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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연재산문/이경림/50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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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이경림 (시인)
50일
창
출국날이 보름 앞으로 다가오자 친구 몇이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 중에는 두어 주 도서관에 가지 못해 소식을 알 수 없던 마리엔도 있다. 카펫을 청소기로 밀며 한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경이다.
-그냥 집에만 꾸굴이고 있다 돌아갈 거니? 춘희 별장에라도 한 번 가자. 내일 바쁘지 않지? 이따 12시 쯤 우리가 데리러 갈게. 기다려 나 지금 바빠서 끊을게.
미쳐 대답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몇 년 전에 한 번 가 본적 있는 춘희의 별장이 떠오른다. 벤츄라의 바다가 가까운 산 속 고즈넉한 실버타운이었다. 마을 입구에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철문이 있고 그 앞에 경비실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별장은 골프장 옆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야 하는,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그녀는 c대 간호학과를 졸업하던 해에 이곳 병원에 취업을 해 왔으니까 햇수로 치면 45년이 되는 셈이다. 타국에서 맨몸으로 통과해온 긴 시간들을 말해 주듯 그녀는 체형도 제스쳐도 말투도 그리고 어쩐지 인상까지 이곳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생겼음에도 그녀는 마치 중독처럼 일하고 있었다.
-이집 살 때 좀 여유를 가지자고 꿈에 부풀어 샀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여기서 여유롭게 몇 번 쉬어 보지도 못했네. 어떤 땐 내가 생각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 한 마디로 못난 거지.
하고 씁쓸하게 웃었었다.
-왜 그렇게 일에 매달려? 이제 좀 쉬어도 되잖아? 연금 나오지 한 주에 한두 번만 나가도 되는 딱 좋은 일자리 있지 뭐가 걱정인데?
내가 묻자 그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쓸쓸하고…… 허탈하고…… 마치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도는 부랑인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어. 노예 체질인가?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 나는 그녀가 자신의 밖에서 한 발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쩜 그녀는 끝내 스스로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끝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스쳤었다.
‘그래 그 별장에서 며칠 지내보는 거야.’ 나는 생각난 듯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노트북, 채 읽지 못한 오르한 파묵의 『눈』, 시집 몇 권, 스케치북, 물감, 붓, 팔레트, 칫솔 치약 양말 속옷 수건…… 같은, 뻔한 여행용구들을 챙기노라니 이상하게 가슴이 설렌다.
-엄마 어디 가?
퇴근해서 들어서는 a가 여행가방에 눈길을 주며 묻는다.
-어, 춘희 아줌마네 별장에 며칠 있다 오려고.
-거기가 어디랬지?
-벤츄라.
-아아, 가깝고 괜찮네. 전화 충전기 챙겨가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해.
-그러엄, 냉장고에 반찬 몇 가지 만들어 뒀으니까 챙겨 먹어.
-그러고 보니 이번엔 엄마랑 여행 한 번 변변히 못했네. 이따 마트에 가서 엄마 필요한 것 조금 사 오자.
밤 9시가 다 된 마트 안은 한산했다. 한인마트가 아니라 야채종류도 마땅히 구미에 당기는 것이 없다. 떨이상품으로 파는 빵, 열 개씩 묶은 요거트, 아보카도 몇 개 딸기 한 팩 세일하는 닭다리 한 팩 등을 사서 공연히 몇 바퀴 어슬렁거리다 돌아왔다.
-밤늦은 시간 마트에 가면 왜 그리 괴기스런 기분이 들지? 너도 그러니?
-좀 썰렁 하지,
-아냐 썰렁 정도가 아니고 으스스 하지 않니?
-왜?
-몰라, 그 찬 기운이 주는 기분 나쁜 느낌! 어떤 땐 산 사람들의 장소가 아닌 것 같은 이상한 비현실감 같은 것이 들 때가 있어.
-또 오버한다.
어쨌든 그 이상한 비현실감 속에서 건져온 몇 가지는 그 후 며칠을 홀로 살아가는 한 인간에게 요긴한 먹거리가 되었다.
이튿날 약속한 12시에 정확히 그녀들은 나타났고 우리는 벤츄라 시내의 한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낄낄댈 수 있었다.
-난 이 그린 빈 요리가 좋은데 아쉽게도 한국에는 없어.
-그렇구나, 이 집 주인 중국 사람인데 남편은 요리사고 아내는 의사야.
이 집, 규모가 크진 않지만 음식이 맛있어서 늘 손님이 북적거리는 집이야.
-아늑하고 좋은데?
-그런데 넌 언제 돌아가니?
-응, 30일 저녁 여섯시 비행기.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그럼 언제 또 오니?
-글쎄 이번엔 너희들이 한 번 와 봐, 그래야 공평하지.
-그러게, 시간을 내 봐야지,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저렇게 한 생이 다 가는구나.
