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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집중조명/천선자/파놉티콘·23 외 4편/자선대표시/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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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74회 작성일 17-10-13 18:28

본문

집중조명

천선자




파놉티콘·23 외 4편
―성형중독·1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크고 동그란 눈동자,
앞트임, 뒤트임, 쌍꺼풀 수술을 한 왕방울 눈동자.


그녀는 적금 타서 더 크고 동그란 라이트를 사러 간다.
혼수 미천 탈탈 털어 더 밝은 외제 라이트를 사러 간다.







파놉티콘·24
―성형중독·2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울음소리가 난다
촉촉한 그녀의 눈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다른 애인을 벽 속에 숨겨두었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있을 때,
꼬리가 생각을 물고 꼬리의 꼬리가 새끼를 낳을 때,
고양이가 생각의 파편을 벽 속에 넣고 흙손을 닦는다.


그녀의 툭 튀어나온 광대뼈, 턱에서 쥐의 울음소리가 난다.
쥐 떼가 사방팔방 고방을 휘젓고 다니며 찍찍댄다.
달콤한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곳간 볍씨를 파먹듯 찍찍댄다.
고양이와 쥐*를 좋아하는 속이 시꺼먼 늑대, 속이 빤한 늑대,
아담과 이브가 되어 붉은 사과를 훔쳐 먹는 저돌적인 동물,
야옹야옹, 찍찍, 우우, 고양이와 쥐와 늑대, 동물의 낙원,


   * 현대 미인의 조건 중 하나, 눈은 고양이의 눈, 턱은 쥐의 턱.







파놉티콘·33
―우울증





너를 만날 수 없어 폭풍의 해일을 부른다.
해일의 숨소리가 바위너설 허구리에 바람씨 심는다.
먼산바라기 맨발로 푸서리 밟고 진흙 속으로 간다.
발목이 비명을 지르고 허공의 울음소리 바람씨 흔든다

.

돛단배를 타고 노를 저어저어 망망대해 간다.
고리월식, 해수면에 수를 놓고 태양이 금가락지를 낳는다.
넌, 비단보따리 들고 망부석이 되어 뱃머리에 서 있다.
꿈에서 본 희미한 얼굴을 바다 회두리에서 만난다.
금별 아래 마주보는 두 사람, 달이 금가락지를 끼워준다.


둘 이은 바오라기 끊어지고 바람씨 눈트고 서리꽃 핀다.
만년설에서 날아온 해미의 젖은 손이 물살을 안고 눕는다.
명멸하는 등대의 불빛, 별구름 오고 해일이 귀향길 삼킨다.





파놉티콘·37
―팜므파탈





비밀의 화원, 천지에 백합꽃,
나비 한 마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무지개 색을 두른 몸은 사랑의 향로,
살랑살랑 가벼운 날갯짓으로 불을 피운다.
꽃방에 들어가 꽃술에 취한 나비의 몸에서 백합향이 난다.
천국의 향은 나비의 중추신경을 타고 뇌신경을 마비시킨다.
황홀하게 춤을 추던 나비는 날개를 푹 꺾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파놉티콘·45
―사계장미




향은 날아서 우주로 가고,
지폐 위에서 더 밝게 핀다.
황금가지 끝에서 흐드러지게 핀다.


돈무늬팔랑나비, 왕자팔랑나비,
나비들이 황금광산을 찾아 헤맨다.
황금가루 묻은 나비가 장미밭을 일군다.






