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66호/집중조명/백인덕/짐작의 우주宇宙 외 2편/자선대표시/시론
페이지 정보

본문
집중조명
백인덕
짐작의 우주宇宙·4
―꽃의 비밀
증오의 벼랑에 달리아가 폈다
겨우 몇 송이로도 세상
아침이 붉다.
붉은 이 배치는 모순이거나 왜곡.
갓길의 달리아를 누가 벼랑에 옮겨 놨을까?
극점極點에 피는 꽃은 없다.
화이트아웃*의 아침,
삶에도 위상학이 적용될 수 있을까?
간밤 노트에 적혀 있는 이상한 문자들,
해협의 독수리가 발아래 움켜쥔 어린 양을 동정하지 않듯
벼랑으로 몰아 수없이 머리 찍게 하는 너울이 어린 물개를
염려하지 않듯, 담장 위 민들레를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아랑곳 하지 않듯,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불운은 예정된 것,
무릇 생명이란 고단한 머리를 끄덕이며
제 그림자를 길게 늘이면 그만, 그만이다.
자기란 얼마나 좋은 질료인가.
명예와 추락을 한 그릇에서 빚고
사랑과 배신을 같은 눈길에 담을 수 있으니
아침에 붉은 꽃이 아니다,
통점痛點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悲嘆의 밀도.
누가 갓길의 달리아를 벼랑에 옮겨 놨을까?
* 화이트아웃whiteout : 눈이나 모래 등으로 인해 시야가 심하게 제약되는 날씨상황.
저녁의 서설
눈이 열린다.
창밖은 서설이 한창,
아내는 한창 멸치를 볶는다.
창안엔 빈 틈 사이 삶이 달궈지고
나는 하르투리안의 책을 읽고,
아내는 남태평양을 유영한다.
지느러미 없이 저 우아한 물질은
그렇다, 당신이 얼마나 숨 고르며 이
세상을 거슬렀는지 말해준다.
나는 그저, 선언적 명제 아래서만
고만한 섬의 어부가 된다.
성긴 그물로 낯선 은유를 낚아 올려
도매금 어語시장에 널어놓고 싶을 뿐이다.
저녁의 서설은 제 스스로 겨워
이제 폭설이다.
올려 보는 창 안에서
유영을 마친 아내가 물빛으로 시선을 건넨다.
나는 아직 ‘역사의 요동’ 속에 있는데,
창 이 쪽, 저 쪽이 진저리치게 밝아온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불과 기름에 잠기고
저 성긴 눈 사이에 하릴없이 서성이고
고단한 잠과 꿈의 경계에
지친 빨래처럼 널려질 것이다.
창을 메워버리는 눈,
걷어내지 못한 눈의 폭력 아래
이 쪽창 안에서 나지막하게 그대를 부르는데
나는 목이 겨워,
한 고비를 겨우 넘는 삶일 뿐이다.
난경파독難境破毒·4
―기억에게
새벽, 붉은 부리 새처럼
이슬만 쪼아 마셔도
가시 걸린 듯 심장이 움찔댑니다.
돌을 삼킨 세월이 아니라
돌처럼 굳은 맹세가
목구멍 아래를 깊고 깊게 눌러
아픈 건 몸일 뿐이라고
하루, 그늘진 자리마다 아무렇게나 눕지만
늘 저리는 건 배경도 없는 어떤 날.
꽃이 폈는지,
꽃이 졌는지 바람은 그저 목 아래
빗금을 긋고 사라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처음처럼 제 살을 벗어내리는 것이라
추운 새벽마다 입김을 돋워 책을 봅니다.
사랑의 둘레를 따라
옛길을 아주 천천히 서성거립니다.
걸음마다 제 허연 그림자가 걸리고
움찔대던 심장이 바튼 기침을 쏟아냅니다.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겠지요.
▶백인덕_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아라문학》 주간.
자선 대표시
시인 투정 외 1편
빗물에 패인 길 하나
오후 두 시의 창으로 쓸려온다.
영문 투성이 약병을 열어
연분홍 알약 두 알을 삼킨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프다.
또 누가 죽었거나
양장본 시집을 냈을 것이다.
등신의 세상에서 보란 듯이 등신을 증명하며
슬픈 지문을 페이지 곳곳에 묻혔을 것이다.
