 위치한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이 위치한 곳이다. 거기에 온천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 하여 ‘열하熱河’라고 불렀다 한다. 여름별궁이란 의미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한민족과 이민족의 문화가 충돌하는 장소다. 특히 북경에서 만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천하의 두뇌’에 해당되는 곳이다. 여름 한철 청나라 황제들이 이곳에 머물며 티벳, 몽고 사신 등을 접견했으며, 특히 강성한 원元 제국을 이루었던 몽고를 경계하여 “두뇌를 누루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고도의 정치적 포석을 깔고 있는 장소가 바로 열하인 것이다.
  애초 건륭황제乾隆皇帝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조선 사신단의 목적지는 북경이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북경에 도착해보니 건륭황제는 그 곳에 없고 이미 열하로 피서를 간 뒤였다. 사신단은 다시 열하로 뒤따라가 건륭제를 보고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한 것이다. 약 100일 동안 6천여 리를 다니는 엄청난 ‘대장정’임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이 기회를 뜻밖의 행운으로 여기고 이용후생의 근거지를 종횡무진 누비는 ‘유쾌한 노마드Nomad’로서 지적 모험을 즐겼다. 과연 18세기 실학자 연암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길과 천하대세의 전망
  18세기 건륭 연간의 중국 청나라는 세계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같은 제도와 문물의 정비는 물론 서양을 통해 들어온 과학문명도 대단한 수준에 있었다. 이를 일찍부터 간파한 북학파北學派, 소위 ‘연암그룹’은 선진화된 청나라 문화의 수입을 통해 조선 개혁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현실성 없는 정치구호인 ‘북벌北伐’이 아닌, 청나라의 선진문명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이 그것이다. 
연암은 국경을 넘어 중국 땅을 밟으면서 “나도 모르게 배와 등이 끓고 타오르더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문화수준이 앞선 것은 아니었다. 중화가 망했으니 우리가 중화라는 ‘소중화小中華주의’의 망령 속에서 쓸데없는 오기만 부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 세계 제국으로 눈부신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연암의 심정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특히 연암이 중국을 다니며 주의 깊게 본 것은 이런 발전된 선진문명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가장 놀랍게 여긴 것 중의 하나가 벽돌의 제조와 활용인데, “요컨대 무릇 집을 짓는 데는 벽돌을 쓰는 것이 얼마나 덕이 되는지 모른다. …… 집채는 담벽에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든든하며 기둥은 담벽 속에 박혀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로써 화재염려가 없고 도적이 담을 뚫을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새, 쥐, 뱀, 고양이의 피해를 근절시킨다. …… 허다한 흙과 나무를 들이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이 벽돌만 한 번 구워내면 집은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연암이 벽돌의 우수한 점을 역설하자 동행했던 정진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연암이 부채로 옆구리를 찌르자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고 대꾸했다 한다. 선진적 기술문명에 무지몽매한 당시 조선 선비들의 고루한 태도를 보여주는 웃지 못 할 일화다.
  게다가 널따란 길에 물건을 잔뜩 싣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가는 수레는 또 어떤가? 물건이 생산되면 마땅히 소비가 돼야 하는데, 이런 ‘유통’의 관점에서 보면 수레야 말로 경악할 만한 물건이다. 재화의 유통이야말로 경제가 발전되는 지름길이 아니던가.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바퀴가 완전하게 둥글지 못하고 바퀴자국은 궤도에 들지 못한데다가 길도 제대로 닦지 않아 수레가 사용되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연암은 중국에서 우레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수레를 보며 “사방 수천 리 밖에 되지 않는 조선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단정하고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연암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와 수많은 사람들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며 주장하는가 하면 「장관론壯觀論」이라 이름붙일 만한 글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화두를 던진다. 으뜸 선비[上士]는 오랑캐 천지로 변한 중국은 아무 볼 것이 없다고 단정하며, 중간 선비[中士]는 중원을 깨끗하게 회복한 연후에라야 장관을 얘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래 선비[下士]에 속하는 자신은 “중국문화의 장관은 기와조각과 똥거름에 있다”는 역설을 펼치기도 했다.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보면 깨진 기와조각은 담을 쌓을 때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 수 있고, 똥거름은 밭에 거름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용후생의 중요함을 역설한 논리다.