시작메모




  준비 중인 두 번째 시집 『파놉티콘의 꽃』에서는 원형감옥, 위성, 인터넷, 감시카메라, 눈동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파놉티콘’(원형감옥)은 보이지 않는 감시체계를 일컫는 개념으로 영국의 철학자, 법학자이자 변호사인 제레미 벤담이 1791년에 만들어낸 말이다.
  원형감옥을 세워 바깥쪽으로 죄수들을 감금시키고 중앙에 세운 높고 캄캄한 감시탑 속에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감시하는 체제, 효율적으로 죄수들을 관리하려고 만든 건축물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린, 경제원칙이 도입된 이론이다. 이 속에 갇힌 수감자는 감시자의 시선이 언제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어 언제나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이에 따라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를 감시하는 원리이다.
  1975년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의 감시체계가 권력자들이 폭력과 억압을 관철시키는 구조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사회는 인터넷의 발달이 활발한 시민운동 등으로 인한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파놉티콘‘의 일방적인 감시가 ‘시놉티콘’(상호감시)가 가능한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도 이미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시놉티콘’으로 가는 현상이다. 인터넷에 익명으로 올리는 댓글이나 이번 촛불 시위도 ‘시놉티콘’이 큰 몫을 했다. 문학적으로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감시 체계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있다.
  위성이라는 거대한 감시자가 네트워크망으로 거미줄을 치고 있는 사회구조, 대표적인 ‘파놉티콘‘의 예를 들면 곳곳에 달린 감시카메라와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체크카드, 신용카드, 교통카드, 수많은 이름의 카드는 우리의 일거일투족을 기록한다. 숨겨진 감시카메라의 눈은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얼 먹고, 또 무엇을 사고, 어떤 일을 하고 어디를 갔다 왔는지, 나도 모르게 감시당하고 무인도에서도 감시를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저어 무인도로 휴가를 간다해도 완벽한 ‘파놉티콘’에 갇히게 되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빠삐용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인간은 새장에 갇힌 앵무새가 된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인간의 뇌도 기계화되어 손발이 좀 더 편해졌지만, 한 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령하는 뇌, 또 하나의 우주가 퇴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감시망이 어떤 특정한 곳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이제는 국가, 기업 그리고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사회구조로 바뀌었고, 내 자유로운 영혼은 그에 반기를 든다. 꼭 어떤 법을 어기면서 살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을 자유롭게 두려고 하는데, 생활이라는 틀 속에 생기는 법이나 사회적 약속이 자유로운 영혼을 자꾸만 ‘파놉티콘’에 가둔다.
  시집 곳곳에 나타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생각을 해보면 유년의 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집안 사정, 수줍음 많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고, 아니 사귈 틈이 없었고,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자연이 친구였다. 언제나 산과 들에서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뭉게구름 위에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무생물인 돌멩이에게 말을 걸고, 사람을 만들고, 동물을 만들고, 고목에 초록옷을 입히고, 뱀딸기밭에 뱀을 기르고, 다래, 머루 집을 짓고, 독버섯을 먹고 살았다가 죽었다가, 계절마다 피어나는 수많은 초목과 들꽃, 만물의 생성과 함께 사는 것이 즐거웠다. 신기하고 마술 같은 나날이 수시로 흔들바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생각을 해보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 좋은 시절이었고, 다시 돌아 올 수 없어 좋은 시절이었다.
  어른이 되어 상상으로 만들어진 날개가 헤지고 구멍 난 것임을 알고 실망이 컸다. 현실감이 주는 빡빡함은 사람의 정신을 민둥산으로 만들고, 도시의 삶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냥 밥 먹고 똥 싸고 사는 것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세대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 가정폭력의 굴레, 지지고 볶고, 주위에서 본 여러 가지 굴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아파하며 사는지, 궁금해서 그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까치발을 했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있다. 도망간 엄마를 찾다가 어린 누이 등에 업혀 울다 지쳐서 더 울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반짝이던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꼭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앞으로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었다.
이후,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 영혼은 고삐 풀린 망아지다, 망아지를 말뚝에 묶어둔다고 강아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가엾은 눈동자를 본 후 더욱 나를 찾고 싶어 뛰어 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린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상상의 덩치를 키우며 힘든 시간을 건너고 또 다른 사람은 지금의 나처럼 코뿔소의 코로 돌진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을 쓰게 된 동기가 자유스러운 정신에 기반하고 있지만, 우리 다 같이 행복해지길 바라며 쓴다. 여러 곳에서 느낀 감시와 답답함을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하며 시를 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세상을 긍정적이고 따스하게 바라보길 바란다. 동그란 눈, 큰 눈, 작은 눈, 부드러운 눈, 사나운 눈, 당신의 등 뒤에도 눈이 자란다.