자기 죄에 중독되어 기꺼이 세계를
사면赦免했을 것이다. 아니,
나리백합에 제 검은 키를 재보았을 것이다.
오후 두 시 지나,
뒷담을 타는 어미고양이 울음만
키 낮은 숲을 찢는다.
마른 봄에 밀봉했던 편지를 뜯으며
아직 개봉하지 못한 작은 약병을 응시한다.
잘못 들어가 박제가 된 거미가 사는 시집들.
천 개의 관을 방 사방에 쌓아놓고
영혼의 건강을 꿈꾸었다.
제길, 흰 꿈에 뼈를 갉아 은모래만 뿌려댔다.
비는 무섭게 와서 찰나처럼 제 습지의 길로 달아났다.
흐린 액정 아래 오늘의 날짜와 날씨를 확인하며,
선생에서 시인으로 환幻하는
환煥,
새로 경멸의 첫 매미가 운다.
장마는 이제 끝났나보다.
《문학과 창작》, 2014, 겨울
한담閑談
담장과 라일락 사이
광물성과 식물성 사이. 아니
침묵하는 담벼락과 열띠게 환호하는 푸른 이파리
사이 박새 한 마리 놀고 있다.
담배 두 개비를 다 태우는 사이
제 얼굴보다 큰 눈을 가진 새 한 마리,
발 밑 한 번, 바람 부는 먼 산 쪽 한 번,
그리고 고개 돌리는 잠깐
내 서창을 힐끗 지나간다.
아무래도 나와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저 혼자 열렬히, 신나게 놀고 있다.
햇살은 간혹 녹슨 삽을 지나 아무렇게나 개어 논
빨래건조대에 걸리는데,
오늘은 수요일,
내일 오전 강의와 모레 오전 특강,
시집 해설과 집중조명 한 꼭지, 오전에 받은 심사평과
올 가을 유난히 접히지 않는 기침 한 자락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결국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다.
그새 사철나무에 올라앉은 박새 한 마리.
새끼손톱보다 작은 입으로 노래한다.
노래가 아니라 산해경이나 금강경을 외는지도 모른다.
쓰디 쓴 입술을 다 식은 커피로 적시며,
녀석을 불러보지만
나무를 박차고,
담벼락을 치고,
수국 사이를 날아와 창틀 한 번 밟고
먼 서녘 하늘 제 길로 사라진다.
얼굴보다 커다란 눈망울만 한참 방 안을 기웃댄다.
이름지어주지 못한 딸아!
그립다는 것은 그저 이렇게 그리울 뿐이구나.
발음도 안 되는 말을 왜 힘들게 배워야만 했을까?
오늘은 가끔 흐린 수요일.
《시와 사상》, 2015, 겨울
시론
병상病床과 무대와 서판書板 ; 나는 ‘시’를 모른다.
1.
낯익은 두 개의 명제 사이에서 좀 오래 망설였다. 하나는 ‘모든 시적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이지 않은 시’라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구태여 정의하고자 하면 반드시 오류를 저지를 것이고 현재란 늘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의한다는 것은 기존의 정의 위에 한숨 한 자락이라도 보태는 것이고, 현재의 불만족을 견디다 보면 조금은 더 낳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이 되기도 한다. 이 동어반복은 사실 이러저러한 ‘시론’을 쓰지 않으려는 내 기술적 기술記述이기도 하고, 내가 어떤 형태로든 시론을 갖지 못했음을, 즉 깊은 사유 없이 시작에 임해왔음에 대한 교묘한 반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글은 어차피 ‘에세이’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에세이’가 원래 신변잡기를 의미하는 ‘미셀러니’이기보다는 사유를 단편적 형태로 풀어내는 ‘단편기사Article’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어떤 우려보다는 적확한 글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병상病床과 이미지 ; “자기는 자기의 사형집행인이고 동시에 사형수다”-보들레르.
나는 소위 ‘예민한 감수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신활동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활동의 특정 부분을 특수한 맥락에서 풀어쓰고자 할 때 유용한 개념일 뿐이다. 특별히 감각적 활동에 예민한 사람이 있고, 사유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고, 실천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모두 시인이 될 자격을 가졌고, 그들 방식으로 세계를 개진開進해 왔다. 지각을 통해 특히 언어적 활동에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사실 현대사회에서 그들은 정치인이거나 연예인이기 십상이다. 더 이상 시인은 언어를 지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실천의 영역(그들은 철학자다)에 종속하지 않으면서 그저 사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일종의 미적 탐닉이 그것이 정형적이든 분열적이든 드러내는 형상과는 관계없이 오늘의 시를 시답다고 말하게 한다.
