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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신작시/윤석정/말 못할 말2-유람선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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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윤석정
말 못할 말·2
―유람선
오후 내내 반쯤 언 강을 바라보던 그가 신발을 벗고 웃옷을 벗었다 난간에 옷을 걸쳐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강바람이 살갗을 긁어댔다 절망의 멱살조차 잡아본 적 없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덜 깎인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주 느리게 손이 떨려왔다 유람선이 대교 밑을 느리게 지나갔다 국적 불명의 음악이 잠시 크게 들렸다 작아졌다 그는 도돌이표처럼 떠도는 음악 너머를 생각했다 유람선이 갈 수 없는 그 너머에서 어떤 이들의 울음은 노래가 되고 눈물은 얼음이 되었다 그는 뻐근해진 목덜미를 매만지더니 먹구름이 점거한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음표 하나가 그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눈을 깜박여도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제히 맨몸으로 떠나왔을 음표들이 흩날렸다 건반처럼 강의 이마를 흑백으로 수놓았다 그의 거뭇한 얼굴에 매달린 음표들이 눈물을 내밀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신발을 신고 웃옷을 입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다 유람선이 도착한 선착장으로 느리게 갔다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드는 음표들이 그를 따라왔다
영란이 할매
영란이 집에 불귀신이 붙은 걸까
밤늦도록 불길이 잡히지 않았어
영란이가 주저앉아 둥글게 몸을 말았어
난생 처음 불이 가슴으로 타들어간 나는
영란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어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영란이 집을 둘러쌌어
세숫대야 바가지 양동이 가릴 것 없이
냇물 담아 이고 지고 날랐어
할매는 저녁밥을 안치고
잠깐 아궁이에 앉아 졸았을까
싼 불이 무명 치마에 옮겨붙었을까
숯처럼 새까매진 할매가 앉은 자세로
잿더미가 된 부엌에서 실려 나왔어
내 가슴이 다 탔을까
자꾸 눈이 맵고 따끔거렸어
영란이가 땅으로 꺼진 듯 사라졌어
며칠 결석한 영란이한테 탄내가 났어
윤석정_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페라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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