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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소시집/김건영/E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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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김건영
E 외 4편
천정이 감은 눈에 달라붙었다
눈을 뜨면 별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날이야,
내 눈꺼풀을 도려낸 것은
아침이라 불렸다
내가 지면 누군가 이긴다 라고 쓰인
수첩을 가지고 있다 E처럼
행간은 겨울에 발명되었을 것이다
바닥으로 E가 별빛처럼 쏟아지고 있다
꿈속에서 흘린 정액이 구름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쥐고 흔드는 신이 있다
말없이 백묵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녹음의 거대한 칠판이 온통 흰색이 되는 동안
그는 입을 다문 채 자신의 머리를 백묵으로 칠했다
백시白視는 아침의 속성이다
제가 가진 어둠을 바깥으로 토해놓았다
죽어가면서 몸으로 편지가 되었다
배를 가르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삶이 모순이라면 나는 방패가 되겠다
이길 때까지 지겠다
E는 조금 부서진 방패였다
E
어둠에 부풀어오른 창문이 있다 아픈 사람들은 어째서 같은 표정을 지을까 그믐에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검정색 막대기가 있다 어둠이 깊게 어린 날 나는 크레파스를 선물 받았다 이것은 훗날 내가 만날 공포의 종류들 많은 사람이 눈감고 있는 동안에 내가 태어났다 자라는 것들은 모두 한밤중에 그런다는 것 암흑 속에서 빈 약병을 쥐고 흔들면 달그락거리는 검정색 환약 E는 어둠 속에서 내가 쓰는 뚱뚱한 글씨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겠다
믿음을 가져야 해 이 세계의 믿음을 모두 다 파괴할 수 있다는 믿음
이상한 말을 하면 안심이 된다 가령 내 발화에 얼어붙던 사람에 대해서 불을 끄고 한밤중에 어두운 표정을 짓는 사람 그것을 공중에 옮겨 그리던 내 검정 막대기 나의 체온을 덜어내 주던 어두운 공기 손을 뻗으면 내 미지에 걸려 있던 미지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은 얼어붙은 생선 얼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냉동실에서 잠자는 생선 한밤중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리던 성마른 메아리들 무얼 좀 먹도록 해 네가 너에게서 넘치지 않도록 너의 범위를 늘려야만 해 냉장고의 몸속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괴물이고 빛은 허기다
바나나
-蛇傳·6
바라나시 바나나
나 인도에서 머물 때 갠지스 강물에 혀를 담그고 전생의 발음을 연습했죠 바라나시 바나나는 훌륭한 지사제입니다 설사 멈추고 싶다 해도 생은 계속 터질 테지만 사제들이 계속 태어날 테니 안심하세요 화장터 앞에서 바나나를 먹어 보았나요 시체들은 눈앞을 지나 불길에 휩싸입니다 살이 녹아내리고 드러나는 흰 뼈 바나나는 엄숙하게 벗겨지며 말합니다; 육체는 껍질에 불과하다 영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설사를 멈추고 싶습니다
바라 나 시바나 나
시바 신은 좆같습니다 태초에 무언가 좆같은 게 세계의 중심에서 튀어나왔고 마음껏 파괴를 행하고 나서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죠 세계는 시작부터 좆같았습니다 식탁이 날아오르고 가정이 무너지고 국가가 국민을 겁간할 때도 시바 신은 모두와 함께 있습니다 시바 좆같네 하면서요 애인에게 바나나의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보았지만 좆같은 새끼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바라 나 시 바라 나
내 머릿속에는 술집이 하나 있습니다 Bar 나나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쥐고 난동을 부리는 곳 나나는 술을 따라주며 말합니다 나나 Bar! 나 나빠!