나는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지 못했다. 오랜 습작기간 덕분에 연습을 통해 둔하고 느린 감각을 보완하는 여러 수법을 체득하게는 되었지만, 상상력의 즉각적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무딘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내 시작에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언어적 감각에 무뎠다는 것은 말은 바꾸면 몸의 증상에 예민했다는 것인데, 낭만적 동경에서 흔히 드러나듯 제 스스로 병드는 존재는 없다. 불가항력적으로 아픈 몸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운명적 사고에 직면하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나는 상실의 기억보다는 아픈 몸을 통해 더 많은 이미지를 획득했다. 시력 사반세기를 조금 넘겼지만, 나름대로 시기를 구분해본다면, 전기의 문제는 모든 사건(역사, 시대적 사건마저)을 ‘아픈 몸’으로 환원해 이해하는 폐쇄적 사유가 너무 확고했다.
비 오다 잠깐 갠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 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격,
마른 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에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
이 작품은 리토피아에서 2004년에 발간한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약』의 표제작이다. 자전해설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미 ‘병’ 자체가 아니라, 혹은 ‘기억’이 아니라 ‘병듦이라는 현상’에 대한 도착적 의지가 거의 완숙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예전의 경험이나 현재의 상태가 아닌, 단지 언어로 조성하는 아우라Aura로서 병에 사로잡힌 것이다. 결국, 언어가 사실이나 재현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시인이란 결국 자신에게 결핍되거나 상실한 부분을 애써 언어로 채워 넣으려는 욕심 많은 연금술사거나 아픈 가슴을 위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게 하는 싸구려 대증요법 처방자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무대舞臺와 진술 ; “누가 무엇이라 비웃든 나는 나의 길을 가야만 한다”-김수영
결코 전위는 아니었지만, 시대의 일원으로서 또는 동시대에 가장 허약한 언어적 감수성에 기대 나는 습작기와 등단 초기의 청년시절을 다 흘려보냈다. 우리들의 가장 큰 스승은 시인 김수영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시보다는 그가 맞게 된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는 아주 영민하지는 못했지만 꽤나 성실한 학생이었고, 제자였고, 후배였고, 신인이었다. 나는 좋은 스승 밑에서 학제의 울타리 안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잘 어울려 유흥의 여러 날들을 함께 하곤 했다.
지금은 제 손으로 무대를, 아니 광장을 열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지만 나의 그 시절에는 앞선 이들이 펼치거나 돋아놓은 무대의 귀퉁이에서 열심히 자기 역할을 찾기만 해도 어느 정도 ‘자기 인정’이 가능했다.
시는 정의되어지는 순간, 오류에 빠지고 그 오류를 스스로 발산하면서 진보한다. 그러므로 ‘인정의 유무’가 들어설 자리는 본질적으로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오류와 실수를 통해 전진하게 된 그 짧은, 미세한 거리를 큰 소리로 떠들거나 호사스럽게 치장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지구와 달은 지금 멀어지고 있을까, 가까워지고 있을까?’ 교양인이라면 당연히 ‘멀어지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므로. 하지만 ‘가까워지고 있다’도 옳은 답이다. 우주는 무한하게 커서 ‘지구와 달 사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팽창하는 힘보다 중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즉 태양이 팽창하면 지구와 달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려 하는 답은 ‘그대로 있다’이다. 멀어지든 가까워지든 그것은 짧아도 억년 단위의 사건인데, 그 어떤 기술문명도 천만 년을 기대하지는 못한다. 즉 우리가 바라보는 지구와 달은 우리의 시간 속에선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과 시’의 관계를 비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부정의는 앞으로도 암약하다 다시 전면에 드러날 것이고, 시는 자연의 품으로 들어갔다 뛰쳐나올 것이고, 앞으로 유명 시인은 더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므로 서둘러 자기 무대를 좁히지 말자.