천선자_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리토피아문학상,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막비시동인.







감시 하에 놓인‘감옥’
―천선자 시인론





이병철 (시인)




  천선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파놉티콘의 꽃』은 오늘날 디지털 문명사회를 억압과 구속, 감시 하에 놓인 ‘감옥’으로 해석하면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판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날이 서 있지만, 그 시선으로 베어낸 세계의 비극적 풍경을 언어로 가공해 시로 펼쳐놓는 손길에는 유연함이 느껴진다.
  이 시집은 ‘파놉티콘’ 연작으로 구성돼 있다. 감시에 대한 역감시를 뜻하는 ‘시놉티콘’ 연작도 몇 편 있지만, ‘파놉티콘’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천선자 시인은 을이 갑을 감시하고, 시민사회가 권력을 견제하는 ‘시놉티콘’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을 시편들의 배치를 통해 꼬집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놉티콘은 원형감옥을 뜻한다.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18세기 영국 법학자인 제레미 밴덤이 설계했다. 이 파놉티콘이 사회현상 용어가 된 것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원형감옥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침투되었음을 지적하면서부터다.
  푸코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오늘날은 감시와 처벌의 시대다. 감시는 처벌로 이어지고, 때로는 감시 자체가 처벌이다. 정보기관 등 공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는 더욱 은밀하고 강력하게 이루어지며 개인의 삶을 억압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개개인들도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방어하기 위해, 또는 타인의 내밀한 삶을 자기 욕망의 굴레 안으로 포획하기 위해 서로 감시하고 감시당한다.
  천선자 시인은 ‘cctv’, ‘바코드’, ‘스마트폰’, ‘인터넷’, ‘무인텔’, ‘무인 정산기’, ‘페이스북’, ‘이메일’, ‘하이패스’, ‘카메라’, ‘동영상’, ‘GPS' 같은 디지털 문명사회의 기호들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만든 기술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는 아이러니를 묘사하는 동시에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감시하고 억압하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뚝배기 소머리국밥을 후후 분다.
매운 깍두기 숟가락에 올리며 카메라를 본다.
카메라도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눈알을 굴린다.
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눈은 카메라와 싸운다.
눈덩어리 커다랗게 만들어 무작정 던진다.
거지발싸개 같은 놈, 앞뒤 가리지 않는다.
집채만 한 덩어리가 머리통을 맞힌다. 웃는다.
째려보는 것 좀 봐, 금방이라도 펀치를 날릴 기세네.
달래고 어르고 치고 빠지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전략을 바꾸어 주먹으로 턱을 한 방 날린다.
앞차기, 옆차기, 엎어치기, 돌려차기로 마구 팬다.
다리가 풀리자 쌍코피가 터져 코허리로 흐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중얼거리며 노려본다.
괘씸한 카메라 국밥에 말아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카드로 국밥 값을 지불하고 돌아 나오는데,
등 뒤에서 웃는 눈동자, 나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파놉티콘·1―cctv」전문