술집의 창문을 깨트리고 도망갈 때 뒤편에서 들려오던 외침을 기억합니다 좆같은 시팔놈아 그때부터 열심히 시를 썼지만 좆같은 시팔놈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들었네 어느 날 어머니는 식탁에 놓인 바나나를 보고 말했죠 시가 뭐라고 그런 곳에까지 깃들까요 시든 바나나, 좆같은 바나나를 쥐고 흔들어 봅니다 시든 바나나를 바라봅니다 애인한테 전화로 바다나 보러 갈래 하고 물어보아야겠습니다
바나나 시 바 나나
뇌 주름처럼 구부러진 해변도로 끝에 바나나 市의 Bar 나나가 있습니다 신들이 지쳤을 때 욕설을 지껄이며 찾아오는 곳 인간이 싫어져 찾아온 신들은 얼빠진 원숭이 같습니다 바나나를 쥐고 테이블을 두드립니다 멍든 바나나를 바깥으로 던지면 지상의 사제들이 신음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멍든 지 모르는 몸을 더듬거리며 서로에게 묻습니다 바나나 먹을래 까맣게 된 부분은 상한 게 아니래 이건 설탕이 뭉친 점이야 슈가 포인트라고 해 Bar 나나의 창밖은 바나나로 가득합니다
계절
사거리에 서 있다가 사람이 사람을 실수로 죽이는 것을 보았다 피가 흘렀지만 구름과 바람이 같이 흘러 화창해졌다 신호등은 정해진 색깔을 점멸하고 있었다 눈물을 삼키다 가라앉은 사람도 보았다
덜 떨어진 별자리가 하늘에 떠 있다 이름을 부를 때면 입에 간격이 생긴다 선분 같은 걸 공책에 그리고 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네 번째 이름을 스스로 지어 보면서
넷이 모여 하나가 된다니 이상합니다 집이라는 것이 생길 것 같다 공포에 하얗게 질린 바둑알처럼
계절의 담장을 주인 없는 고양이가 걸어서 통과한다 어려지거나 늙어가면서 무늬를 갈아입고서 골목은 여전합니다 집을 둘러싸고 있다
방은 나를 먹으며 나를 견디고 있다 포위라는 말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벌레와 함께하는 잠이 있다 새까만 벌레들이 내 몸을 누를 때 인간도 외골격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나를 미워하는 것은 좋았다 내가 눌러 죽인 벌레들을 생각했다 벌레의 안쪽은 부드럽고 따듯하겠지 그것들은 밉지도 않았는데 죽이고 말았다 잠,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내 몸속 사람의 계절이다
스프링
줄넘기를 하다가 넘어지면 봄은 빠르게 지나간다 일어나 보면 이듬해 봄 놀이터는 천천히 줄어든다 억눌린 표정으로 스프링, 자라나는 구역질을 막아 보았지만 스프링, 주머니 속에서 튀어 오르는 동전만큼 건강하게 자라난다 신발주머니를 잃어버린 표정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내 속에는 어른이 자라고 있다 네가 때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잘 들어본 적 있니 꼭 한 사람에게 배운 노래, 같은 버릇을 누가 양손에 쥐여 주었지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는, 스프링
흰 화약들이 공중에서 부풀어 오른 목련의 밤 치마의 끝을 말아쥐며 이리 오렴 신선한 죽은 과일을 줄게 밤의 가로수들은 말한다 어른이 되면 머리 위로 나무가 자라지 검은 손이 나무 속으로 새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른들이 자라서 결국 무엇이 될지 알고 있다
어른들의 앙다문 입에서 치아가 부서진다 말하는 어른들의 입가에서 가루로 날리는 것을 봄눈이라고 썼다 고장 난 시계가 침을 흘리면서 자정을 가리켰다 키 큰 아이들과 등이 굽은 어른들의 그림자가 공평해진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악을 지르며 거리를 고장 나게 만들었다 밤은 어른들의 눈 밑을 화장해주었다 몸을 구부렸다 펴면 너는 선량한 어른이 되는 거야 스프링, 봄에도 겨울에도 작동하는 스프링,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스프링,
▶김건영_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작메모
공포를 넘어 공포에 대해 기록하기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비 오는 땅의 극지에 가보고 싶었다. 맑은 날에 앉아서 비를 바라보고 싶었다. 혹은 빗속에서 해가 들고 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지금이 아닌 쪽으로 가고 싶다. 이 공포에서 다른 공포를 읽고 싶다. 이러한 열망들이 단단하고 어두운 공기를 보게 된 계기일 것이다. 우주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우주에 빈 공간은 없다. 비어있는 곳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찬 공간이다.
어두운 공기를 만져본 사람들은 안다. 그것은 질감을 가지고 있다. 공기가 단단해지는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 고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체는 불변의 물질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분자구조가 단단하고, 아주 느린 변화를 겪을 뿐이라는 말. 경계는 인식체계에 따라 달라진다.
공포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경험했던 공포는 무척 다양했다. 공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타인의 공포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실 쓴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공포 앞에 직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공포를 넘어서 다시 공포에 대해서 기록하기. 기록된 공포가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라는 공포. 나의 공포에 대해서 쓴 시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것 또한 공포로 기록될 것인가. 이것은 모순의 연속이다. 나는 읽히고 싶으며 읽히고 싶지 않다. 무엇을 쓰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공포에 질린다. 하지만 쓰지 않는 삶 또한 공포다. 알 수 없는 것들을 검정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한낮에도 검정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 공포들을 활자로 옮겨 대낮의 빛에 그림자를 달아주는 일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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