4. 서판書板과 인식 ; “세계의 규모와 차원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꿈을 정말로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를 확대시키지 못하는 꿈을 시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바슐라르
한 편의 시는 결국 하나의 명제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명제’는 인식한 내용이 집약된 하나의 완결 구조를 말한다. 모양이 어떻든 수정水晶이 결정結晶의 상태가 아니라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어떻게 빛을 반사하겠는가? 감각적 발견에서 비롯하든, 현실에 대한 성찰에서 기인하든, 언어적 탐색에 기초한 것이든 결국 시는 그것이 반사하게 될 ‘인식의 힘’에 의해 그 가치와 보존 기간이 결정될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가 필요하면 사진술을 익히면 되고, 현실을 기록하고 싶다면 다큐를 찍으면 되고, 본능을 탐색하고자 하면 끝없이 퍼포먼스를 실연實演하면 된다. 실상 그런 종류의 시작이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페이지가 엉켜버렸다.
뒤뜰 고양이가 보채고
스마트폰이 먹통이 된 순간,
어쩐지, 무언가
중요한 내용이 꼭 들어있을 것만 같은
얇은 페이지가 엉켜버렸다.
112-113에서
116-117이 자꾸 펼쳐진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생은 한 생일 뿐이다.
반쯤 열린 창을 마저 열어젖히고
먹통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고
슬쩍, 고양이처럼 가슴 쓸어내리며
다시 새 책을 펼친다.
… …
그대의 지문이 파랗게 떠 있는 속표지
그만 멈추고 만다.
읽지 말아야 할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속 깊이 닫아 두어야 할
검은 페이지들.
이 작품은 몇 년 전, 계간 《리토피아》에 발표한 「저녁 독서」라는 작품이다. 나는 아직도 ‘서판’에 서기보다는 그 앞에 앉아있는 처지다. 아니 영원히 그 자세를 견지할 것이다. 서판은 아날로그라서 새로운 것을 쓰려면 옛것을 지워야만 한다. 이 지우는 행위가 어쩌면 진정한 창조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럼 무엇을, “아직은 속 깊이 닫아 두어야 할/ 검은 페이지들”이 내게는 가득하다. 뒤집어, 언젠가 환하게 펼쳐야 할 페이지가 그만큼 싸여 있다.
불화를 허하라
―백인덕 시인론
오 민 석 (문학 평론가)
풍경 하나
그는 코뿔소처럼 씩씩거렸다. 말하는 내내 콧김을 쉬익쉬익 내뿜었다. 뒷발로 땅바닥을 차며 달리는 투우처럼 그는 계속 떠들어댔다. 가끔 침이 심하게 튀겼고, 이렇게 해서 초면의 어색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누군가로부터 그가 문단의 3대 ‘주마酒魔’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투우장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술자리에서 그의 주신酒神이 서둘러 임재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술자리가 익어갈수록 주심酒心은 깊어갔으나 주마는 나오지 않았다. 웬일인지 그에게 술의 도깨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술이 깊을수록 나는 그의 눈이 점점 더 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은 마치 기린의 눈 같아서 어쩐지 계속 지상이 아닌 다른 어떤 높은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이 지상의 삶이 불편해 죽겠다는 느낌을 내게 계속 주었던 것이고, 나는 그가 이유 불문 왜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어제의 나는
오전 열 한 시에서 오후 두시까지
텁텁한 고량주 한 잔의 시인이었고
해질 무렵까지는 글쓰기 선생, 곧바로
왕십리 모교 장례식장 구석자리,
엉거주춤 끝없는 악수 속에
누구의 후배고 제자고 평론가이며 술꾼이었다.
그렇게 어제는 세 개의 가면으로 지나갔다.
―「목 치는 저녁」
그는 시스템이 호명한 어떤 자리, 그것이 명령한 규범들과 위계들을 잘 견디지 못한다. 가령 위계중심의 사회에서 ‘제자’라는 자리는 어떠한가. 모든 자리는 관계의 자리이고 그 모든 관계에는 제 나름의 약호code들이 있어서 그것을 위반할 경우 관계는 곧바로 망가지고 만다. 한국식 제자-스승의 관계에서 제자에게 요구되는 율법은 이제나 저제나 세련된 매너로 스승을 떠받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그 모든 형태의 분석과 비판의 칼날을 접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평소에 비판적 이성 혹은 감성의 구조를 자신의 코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관계 속으로 진입하자마자 자신의 문법을 바로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 주체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호명된 주체로 타자들을 만날 때, 우리는 “가면”의 생을 살 수 밖에 없다. 위 시는 바로 이 “엉거주춤”의 상태를 잘 포착하고 있다.