경이 창밖을 보며 쓸쓸히 말했다.
우리는 마트에 들려 몇 가지 식재료들을 사가지고 그녀의 별장으로 향했다.
마을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녀가 차 키에 달려 있는 오토 키의 버튼을 누르자 가로로 길고 커다란 마을의 쇠문이 열렸다
-마을에 저렇게 문을 달아 놓으니 좀 이상하다. 마치 수용소에 들어가는 기분?
내가 좀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좀 그렇지? 근데 왜 저 철문이 있는지 아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강도 때문에?
-맞아, 근데 그 강도가 누군지 알면 넌 놀랄 걸?
-누군데?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의 돈을 뺏으러 오는 손자 손녀들이란 말이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여긴 아이들이 권총을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돈을 뺏으러 오는 경우가 있어. 손자니까 관리원도 안심하고 들어 보냈는데 몇 번의 사고가 나고, 저렇게 철문을 달고 입구에서 경비원이 전화로 승낙을 받고 들여보내는 거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넌 이 사회를 몰라서 그래, 젊어선 뼈 빠지게 일해도 집세 내고 살기 빠듯한 것이 미국이야, 그런데 대출받아서 산 집의 은행 빚을 다 갚고 나면 은퇴할 시기가 되는 거야. 그 때부터 연금 받아 살며 저축한 돈 가지고 비로소 여유가 생기는 시기가 노년이야. 이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현금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노인들이거든.
잠자코 있던 경이 한마디 거든다.
-이 동네 시니어 타운 중에는 중급 정도에 속하지만 마치 골프장에 속해 있는 동네 같은 것이 환경이 좋지 않니? 이 작은 마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돼. 마트도 있고 병원도 있고 노인들이 운동하기 좋은 골프장이 정원처럼 펼쳐져 있잖아. 외부에서도 오지만 이 골프장은 시니어 타운을 위한 거야.
-그러네, 이 정도면 굳이 양로원에 갈 필요는 없겠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면 가야지 뭐.
이야기하는 동안 차가 그녀의 집이 있는 좁은 숲길로 들어선다. 이어 차고 열리는 소리.
- 아 숲 냄새, 여기 유난히 숲 냄새가 좋더라.
경이 기지개를 켜며 흠흠 공기를 들여마시는 흉내를 내고 그녀는 현관 키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치우지 않아서 집이 어지러워, 불편해도 며칠 지내긴 괜찮을 거야.
그녀는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치우고 마켓에서 사 온 먹거리들을 냉장고에 넣는다.
-이 방을 써, 책상도 있고 침대도 손님용이니까. 화장실은 바로 문 밖에 오른 쪽.
-야, 우리 고기 구워 맥주랑 먹자.
경이 맥주 몇 캔과 마른안주 그리고 말린 과일 몇 가지를 늘어놓으며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긴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의 얘기를 들으며 문득 생은, 특히 여자들의 생은, 단지 몇 종류로 분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 춘희가 힘들어한 생의 내용은 남편의 무능과 외도에 속하리라. 자신의 고생담에 지친 춘희가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야간근무를 하며 아등바등 벌어들인 그 돈조차 어떻게든 날려 버리고 마는 것, 그것이 저 사람의 유일한 재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는 그녀는 껄껄대며 웃었다.
-그래도 생은 화수분이더라. 다 날린 것 같은데 다시 살게 되고 또 몇 푼의 돈을 모으게 되고, …… 이따금 나는 나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 봐, 신기하고……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엇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숙연해지기도 해. 어쩜 한 인생이 거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지, 다 빈 손인데 말이지 이걸 움직여 긴긴 생을 이어간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
경이 말했다.
-아무튼 인간이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자신들을 살게 되는지 요즘에야 새삼 돌아보게 되더라 나이 때문인가?
춘희가 말했다.
-그 많은 순간순간의 내가 모두 다른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보르헤스라는 작가도 말했잖아. 생은 끊임없이 한 꿈에서 다른 꿈으로 건너가는 도정이라고.
내가 말했다.
-그럼 오늘 밤 우리들의 이 꿈은 또 어떤 꿈으로 건너가는 중일까.
밤 10시가 다 되어 그들이 돌아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로는 할 수 없는 적막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바늘 끝도 찔러 넣을 자리가 없을 것 같은 실로 무시무시한 적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티비 한 대 없는 낯선 방에서 나는 어떤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따금 산 위에 몇 채 있던 집으로 올라가는 듯한 자동차 소리가 들리다 그쳤다. 창 밑에서 살쾡이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조금 전에 깔깔거리며 떠들던 이야기들을 생각하려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였더라?
