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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소시집/강시현/지나간 것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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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강시현
지나간 것들
둥근 것이 좋다는 믿음은
뾰족한 것에 찔려 통증을 키우면서 진화한다
익숙한 것들과 자주 부딪히면서
해는 저물고 어둠은 깔리고
가까운 생명과 자주 부대끼면서
날은 가고 한 생은 닳는다
12월의 찬 것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하늘 아래 엎드려 있고
오랜 벗과 술 한 잔 생각나는 밤에도
지나간 것들은
더 큰 소음과 무성한 소문을 먹고
역겹게 위대해진다
과묵한 세상의 주인들 뒤돌아 앉아 슬픔에 젖고
거대한 바다 끝없는 갈증에 하늘로 출렁인다
해묵은 것들은 어두운 먼지를 품고 졸고
새로운 것들은 연한 싹으로 혹한의 빙벽을 뚫는다
이름의 그늘
아버지가 소중히 쓰다듬어 지어주신 이름을
평생 쓰고 다니면서
내 이름의 차가운 그늘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상처를 새겼나
어머니가 어질게 살아라 지어주신 이름을
날마다 소비하고 다니면서
내 이름의 따스한 그늘에서
얼마의 생명들이 빛나는 생기를 얻었나
나는 한 세월 이룬 것 없이
다만 눈보라 길을 휘청대며 걸어가네
눈보라 맵게 날려
하얀 머리카락 들추며 겨울은 깊어가고
내 이름아 내 이름아
닳은 구두처럼 부르며
증기기관차 같이 오르막 오르는데
눈보라 뚫는 거친 입김이
시간이 사라진 접성역接聖驛 고요한 피로를 훑으며
어두운 대합실 장작난로 위로 타오르네
보름
달을 보고
자주 치성을 드리던 엄마와
그 달 보고
줄담배 태우던 아부지는
살아 생전 목숨줄이던
너 마지기 전답을 물려주셨다
온갖 상처와 모욕을 둥근 얼굴 안에
가둔 환한 감옥이
퉁퉁 부은
엄마 아부지 몸뚱아리 싣고
이리저리
모난 하늘을 굴러다녔다
아픈 너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끝없이 잃으면서
끊임없이 새잎을 뱉어내는
늙고 구부러진 나무처럼
오래 혼자 서 있어도
너는 정말 혼자가 아니다
한 덩이의 흙이나 바위
비탈을 잡고 버티며 일생을 살아도
신음을 누설하지 않는
늙은 나무처럼
거대한 슬픔에 저며 있을 때에도
너는 진정 혼자가 아니다
아프고 아픈 그대여
머리 위에 얼어붙은 눈보다 무거운 그대의 오늘
네 곁에 나도 마른 잎으로 부서져 아프지만
마른 몸을 부비며
조금의 온기라도 지펴 보내고자
새 잎을 내는 그 날을 위해
너의 고통을 함께 먹고 있다
뼈아픈 고통
밤하늘의 노란 달을 도려내면
캄캄한 세월이 또 오겠네
그물에 갇힌 물고기 퍼덕임이
수평선 아래 해저산맥의 고단한 높이처럼
부질없을 때
우주의 모든 神은 부도덕하겠네
타인의 나이는 내 구겨진 과거와 악수하고
너무 먼 불빛은
사라진 달빛 같아서 캄캄하겠네
차가운 바다에는 죽은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살고
녹지 못한 고통은 검푸른 물결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불꺼진 창에도 철없는 바람꽃은 부딪쳐
꽁꽁 얼었던 강물 다시 바다로 흐르고
바닷가 무덤 민들레 노란 떨림 같은
시름 잊은 한 세월 또 피고 지겠네
▶강시현_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태양의 외눈』.
시작메모
사라지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밤은 낮을
겨울은 봄을
절망은 희망을 꿈꾼다
절규는 침묵을
나무는 뿌리를
죽음은 삶을 잊지 않는다
비탈을 움켜쥔 나무의 억센 균형이
사람의 마을을 떠받치고 있다
퇴화할 때 진화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
내 詩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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