풍경 둘
루카치G. Lukács가 『소설의 이론』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이 모든 가능한 길들의 지도인 시대는 행복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그 시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서사시의 종말 이후, 하늘(신)과 지상의 문법이 황홀하게 일치하던 시절은 사라졌다. 루카치가 “그런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로우나 친숙하고,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나 우리 자신의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이미 그런 세계 밖으로 쫓겨나서 “엉거주춤” 불편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능한 길들의 지도”를 잃은, 불편한 ‘문제적 개인problematic individual’들이다. 부랑아인 우리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늘 지표地表로 내려온다. 별들의 문법이 잘 들어맞지 않는 현세가 우리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티눈이여,
네가 내 머리다
발바닥에 뇌를 달고, 땅을 딛고 산다.
지표면에 속한 영혼은 추락을 모른다.
고귀한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는
내 속됨은 모두 너의 미덕.
―「티눈과 나」 부분
백인덕은 짐짓 자신이 “고귀한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별의 지도를 잃은 세상에서 아직도 별을 찾고 있는 존재는 시인밖에 없으므로, “발바닥에 뇌를 달고” 산다는 말은 일종의 자학어語이다.
나는 병자病者다,
병들었다 믿게 한다,
믿으려 한다고 믿게 만든다,
이 지랄이, 한 생을 건너가게 하리라 믿게 만든다.
―「사생결단死生決斷」 부분
“병자”는 문제적 개인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를 견딜 수 없을 때, ‘문제’가 해결 불가능할 때, 코뿔소는 자신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 “나는 병자다”라는 전언이 그런 것이다. 병든 세계가 그 어떤 수작에 의해서도 치유되지 않을 때, 코뿔소는 스스로 병든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죄에 중독되어 기꺼이 세계를 사면赦免”(「시인 투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병듦으로써, 스스로 병들었다고 믿게 함으로써, 그는 내면의 힘을 뺀다. 문제적 개인에게 이 타협의 과정은 얼마나 무거운가.
그때 배웠다, 꺼이꺼이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으면
존재가 지워지고 만다는 것도.
개 나라 개나리는 흔적도 없고, 제 하얀 살을 흔들어대던 아카시,
아카시 그늘 아래 백혈병이나 앓던 시절이었다.
아침엔 노자老子 강론을 한 시간 꼬박 들어야 했고, 일 없는 저녁이면
한양호프 구석자리에서 라깡과 춘천의 안개를 느껴야했다.
환한 지옥이 이어지고,
―「청자 물고 은하수를 건너간 낮 두꺼비」 부분
병자라는 ‘허명’이라도 없으면 존재는 지워진다. “개 나라”인 세계에서 이 “환한 지옥”을 견디기. 그에게 ‘병자’라는 이름은 지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억견臆見, doxa’이므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믿음을 강요하는 언어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억견의 징벌을 과함으로써 세계를 견딘다. 그러나 그가 “청자 물고 은하수를 건너간 낮 두꺼비”라 자신을 경쾌하게 부를 때, 우리는 다시 별이 빛나는 하늘을 향하는 그의 시선을 본다. 별이 없는 대낮에 은하수를 건너가는 시인, 굴러 떨어진 돌을 메고 다시 저 높은 하늘을 쳐다보는 시지푸스의 시선.
풍경 셋
나는 그가 자주 키득거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럴 때마다 그의 훤한 이마가 더 훤해지곤 한다. 처용이 “빼앗겼거늘 내 어찌 할꼬”라고 탄식했을 때, 그가 잃은 것은 아내였다. 그러나 그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루저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역신疫神은 다시는 처용의 삶을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처용이 이긴 것이다. 백인덕이 잃은 것은 세계다. 별빛이 모든 길을 환하게 비춰주던 세계 말이다.
별의 내부로 항해하려는 자는
결코, 자기 질량을 가져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제 슬픔의 원소를 의식해서도 안 된다.
별이 되려는 항해자를 위한 안내서 제 1장.