  “지금 참으로 이적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중화의 좋은 법을 배워서 우리의 미개한 문물을 개선하여”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한 연후에 “중국은 볼 것이 없다고 말해도 좋다”고 「일신수필馹汛隨筆」에서 말한다. 바로 인간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이용후생의 연후에 덕을 논해도 된다는 말이다.

『옥갑야화玉匣夜話』 혹은 『허생전』
  중국 대륙을 휘젓고 다니는 연암의 유쾌한 지적 모험은 언제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18세기 조선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이는 조선의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걸리는 것은 늘 국정을 휘두르고 있는 조선의 고루한 사대부들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玉匣에서 비장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옥갑야화玉匣夜話』 혹은 『허생전許生傳』은 그런 연암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흔히 『허생전』이라고 부르는 중심 이야기의 주변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층을 이루며 감싸고 있어 그야말로 ‘천일야화千一夜話’ 처럼 ‘옥갑야화’가 되었다. 이 『옥갑야화』는 역관들이 무역을 해서 돈을 번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러다 병부상서의 부인을 창가娼家에서 빼낸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정세태鄭世泰가 망한 이야기로 갔다가 조선 제일부자인 변승업卞承業의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거기서 연암이 “나도 윤영尹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라며 『허생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쓴 것이라 하지 않고 윤영이라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살짝 발을 뺀 것이다. 조선의 현실을 직접 얘기하자니 빠져나갈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생전』은 흔히 허생이 변승업에게 만냥을 빌려 백만 냥의 돈을 번 전반부와 이완대장에게 북벌론의 허구를 통렬하게 꾸짖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이야기는 이렇다. 허생은 남산 아래의 묵적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10년 기한으로 글공부를 하다가 아내가 돈도 되지 않는 글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냐고 핀잔을 주자 7년 만에 집을 나서서 변승업을 찾아갔다. 거기서 만 냥을 꾸어 안성에 가서 과일을, 제주도에 가서 말총을 모조리 사서 10배의 이윤을 남기고, 그 돈으로 변산의 도둑들을 데리고 무인도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3년 양식을 비축해두고 나머지 곡식은 일본의 장기長崎에 팔아 백만 냥을 벌었다. 백만 냥이 나라에 소용될 곳이 없어 50만 냥은 바다에 버리고 40만 냥은 나라를 두루 다니며 빈민들을 구제하고 10만 냥을 가져다 변승업을 주었다. 허생의 재주에 탄복한 변승업은 북벌을 추진하는 이완李浣대장에게 허생을 천거했다. 찾아 온 이완에게 허생은 세 가지 계책을 알려줬으나 모두 할 수 없다고 하자 칼을 뽑아 들고 꾸짖었다. 다음 날 이완이 찾아가보니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우선 전반부의 얘기는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경제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 냥을 꾸어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벌고 이를 토대로 도적들을 무인도에 데려가 이상향을 건설하고 일본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번 다음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빈민을 구제하였다. 모두 돈을 가지고 이루어진 행위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실생활이 모두 경제활동과 관련되어 이에 대한 상품의 생산과 유통 또는 무역이 개선되고 장려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용利用한 다음에 후생厚生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 덕德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정덕의 논리구조에 의거해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최종적인 목표는 덕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이용하여 후생하는 것이 전제조건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야만 덕을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허생이 도둑들을 풍족하게 살게 한 뒤 무인도를 떠나면서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富하게 한 연후에 따로 문자를 만들고 의관衣冠을 새로 제정하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이 좁고 덕이 엷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고 한다. 이용하여 후생한 뒤에 덕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아 후생의 단계에서 만족한 것이다. 그리고 화근을 없앤다고 글을 아는 자들을 모조리 데리고 나갔다. 덕을 세운다는 구실로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될 수 있음을 안 것이다.
  게다가 50만 냥이 조선에 흘러들어 가면 물가가 폭등하여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생각에서 엄청난 돈을 바다에 버린다. 말하자면 인플레를 우려해서 그리 한 것이다. 허생이 “백만 냥은 우리나라에도 용납될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40만 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루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 것도 후생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배고프지 않게 먹고 사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강록渡江錄」에서 “이용이 된 연후에 후생이 가능하며, 후생이 된 연후에 덕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용을 하지 못하고서 능히 후생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서 정덕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고 역설한다. 바로 이런 이용-후생-정덕의 논리구조가 잘 구현된 곳이 여기 『허생전』 전반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의도는 북벌론을 공격하는데 있다. 허생이 이렇게 대단하게 돈을 벌고 빈민을 구제한 것을 “나의 조그만 시험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허생전』의 뒤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명나라 유민들의 이야기를 덧붙여 이 작품이 북벌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북벌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는 세 가지 계책, 소위 ‘시사삼난時事三難’이 등장한다. 허생의 비범함을 알아본 변승업이 북벌의 총책을 맡고 있었던 이완대장에게 허생을 천거했는데 그가 제시한 북벌의 계책은 이렇다.