  cctv는 범죄 예방의 목적으로 설치된 사회 안전망의 한 소품이다. 예전에는 cctv가 달려 있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도로와 골목, 상점, 주차장, 아파트, 학교, 일반 가정, 자동차 등 어디에나 cctv가 매달려 있고, 365일 24시간 쉴 새 없이 작동하며 개인의 행동을 감시한다. “뚝배기 소머리국밥”을 먹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양식인 의식주의 일환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소머리국밥집 천장에 달린 cctv는 “매운 깍두기 숟가락에 올리며” 국밥을 입에 떠 넣는 개인의 내밀한 취향까지 “째려보는” 중이다.
  예로부터 “하늘이 지켜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이제는 “cctv가 지켜본다”로 바꿔도 무방하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cctv 영상부터 찾아 그것을 폐기하려 한다. 공권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고문이나 사찰 등 권한을 남용하는 억압을 행사한 것이 세상에 밝혀졌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도 cctv를 입수해 자신들의 ‘기록된 행위’를 삭제한 것이다.
  이 cctv는 범죄 예방의 순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도구로 쓰이는 역기능도 한다. 초소형 카메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여성의 신체나 숙박업소에 투숙한 남녀의 성관계를 몰래 촬영하는 ‘몰카’라든가 남성이 연인과의 성 행위를 몰래 촬영했다가 이별 후에 인터넷에 유포하는 ‘리벤지 포르노’가 대표적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뜨거운 시선을 감지한다. 그 시선의 주인은 타인이 아닌 cctv다. 자신을 감시하고, 행위를 억압하는 그 시선이 불쾌해 ‘눈싸움’을 벌이지만 상대는 기계이기 때문에 이겨낼 수가 없다. 결국 cctv를 피해 “허겁지겁 먹어치운” 후 “카드로 국밥 값을 지불하고 돌아 나오는데” “등 뒤에서 웃는 눈동자”가 느껴진다. 우리는 누구나 이 ‘눈동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주차카드를 넣고 기다린다.


요금은 만 삼천 원입니다, 빤히 쳐다본다.
지갑을 찾고 있는데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처구니없는 기계를 씩씩거리며 노려본다.
빨리빨리 넣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벌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꼼짝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여섯 시간 삼십 분을 따라다닌 놈,
지하 삼층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갓집에서 너비아니, 동그래죽, 민어구이를 먹고,
바람에 흔들리던 강물이 커핏잔 속으로 뛰어들고,
강물에 투신한 햇살을 건져 올리며 나누는 잡담,
통지기 같은 앞집여자가 불풍나게 드나들며 외간남자,
아우르다 들켜 머리채 잡히고 신발 들고 도망갔다는 애기,
뒤로 넘어지고 코가 비뚤어지고 배꼽이 빠진 광경,
마트에서 얌통머리 없이 시식코너만 바닥내던 광경,
공중화장실까지 몰래 훔쳐보는 엄큼대장, 이 나쁜 놈,
그림자도 없는 귀신 같은 놈, 숨도 쉬지 않은 놈,
온몸에 눈을 달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파놉티콘·2―무인 정산기」전문


  이 시에서도 cctv가 인간을 감시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cctv 기능이 탑재된 무인 정산기다. 마트 주차장을 이용할 때 출구에서 요금을 정산하는 기계다. 예전에는 사람이 주차 정산을 했지만 이제는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 무인 정산기가 시인에겐 무척 껄끄러운 존재다. “정확하게 여섯 시간 삼십 분을 따라다닌 놈”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인 정산기’에게 일종의 공포와도 같은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무인 정산기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무인 정산기는 그저 주차장을 이용하는 차량의 입차 시간과 출차 시간을 기록해 주차 요금을 매기고 수납하는 장치이지만, 시인은 “대갓집에서 너비아니, 동그래죽, 민어구이를 먹”은 자신의 행동들은 물론이고, “통지기 같은 앞집여자가 불풍나게 드나들며 외간남자 아우르다 들켜 머리채 잡히고 신발 들고 도망갔다는 얘기”를 친구와 나눈 사실조차 무인 정산기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무인 정산기’로 상징되는 무인 시스템은 사회 인프라 모든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마치 공기처럼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 그래서 “그림자도 없는 귀신 같은 놈”이며, “숨도 쉬지 않는 놈”이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며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것만큼 공포를 자아내는 일도 없다.