어쩌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이야기의 한 부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전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여자들의 이야기에는 마치 젖은 스펀지를 만지는 듯 축축한 슬픔의 느낌이 묻어 있을까? 문득 생육하는 모체로서 여자는 아니 암컷 은 본질적으로 슬픔의 한 형상으로 빚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다. 방안을 둘러본다. 한 쪽 벽에 붙은 흰 붙박이 장롱, 필시 이곳 사람 키에 맞추어 제작되었을 다리가 긴 침대 하나, 간이 소파, 그리고 둥글고 작은 탁자 하나가 전부다. 그 모두 그녀의 삶이 낳은 것들이리라.
격자무늬 창이 검은 숲을 안고 액자처럼 흔들리고 있다. 토요일의 숲이 토요일의 밤을 이고 끝내 처음일 시간 속으로 불려가고 있다. 흐르거나 사라지거나 물끄러미 멈춰있거나 그 어떤 형상으로 잠시 비치든 그 모두 영원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그 어디 먼 끝자락에는 바다 같은 침묵이 반짝이기도 하리라. 어쩌면 세계는, 아니 사물은, 모두 나름의 바다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바닥만 한 바다, 눈곱만한 바다, 구름 속으로 역류하는 바다, 갈매기의 등에 업힌 바다, …… 그리고 나는 오래되어 너덜너덜한 바다 하나를 가지고 있다. 나의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갈피를 가지고 있다. 갈피 사이로 이따금 영문 모를 한숨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나는 그것들을 내 속에 있는 붙박이장에 감추고 다니는지도 모른다.유행이 지나간 옷가지처럼, 낡은 빗처럼, 다 떨어진 지갑처럼 녹슨 핀처럼, 어쩜 그 모두가 시름일지도 모를 것들을.
아침나절 a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거긴 어때? 있을 만 해? 혼자 있기 무섭지 않아? 불편하면 저녁 퇴근길에 데리러 가구.
그녀는 궁금한 것들을 속사포처럼 던지고 대답을 기다린다.
-아냐, 좋아 여기 며칠 있을게 신경 쓰지 마, 밥 잘 챙겨 먹고.
-알았어, 다시 전화할게.
열시가 다 되어 토스트로 대충 아침을 해결하고 마을로 내려간다. 1월인데 자목련 두 그루가 만개해 있다. 몇몇의 노인들이 필드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필드를 따라 멀리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 본다. 바다 냄새가 골짜기를 따라 바람에 묻어온다.
-꾸에엑 꾸에엑.
색깔이 요란한 새 한 마리가 목련나무 가지에 앉아 소리치다 날아간다. 날갯짓이 현란하다. ‘色’이란 말의 의미가 문득 새롭다. 존재를 왜 色이라 하는지 알 것도 같다.
빨간 스웨터에 흰 바지를 입은 은발의 할머니가,
-하이.
인사하고 새로 이사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여행자라고 말한다. 그녀는,
-일본? 중국?
하고 묻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자,
-아, 코리아.
한다. 내가 그냥 웃자,
-이 동네에 코리안 몇이 살아요.
하고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다.
-꽃이 예뻐요.
내가 목련을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부부인 듯한 노인 둘이 입구 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아침 햇살을 쬐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집들의 유리가 햇살을 되쏘며 번쩍이고 있다. 문득, 여기가 어떤 유리구슬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터키 불루 색 하늘이 유리처럼 깊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나도 모르게 집을 지나쳐 산 위로 뻗은 길을 오르고 있다. 50여 미터 쯤 올라가니 마치 누가 숨겨 놓은 것처럼 집 한 채가 있다. 키 큰 사이프러스에 둘러싸여 안이 보이지 않는 집의 입구에 모종삽과 몇 가지 정원 손질용 기구들이 담긴 하얀 손수레가 놓여 있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아취형 길이 진분홍 부겐베리아로 흐드러졌다. 인적 하나 없는 집은 지금 나무들이 주인이다. 다시 한참을 올라갔지만 집은 없고 숲만 무성하다. 길 옆 넓적한 바위에 앉아 올라온 길을 본다. 보일 듯 숨은 길…… 인간의 길이다. 온갖 종류의 수목들 사이 인간의 길이 있다.
