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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특집/시와영화/박춘석/글루미 썬데이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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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54회 작성일 17-10-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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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와영화




박춘석





글루미 썬데이와 장미

-영화 『글루미 썬데이』와 시





  영화 속 시의 효용성
  한 번 들어 가본 곳이라서 문을 열까 몇 번을 망설였다. 어리다는 것은 눈이 감긴 곳이 많다는 뜻일까? 다시 열고 들어간 그 곳은 내가 기억하는 방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방방마다 그토록 가득한 이야기와 풍경들을 나는 왜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까? 어린 날 나는 그저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사는 사랑이라는 방에만 들어가 보고 나왔나보다. 내가 기억하는 건 아름다운 음악과 사랑,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으면 자살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 나는 감긴 눈과 귀를 열기 위해 그 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갔다. 방방마다 가득 찬 이야기 사이사이에 스며있는 안개를 몰아낼 수 있었다. 그 방들에서 나의 장미도 만났다. 시를 나는 장미라고 칭한다.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는 시적이며 이미지와 메시지가 풍부하다. 내가 둘러본 그 곳의 방들은 이미지와 메시지가 풍부해서 끝내 다 읽어내지 못하고 나왔다. 무대는 1935년 1차 대전 중 헝가리부다페스트의 한 레스토랑이다. 주인공남자 라즐로와 안드라스, 주인공여자 일로나, 그리고 그들의 삶을 흩어놓고 깨트리는 독일군 장교며 사업가 한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라즐로와 일로나는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연인이다. 그리고 안드라스는 레스토랑에 고용된 피아니스트다. 한스는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이며 일로나를 짝사랑한다. 첫눈에 일로나와 안드라스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일로나의 생일 날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위해 작곡한 노래를 선물하면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세 남자의, 세 갈래의 시간과, 세 갈래의 길이, 자라기 시작한다. 같은 시간에 실연으로 물에 빠져 죽으려는 남자, 물에 빠진 남자를 구하는 남자, 같은 시간에 그 한 여자를 안는 남자, 너무나 조화로운 시간들, 시간은 얼마나 많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좁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두 사람을, 세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지도 동시에 안지도 못하는…… 분출하는 마음, 피어나는 꽃을 위하여 어두운 곳이 되어야 하는, 떡잎이 되어야 하는 두 남자, 모든 꽃은 오직 한 송이라는 진리다. 시간이 그들을, 그 곳을, 그 사랑을 끝없이 흩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숨을 쉴까? 물에 빠진 남자와 물에서 건져준 남자가 한 침대에서 아픈 마음을 다독이며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한 여자를 안았던 남자는 여자의 커피 기호를 위해 이웃에서 설탕을 빌려오는 아침이 왔다.

  “사람은 동시에 둘을 사랑할 수 있어 마음을 위한 것이든 육체를 위한 것이든……. 일로나를 잃느니 그녀의 한 부분이라도 갖겠어.” 

어젯밤 사랑을 잃을 뻔 했던 남자의 대사다. 사랑, 1대 1의 확정된 코드가 아니라 스스로 틀을 벗어던지는 주인공 라즐로의 사고방식은 사랑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낸다. 우리의 길들여진 의식은 그들의 사랑을 난하거나 불온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 중에 가장 큰 소리에 사랑을 맡겼다.

  “은혜는 잊지 않겠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다윈의 진화론은 필요치 않네. 동물은 동물의 삶이 있고 사람은 사람답게 살면 되네.”  