그녀가 로비 청소를 하다말고 컴퓨터 화면을 본다.
승용차에서 두 남녀가 팔짱을 끼고 내린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른다.
그들을 따라 그녀의 시선도 덩달아 엘리베이터를 탄다.
불타는 눈빛은 엘리베이터를 숨 가쁘게 끌고 오른다.
그녀는 책상에 코를 박고 앉아서 키득거린다.
덜커덕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들어온다, 뭐 하는 거요.
컴퓨터에 개판이 열려서 개를 쫒아내려고요.
얼른 빗자루를 내려놓고 쳐다보며 웃는다.
그녀는 뒤통수에 눈 남기고 복도 저 편으로 사라진다.
                                                                                                                     ―「파놉티콘·35―무인텔」전문


   ‘무인텔’도 마찬가지다. 감시와 억압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무인텔 청소부인 ‘그녀’는 “승용차에서 두 남녀가 팔짱을 끼고 내리”는 걸 컴퓨터 화면으로 지켜본다. 사람 없이 컴퓨터와 기계에 의해 숙박 체크인과 체크아웃이 진행되는 ‘무인텔’이라고 하지만 기계가 다 할 수 없는 ‘육체적 노동’, 허드렛일은 인간의 몫이다. 청소부 여자는 무인텔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며 쾌감을 느낀다. 인간의 관음증적 욕구가 ‘무인텔’이라는 디지털 시스템 뒤에 숨어 활개 치는 것이다.

  홍길동 님이 친구로 초대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구만, 언제 봤다고 친구야, 바빠 죽겠는데, 눈 뜬 장님인 줄 알고, 장난하니, 그건 착각이고 네 모든 걸 보고 있거든, 검은 안경 끼고도 속속들이 보거든, 그림이 보인다, 마우스 그만 못살게 굴어. 컴퓨터 구석구석 숨어 있는 쥐, 세상 쥐를 다 잡겠어. 심심하면 혼자 놀지 괜한 사람 붙잡고 야단이야. 네 본분은 관공서 예서 위에 앉아있는 거야, 그래야 사람들이 서류 작성을 제대로 할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며 초대장을 지운다.

  홍길동 님의 초대장이 다시 온다. 금세 초대장을 또 보내,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창칼 들고 양반을 때려 부수고 불쌍한 백성을 구해야지. 그 옛날의 용기와 정의감은 국을 끓여 드셨나. 까나리자반 놓고 묵사발에 된장국 먹었나, 그러다 시래기 우거짓국 될라. 안 받는다는데, 굳이 받으라는 윽박질은 뭐냐. 넌 사람이냐, 기계냐, 아니면 형사라도 되는 거냐. 왜 밤낮 따라다니며 미행을 해, 기분이 나쁘거든, 내 컴퓨터에서 빨리 사라져 줘, 플러그를 뽑자 홍길동 님의 눈이 이상해진다.


                                                                                                           ―「시놉티콘·1―페이스북」전문


  헤겔은 모든 사회적 갈등과 범죄의 심리적 원인은 인정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인정 투쟁’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성복은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에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고 싶은 욕망은 SNS의 존재원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 받고 싶어 하는데, SNS는 그 욕망을 사이에 두고 관음증과 노출증을 두루 키운다. 관심을 끌기 위해 별의별 허세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은밀한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까 보이는 것도 병이지만 타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 또한 ‘관심병’이다.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는 지나친 태도를 요즘 세상에서는 관심병이라고 부른다,
  파놉티콘 대신 ‘시놉티콘’이라는 제목으로 쓴 위 시에서 시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전통적 인간관계를 대체하고 아예 장악해버린 오늘날 현실을 풍자하면서 ‘관심병’의 양상을 사실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감시를 뜻하는 파놉티콘, 역감시를 뜻하는 시놉티콘은 각각 관음과 노출의 원리로 작동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투영된 인간의 두 심리를 상징하는 기표들이다.