① 내가 와룡선생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할 수 있겠느냐?
② 명나라 유민들에게 종실의 딸들을 시집보내고, 훈구척신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할 수 있겠느냐?
③ 청나라를 섬겨 우리 자제들을 유학 보내고 실정을 탐지하여 후일을 도모하겠느냐?


  이런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음에도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집권층이 가지고 있는 예법이나 체면같은 명분 때문에 실제로 북벌이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치구호에 불과했던 북벌론의 허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연암은 허생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의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 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 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 이제 대명大明을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치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북벌론의 허상을 통해 집권 사대부들의 헛된 명분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목이다. 역사의 실상과는 다르게 명분을 고수하려는 사대부들을 향하여 허생이 이완에게 했듯이 역사발전을 위한 풍자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허황된 북벌론은 효종이 승하한 1659년에 막을 내렸다. 연암이 중국을 다녀오던 1780년과는 무려 120년이나 차이가 난다. 120년 전의 일을 당대의 문제로 부각시켰으니 어찌 보면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 ‘되놈의 나라’라고 청나라를 무시하던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청나라는 저렇게 발전해 세계제국을 이루고 있는데, 이 조선은 북벌론과 존명배청尊明排淸의 망령에 사로잡혀 대의명분만을 고수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치구호로서의 북벌론의 허상은 맹렬히 공격하면서도 당시 현실로서의 청 황제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남겨두고 있다.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연암이 청 황제체제를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문제의식은 중국대륙에서의 청 황제체제의 청산이다. 말하자면 말로만 하는 북벌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북벌의 프로젝트를 위한 길을 열어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 제시한 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청나라에 자제들을 유학 보내 그 나라의 실정을 탐지하고 그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천하를 뒤집고 국치를 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생전』의 뒤에 허생은 명나라 유민일거라 하면서 두 명의 명나라 유민들이 등장하여 조감사를 꾸짖는 이야기를 붙인 것은 작품이 그런 북벌론의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

『열하일기』 그 이후, 문체반정文体反政
  연암은 중국에서 돌아와 방대한 원고를 정리 편찬하여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1783년경 『열하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는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글들이 참신하고도 기발해 당시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턱이 빠질 정도로 재미있어서 당시 지식인 사회에 하나의 유행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연암체燕巖體’의 성립이다. 흔히 연암체는 순정한 고문에 대비되는 참신하고도 발랄한 문체를 말한다. 『열하일기』가 완성되기도 전에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연암의 글을 베끼고 본받고자 하였을 정도다.
  『열하일기』는 엉뚱하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飛禍되었다. 중국에 다녀온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나가 비교적 여유로운 저술활동을 하고 있던 중 규장각 문신인 남공철南公轍의 편지를 받는다. 내용인 즉 정조가 당시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이른바 ‘문체반정文体反政’을 일으켰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는 소설식 문체인 ‘패사소품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열하일기』가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문단에 새로운 소설식 문체를 유행시킨 장본인으로 연암을 지목하여 엄중문책함과 동시에 문체반정에 적극 호응하라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연암은 반성의 뜻을 담은 정중한 답서를 남공철에게 보내고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실상 문체반정은 서학西學(천주교)에 빠져있던 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노론을 치기위한 정조의 정치적 묘수였고 여기에 『열하일기』가 연루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圭壽, 1807~1877)가 『호질』과 『옥갑야화』에 대한 유생들의 비방 때문에 『연암집』 출간을 포기할 정도였으니, 『열하일기』는 이래저래 문제가 됐던 텍스트였다. 거기에는 당시 조선의 개혁 프로젝트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물론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당시 천하정세가 잘 드러나 있어, 새로운 시대, 곧 근대를 향한 유쾌하고도 힘찬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연암이야말로 최초의 근대 지식인일 것이고, 『열하일기』역시 근대를 향한 최초의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권순긍_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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