물에 빠진 저를 구해준 라즐로에게 한스가 건네는 말과  라즐로가 답하는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차이를 볼 수 있다. 인간이라는 서사, 그 오묘한 존재의 조건들을 파계하는 것들, 그 둘의 대립이 새싹처럼 자라기 시작한 무렵이다.
우리 안에 총칼은 없겠는가? 전쟁은 없겠는가? 온갖 불온한 자신과 가장 힘 있게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없는 ‘시’나 ‘음악’ 같은 ‘예술’들이다. 한스와 라즐로 그리고 ‘음악’, ‘시’ 이들은 하나의 통합된 생명체가 아닐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대립하며 어떤 방향의 존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내가 가진 시가 총칼보다 힘이 세다는 걸 안다. 총칼은 존재의 몸을 없앨 수는 있어도 존재의 존엄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음악이 영화의 전체를 이끈다. 음악이 영화의 전체를 이끄는데 왜 시를 말하느냐 물을 것이다. 모든 ‘음악’은 ‘시’를 함의하고 있으며 인간 내면의 근원에 호소하고 있는 메시지가 저마다의 고유한 삶에 시적 화법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는 것이 ‘시’라고 ‘소쉬르’는 말했다. 근원을 일깨우는 말이어서 쉽사리 들리지 않는다. 다만 ‘시’의 존재만으로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니……. 근원의 말을 끝없이 들려주는 ‘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음악’ 이상의 역할을 한다. ‘고요한 연못 같은 얼굴’로 샴페인을 따거나 ‘심장’을 멎게 하는 ‘약병’, ‘흥얼거리는 노래’, 등 압축된 이미지만으로 영화의 깊고 넓은 서사를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긴 서사에 시나 음악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무엇으로 우리를 지킬 것인가. 시는 인간의 잠재된 무게감을 나타나게 해준다.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 레스토랑을 찾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손님이 줄을 잇는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 질투와 번민을 극복한다.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사랑을 이어가는 속에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레스토랑을 찾은 음반기획자에 의해 ‘글루미썬데이’는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때는 1차 대전으로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기갈’과 ‘공포’에 물들어 흉흉한 세상으로 변해가던 무렵이다.

  “이제 나의 음악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어.”

  안드라스의 대사다. ‘양면성’, 존재의 조건을 파계하는 ‘전쟁’과 전쟁을 극복하려는 ‘음악’, 아무런 실체도 없는 ‘음악’이 전쟁과 대립구도로 나선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듣고 자살을 선택하고 음악은 세상을 뒤흔드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한다. ‘1차 대전’이라는 전체적인 테마가 아니라 한스라는 구체적인 ‘전쟁의 힘’이 라즐로 안드라스 일로나, 세 사람의 인연과 사랑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안드라스는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에 자신의 존엄이 무너지는 걸 거부하며 자살을 한다.
  “안드라스의 음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조금 알 것 같아, 모욕을 당해도 버틸 수 있는 존엄, 한 줌의 존엄으로 우리는 최대로 버틸 수 있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일 때, 차라리 떠나는 게 나아. 존엄을 지키면서” “모든 것은 지나가요. 행복을 위해 싸워야 해요.” “안드라스는 행복을 위해 더 싸울 힘이 없어서 떠난 거야.”
‘예술은’, ‘시’는, ‘행복을 위해’, ‘인간 존엄을 위해’, ‘싸우는 힘’이다. 그 후 라즐로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일로나는 임신한 몸으로 안드라스의 묘지를 찾는다. 임신한 배에 손을 올려놓으며,

“모든 것은 지나가요. 나는 행복을 위해 힘껏 싸울 거예요. 응원해 줘요.”

그 한 장면은 안드라스가 작곡한 음악은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메타포’가 담겨 있다. 배 속의 아이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독일의 패전으로 세상은 안정을 찾아가고 일로나는 레스토랑을 다시 연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그리워했던 그녀의 레스토랑을 한스가 노구의 몸으로 찾아온다. 일로나는 라즐로가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던 심장을 멈추게 하는 약을 60년간 보관했다가 한스에게 사용한다.
‘선량한 힘’, ‘아름다운 힘’, ‘존재를 존엄케 하는 힘’이 ‘시’에 ‘음악’에 모든 ‘예술’에 있다. 영화의 대중성에 ‘시’가 잠재할 때 ‘예술성’과 ‘영혼성’이 짙은 영화가 된다. 사랑과 삶이라는 현재와, 인생이라는 각각의 서사는 서로 닮은 듯하여 그 자체만으로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시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깊은 곳, ‘인간의 존엄성’과 ‘추함’, ‘평화와 전쟁’ 등 ‘양면성’과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에는 ‘시’와 ‘음악’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가벼움을 극복하고 우주의 신비로운 서사를 살게 해 주는 것이다.





▶박춘석_2002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나는 누구십니까?』,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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