버스를 타고 교통카드로 찍고,
두 번째 줄 첫 번째 의자에 앉는다.
실내거울로 쳐다보는 기사아저씨,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눈동자가 자란다.
한강을 지나가는 유람선의 동선을 따라간다.
가로등 달덩이가 담긴 환한 물빛이 쳐다본다.
물속에서 눈동자가 물살을 헤치며 노를 젓는다.
반대편 차창에 붙은 눈동자, 실핏줄이 터진다.
물속의 달덩이를 건져 먹으며 따라온다.
차에서 내려 숨도 쉬지 않고 걷다가 뛰어간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 때 등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
허기진 짐승의 울음을 낳으며 따라오는 발소리,
솟구친 머리를 잡아당기고 골목의 목덜미를 잡아당긴다.
아파트 입구의 밝은 불빛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숫자를 센다.
중간에서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탄다.
남자의 검은 눈을 피하려다 무심코 거울을 본다.
낯선 얼굴이 비명을 지르며 벽속으로 숨는다.
엘리베이터 내려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깨진 창으로 스며든 바람이 계단 끝에서 웅성거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잠금 장치를 걸고 확인한다.


새벽녘에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티비가 집을 흔들어 놓는다.
수면제 몇 알을 털어 넣고 눈꺼풀을 끌어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쾅거리는 소리에 다시 깬다.
새벽 세시 어둠 속 괘종시계가 나를 보고, 
커다랗게 열린 동공을 굴리며 밤새 댕댕거린다.
                                                                                         ―「파놉티콘·38―스토커」전문


  cctv와 무인 정산기, 바코드의 디지털 문명 시대는 인간을 위축시키고 소외시킨다. 디지털 문명이 인간 소외의 주범인데, 정작 소외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소외가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을 공격한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욕망 안에 강제적으로 타인을 붙잡아두려 한다. ‘묻지 마 살인’이나 스토킹 같은 행위들이 그러하다. 인간이 소외된 사회는 사람 목숨의 가치가 한없이 초라해져 ‘죽음’이 일상으로 자리 잡는다.
  지난해 강남역 화장실에서 아무 죄 없는 여성이 죽임을 당했다. 살인범은 그동안 여성에게 무시 당해온 것에 앙심을 품고 여자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임이 드러났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폐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사회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자기정체감을 상실했다. 표면적으로는 타인에 의한 소외로 보이나 실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격리되고 유폐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소외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며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세월호 참사는 인간이 제대로 수행해야 할 파놉티콘과 시놉티콘의 역할을 기계 시스템에 맡겨둔 채 수수방관한 인간의 무기력함에서부터 비롯된 ‘인재’다. 젊은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도 그러하다. 기계가 인간의 목숨을 해친 것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계에 전권을 부여한 인간의 무책임함이 주된 원인이다.
  세상은 원래 예측 불가능한 우연과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삶은 언제나 죽음을 품고 있지만, 호스피스 병동 환자도 아니고 전쟁터의 군인도 아닌 우리가 이렇게 단 하루만큼의 내일도 약속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숨이 턱턱 막힌다.
  이웃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모두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죽음을 조장하고 조성하고 조작한다. 우리는 모두 사회 구조가 펼친 죽음의 네트워크에 붙들려 있다. 더 이상 ‘내일’을 말할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고 약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해야 한다. 간절히 바라보고 귀 기울이고 어루만져야 한다. 아름답지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언제 어디서 죽어나갈지 모르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같은 비명횡사의 시대다.
  천선자 시인은 디지털 문명의 ‘파놉티콘’에 갇혀버린 인간의 처지를 조소하고 비판하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거기 갇혀 무기력한 스스로를 무겁게 돌아본다. 그러면서 디지털 문명의 원형 감옥이 더 이상 ‘죽음의 네트워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시놉티콘’의 태도로 인간이 기계 문명을 역감시하는 날카로운 눈을 회복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시놉티콘의 그 날카로운 눈은 물론, 천선자 시인의 시에서 먼저 빛나고 있다.






▶이병철_2014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2014년 《작가세계》로 평론 등단.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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