―「해연咳埏」 부분
그의 키득거림은 별의 내부로 항해하기 위해 “자기 질량”을 버린 자의 허허한 웃음이다. 그 빈 웃음은 세계를 잃은 자의 공허 같아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슬픔의 촉수는 바르르 떨린다. 그것은 일종의 공명共鳴이어서 그럴 때마다 내가 잃은 세계와 그가 잃은 세계가 두 개의 종처럼 울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로 함께 낄낄거리는데, 이것도 세상을 건너는 한 방법이다. 이럴 때 우리는 속으로 말한다. ‘빼앗겼거늘 어찌 할꼬.’ 그러나 백인덕은 세계가 끝없는 위계이어서 때로 한 절망의 끝이 다른 절망의 위에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나의 절망이 곧 세계의 바닥은 아닌 것이다.
연 이틀 시든 몸에 술을 붓느라
돌보지 못한 고추 몇 대가
새벽 찬물 한 바가지에
초롱초롱 흰 꽃을 세워 올렸다.
푸른 잎 몇 장도 소슬바람을 따라서
살랑인다. 삶은 가끔
이렇게 미진微震한다. 미련한 정신이
오롯이 그 떨림을 껴안지 못할 뿐.
새벽에 비운 마지막 술잔 속에
날파리 한 마리 빠져있다.
아니, 내가 넘기지 못한 한 모금이
놈에게는 멱라漞羅일지도 모른다.
―「멱라우풍漞羅遇風 」부분
“멱라”는 굴원屈原이 몸을 던진 강이다. 내가 절망하여 술을 부을 때, “새벽 찬물 한 바가지”로 초록의 생명의 피어난다. 한 죽음이 모든 것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내가 마지막 남긴 절망에 한 생명이 빠져 죽는다. 내 절망을 완성하는 다른 생명 앞에 무슨 말을 하랴. 그러니 빼앗겼다고 해서 다 빼앗긴 것이 아니고, 얻었다고 해서 다 얻은 것이 아닌 것이다. 시는 이 “미진微震”을 감지하는 안테나이다. 그래서 키득거리면서라도 세상을 건너가는 것이다.
“인덕아, 남철이 형이 죽었다!”
“혹시, 잠적했는데 와전된 거 아니야!”
“아냐, 작가회의에서 문자가 왔어”
……
격렬했던 별 하나 더 집어삼켰으니,
오늘 허무의 블랙홀은 또 얼마나 강력해질 것인가?
집 타령, 길타령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난경파독難境破毒·3-어떤 부고를 받고」 부분
기행과 위악僞惡으로 온 세상을 들쑤셨던 박남철 시인의 부고 앞에, 한때 문단의 3대 주마였던 백인덕은 그만 꼬랑지를 내린다. 더 격렬했던 불행이 “허무의 블랙홀”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난경難境”은 독성을 잃는다.
풍경 넷
별이 사라진 공간에 시인이 있다. 남루한 세계가 유물唯物의 장송곡을 쓸 때, 시인은 하늘의 빛을 끌어들여 세계를 다시 쓴다. 시인은 가능한 모든 길이 사라진 곳에서 가능한 모든 지도를 그리는 자이다. 그것을 프로이트J. Freud를 빌어 ‘소망의 상상적 충족’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시인은 사라진 가능성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이는 자이다. 세계는 어릿광대를 보듯 시인을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여, 그대는 지금 그대에게 없는 것을 시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모든 것들 다 잃었으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무슨 짓이든 벌이는 자이다. 시인은 사라진 지도를 다시 그려 세계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징징거리지 마라.
시인이란
무릇 돌덩이에 제 핏줄을 얽어
황금으로 만드는 것,
아니, 손바닥 위 모든 황금을 새벽 고양이털처럼
세상 가장 어두운 곳으로 날리는 재주.
(……)
시인이란
오롯이,
발광發光하는 자해식충自害食蟲이 아니었던가?
시인이 황금을 고양이털처럼 가볍게 세상의 어두운 곳으로 던질 때, 빛나는 것은 황금이 아니라 스스로를 찢는 시인의 몸이다. 시인은 자신을 찢어서 사라진 빛을 불러온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식충食蟲”이라 부른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하늘의 지도를 그리는 자, 시인 백인덕에게 규범의 세계여, 불화를 허하라. 그는 계속 앓을 것이다.
▶오민석_·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부석 평론상 등 수상. 시집으로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시 해설서 『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평전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마지막 잎새, 오 헨리 단편선』 등.
- 이전글66호/집중조명/천선자/파놉티콘·23 외 4편/자선대표시/시론 17.10.13
- 다음글66호/특집/시와영화/정령/영화 『라라랜드』와 시 「방문객」 이야기 17.10.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