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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특집/시와영화/서윤후/재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재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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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95회 작성일 17-10-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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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와영화





서윤후 (시인)





재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재난 영화
-재난영화와 시 「감염된 나라」




  우리는 구원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음을 알았고 열심히 생활했다. 다치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때때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이지? 나의 간청을 듣는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이지? 이 모든 게 다 무용한 걸 알면서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지?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우리는 팝콘을 버리며,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탄산음료를 버리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재난 영화 특유의 어수선함을 관람하면서, 마음 한 구석 어두웠던 곳을 밝히는 일. 재난 영화의 파괴적인 장면들로 하여금 나를 온순하게 두는 일. 나는 그런 것이 좋아 재난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재난 영화를 보는 사람이, 다시 재난 영화에 나오는 이상한 글이다.

재난 영화가 끝났다
  간판 없는 극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미래의 간병인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사례금이 모자라 다시 살아서 극장 밖을 걸어 나왔다 영화 속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암전된 방구석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의 불행을 보며 나를 위로한다 재난 영화가 자꾸 흥행에 실패하는 나라에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죽어 있다


살기 위해선 하나가 다른 하나를 껴안으며
고작 하나가 되는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고작 우리의 모든 면역력이어서
쉽게 병이 들고 쉽게 영화를 보며 울었다


변이된 세포들이 서로를 벗기고 닮아 가며 하나의 심장을 향해 싸우는 복도에서 우리는 사랑에 감염되고 쉼 없이 식어가는 덧셈을 풀었다 그 사이사이엔 이미 사라진 인류가 있었지만
심장과 무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병에 자연스럽게 감염된 사람들이
다시 둘로 나뉘는 방식으로 폐허를 지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면을 보려고 극장에 간다
전망하기 좋은 절망을 위해 매표소엔 끝이 없는 줄들이 늘어서 있고
조조할인은 끝났다


                                                                                                                             ―「감염된 나라에서」


  우리는 어떤 영화를 오랫동안 관람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끝내기 위해서 촛불을 들었다. 영화 같은 일이야!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그런 감탄으로 그을린 낭만은 아주 오랫동안 눈속임에 휩싸여 있었고, 눈 비비고 비로소 보니 우리는 재난 영화 속에 있었다. 광장의 모든 촛불은 꺼졌지만, 우리는 언제든 어두운 극장을 밝힐 수 있고, 스크린 너머에서 또 다른 연극을 하고 있는 가면을 벗기기 위해 일단, 날카로운 것들을 기른다. 찌를 수 있게, 할퀼 수 있게. “부디 당신에게 아팠으면 좋겠다.” 이런 기도를 하던 날도 있었다.


  나의 첫 시집에 실린 시 「감염된 나라에서」는 재난 영화와 나의 생활의 밀접함을 두고 보며 쓴 작품이었다. 나는 전 세계 대부분의 재난 영화를 섭렵했다. 알게 된 것은 어떤 위급 상황의 대처법이나 자연에 대한 경각심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떠오를 무렵부터 극장에 가지 않았다. 넋 놓고 상영되는 스크린 앞에 있는 것이 위험하고 무섭다고 여겨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재난 상황
  전망하기 좋은 절망을 샀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지만, 할인된 가격으로 산 절망으로 나는 며칠을 버틴다. 어두운 나보다 더 어두운 곳에 앉아서, 어둡다 못해 투명한 재난 영화를 만끽하면서 잠시나마 나의 고통을 덜어낸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서, 다치거나 망가져도 결코 죽지 않는 것을 희망이라 착각하며, 딸아이의 선물이 아직 승용차 안에 있거나 재난 전, 무심코 내뱉은 상처 되는 나의 말 한마디가 혓바늘처럼 돋아나 있거나,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나는 아마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남기 힘들 거야 그런 생각을 되뇌며 영화가 끝난 뒤 밝은 곳으로 돌아온다. 속았어. 구원이란 건 있을 수가 없어. 혼자의 힘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혼자의 힘으로 집에 돌아와 부족해진 혼자의 힘을 채우기 위해 혼자 잠드는 이 생활은 도대체 언제부터 재난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되려고 한다. 둘이면서 자꾸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작아지는데, 걱정도 근심도 절망도. 모든 것이 커진다고 헷갈려한다. 아무런 말없이 나무 벤치에 앉아 휘파람 불면서, 희망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잠이 드는 소년 소녀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재난이 눈앞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불신하고 자기를 공격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한 평범한 회사원의 고군분투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재난이 온 것 같다.


  영화는 절망을 통해 절망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더 정교하게 절망할 수 있으며, 때론 폐허가 된 곳이 더 안락할 수 있고 전쟁 중인 곳에서는 사랑이나 희망의 감투를 쓰고 가까스로 살아보는 것이다. 분명하게 떠날 수 있는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

 

  모두가 그럭저럭 삶을 인내하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런 자기만의 공간에서는 숨 가쁘게 고민하고 절망하며 살아간다. 극장에 걸리지 않은 초라하고 지루한 재난 영화들이 여기저기서 스토리를 이어간다. 어제는 누군가의 보조 출연자였다가, 오늘은 누군가와 견줄 만큼 대단한 악당이었다가, 내일은 다시 내 영화로 돌아와 돌아갈 곳 없이 돌아갈 곳을 찾아나서는 인생이 설정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구원, 그것은 매표소에 있으나 아직이다.






▶서윤후_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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