저녁 무렵부터 바람이 심하게 분다. 목조의 건물이 삐걱삐걱 운다. 전선이 비명을 지른다. 툭, 투둑, 툭, 하고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다. 무언지 끊임없이 휘몰려가고 있다. 왜 나는 지키미처럼 웅크리고 며칠 째 이곳에 있나. 무언가 아득하고 그립고 조금은 슬프다. 저 바람 속에서 세상은 문득 깊어지고 나무들은 하나씩 나이테를 늘리고 다시 봄이 오고 겨울이 오고 그리고 어느 날, 거짓처럼 그것들은 사라지리라. 겨울이면 이불 위로 뽀얗게 성에가 내려앉던 어린 날이 생각난다. 노란 유황연기를 뿜으며 눈 쌓인 산모롱이를 돌아가던 기차소리…… 삼촌을 짝사랑하던 읍내 초등학교 여선생이 자살을 한 것도 겨울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던 산 밑 명자 엄마가 바람이 나 도망간 것도 겨울이었다. 모든 것은 추위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창을 내다보는 일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 일은 내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 일은 또 아득하고 슬픈 것, 일테면 최초의 설렘 같은 것을 내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것을 알고 난 뒤론 휫휫 휘리릿 하는 새 울음까지 나를 묘한 슬픔의 길로 데려가곤 했다. 창밖을 내다보는 일에 나는 생의 절반을 빼앗겼다. 나는 언제나 어떤 예기치 않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나는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지금 창밖으로 뭔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며칠이나 더 머물 수 있을까? 이따금 나는 이곳에, 아니 이 생에 머물 날이 머지않음을 느낀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바람 속에 서 있는 것들이 몸을 비틀며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다. 그래,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을 데려다 준 것은 결국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창 밖에 있었다.
다섯 째 날 아침이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어디선가 오늘의 해가 와서 유리창에 척 붙어 있다. 직경 2미터 정도의 유리 속에 붙은 듯 있는 그것은 사실 자신의 전속력을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유리의 안 쪽 비현실적으로 환한 형광 빛 속을 오가며 나는 ‘지금’이라는 영원을 살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 나는 잘 하면 스무 장 가량의 원고를 쓸 수도 있으리라. 해가 창의 오른 쪽 모서리를 막 벗어날 때쯤이면, 크림 죽 한 공기와 아보카도 반 개 그리고 아메리칸 식 커피 한 잔을 마실 수도 있으리라. 문득 지난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작은 액자 하나가 눈에 띈다. 대학 교정에서 찍은 듯한 사진 속에는 날씬하고 매력적인 춘희의 젊은 시절이 친구의 팔짱을 끼고 해맑게 웃고 있다. 죽은깨 투성이의, 검고 거칠어진 피부를 가진 며칠 전의 그 노파는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일까?
나는 슬그머니 거실 한 쪽에 붙은 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속을 본다. 한 낯선 노파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다. 저 노파는 어디서 온 누구일까? 그녀가 곧 나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를 스쳐간 나의 무리들을 가만히 불러본다. 열 살, 봉암사 앞뜰에서 풋감을 줍던 그 소녀? 열여섯,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창경원 돌담 아래를 지나 전차를 타러 가던 소녀? 매일 죽음을 생각하던 병든 어미,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던 어린 여자, 사랑을 잃고 눈오는 거리를 미친듯 쏘다니던 스믈몇 살의 여자 , 도대체 그 많은 나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거울 속에는 지친 듯 마주보고 있는 주름투성이의 노파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곳의 하루는 안개 속처럼 멀다. 정오가 조금 지나면 필드에는 몇 무리의 노인들이 버섯처럼 돋아나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흩어진다. 그 자리에 텅 빈 것들이 와서 저희끼리 놀다가고 그리고는 결국 까마귀 떼 같은 저녁이 날아 앉고 마는 것이다.
밤 8시가 조금 지나 『눈』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데 셀폰이 푸르르 떤다. 마리엔이다.
-Can you get a phone call now?
그녀는 몹시 미안한 사람처럼 천천히 더듬거리며 물었다.
-Sure…… what happened?
하고 내가 물었으나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 다시,
-What happened? 마리엔?
하고 묻는데 전화기 저 쪽에서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들려 온다. 그리고 잠시 침묵. 그녀가,
- sorry.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다시,
-what happened?
하고 물었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It,s scary.
하고 말했다. 나는 혼자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I am sick.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그녀는
-조금…….
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그녀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난 너무 외로워. 사실 외로움이 지긋지긋해. 혼자 죽는 것은 너무 공포스러워.
-I am terrified.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외로움과 공포가 보이지 않는 파장을 타고 허공 가득 번지고 있었다. 그 밤, 우리는 더듬더듬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저 너머 어딘가에 어떤 마음 하나가 외로움과 공포에 지쳐 떨고 있었다.
그 밤 나는 그의 마음으로 가기 위해 높다란 언덕을 올라가는 꿈을 꿨다. 느닷없이 추운 밤 같았다. 얼음조각 같은 별들이 흩어져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탈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마음들이 가로등처럼 켜져 있었다. 한 때 나를 지나치게 괴롭힌 어떤 짐승 같은 마음도 한 구석에 우두커니 켜져 있었다. 내가 일생 도망쳐 왔던 그것!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오랫동안 그것을 지켜보았다. 축축한 시간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지나갔다. 새벽녘에야 나는 환하게 불을 켜고 서 있는 그 마음들을 지나 이름모를 칠흑의 터널을 뚫고 그녀의 마음이 있는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이경림_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한국문학 번역원 선정 영어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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