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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집중조명/구모룡/꽃피는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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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구모룡(평론가)
꽃피는 그늘
―전다형의 시세계
2002년 등단한 전다형이 첫 시집 『수선집 근처』를 발간한 것은 2012년이다. 과작의 시인이지만 첫 시집을 통하여 “생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연필에 대하여」에서)는 시적 의지를 표현하였다. 시인이 말하는 생의 역사는 몸과 마음을 지닌 구체적인 삶의 과정이다. 삶에 내재한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면서 화해와 신생을 탐문한다. 「청어를 굽다」 연작시는 “가시 속에 숨은 사랑”을 찾아가는 간절한 자아의 도정을 잘 그리고 있다. 성급하게 화해에 이르는 서정적 추상을 회피하면서 상처의 뿌리를 되묻고 덧난 상처를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다형은 상처와 치유라는 시적 의의를 인식한다.
특집 시 5편은 “사람책”이라는 부제를 통하여 시적 의도를 인간학이라는 맥락으로 확대한다.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을 극복하는 삶의 과정을 보다 폭 넓게 천착할 것이라는 천명으로 보인다. 이는 기왕에 보인 자기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과 무연하지 않다. 상처의 기억을 반추하면서 일상적 삶을 돌아보고 존재의 조건과 사람의 무늬를 두루 살피려는 의지이다. 먼저 「감꽃나무의 전언-사람책」은 제목의 “감꽃나무”가 “천연기념물 492호이고 경남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576-1번지 소재”임을 명시한다. 고향 마을에서 오랜 수령을 간직하고서도 열매를 맺는 감나무로 짐작된다. 시인은 이 감나무를 매개로 어두운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심장마비로 일찍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과 반복의 기억은 “반쯤 주저앉은 사랑채” 마냥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죽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눈 어둡고 귀 먼 일가친척들”에게서 “띄엄 띄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을 품지 못한 빈 집”은 이미 폐허에 가깝다. 아버지 사후의 가족사도 그리 순탄하지 않다. 큰오빠는 “대처로 떠돌다 아버지 나이 겨우 넘기고 감꽃나무 아래로 한 줌 재로” 지나쳤다면 출세한 작은오빠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다. 남은 가족들은 “마음 깊숙이 묻어둔 숫돌”을 꺼내거나 “이 빠진 가문”을 한탄한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펄펄 슬픔이 살아 날뛰는 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시 속의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표제인 “감꽃나무의 전언”이라는 말은 미묘하다. 이미 시인은 첫 시집에서 “가문의 서러움”(「537번지」에서)을 전한 바 있다. 또한 「아버지의 잔」, 「달팽이」, 「노을」, 「폐선」 등을 통하여 기억 속에 침전된 불행의식을 들추어낸 바 있다. 가족사에 내재한 상처를 반복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상처의 깊이와 더불어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감꽃나무의 전언”이 그것이 아닐까.
상처에 예민한 시인은 “그늘”에 민감하다. 삶의 바탕을 “그늘”로 이해하려는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풍파를 견디면서 감꽃을 맺는 나무와 같이 시인은 삶의 그늘을 감내하며 꽃을 피우려 한다. 물론 시인이 상처의 기억에 고착된 것은 아니다. 상처를 거름 삼아 새로운 생성의 자리를 만들려 한다. 상처와 고통은 존재를 연민과 절망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연민에 빠진 자기와의 결별을 통하여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확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경험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확대한다.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상처와 거리를 만들면서 넘어서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가령 「도마와 왼손의 자세-사람책」과 「물집 한 채-사람책」은 일상 속에서 입는 상처를 화해의 지평으로 이끄는 과정을 진술한다. 4연으로 구성된 「도마와 왼손의 자세-사람책」는 각각 도마와 칼, 칼질하는 오른손과 왼손의 배려, 온통 힘 자랑 판인 세상사, 왼손의 위상과 가치 등의 내용을 내포한다. 1연은 도마에 박힌 옹이를 하현달에 비유하는 데서 화해를 향한 시적 지향을 암시한다. 옹이가 칼의 이빨을 빼기도 하는 것이다. 나무의 상처가 칼의 상처로 이전되는 사건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상처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의 관계에서 연유함을 말한다. “무른 도마 순한 결도 숨겨둔 한 수는 있는 법”이라는 구절처럼 상처를 입힐 가능성은 도처에 있다. 그렇다면 만연한 상처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 시적 화자가 2연을 통하여 제시한 대로 오른손과 왼손의 비대칭 관계를 조화로 견인하는 것이 아닐까? 권력관계와 투쟁이 일상의 흐름이 된 현실에서 시적 화자는 “왼손의 배려”가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다.
도마 위 날카로운 칼끝 앞에서
칼끝의 보폭을 잡아준 왼손의 몫
수저를 들 때도 다림질을 할 때도
악수를 건넬 때 소매 끝을 잡아줄 때도
가위질 톱질 바느질 올 곧은 방향을 잡아줄 때도
다정한 왼손은 언제나 묵묵한 그늘의 자세
오른 손이 세운 탑신의 높낮이는
왼손 기단석에 달렸다
개미구멍에 둑 무너진다
무딘 칼이 피를 부른다
지금은 뜸의 시간 무딘 정신을 벼릴 때,
3연에서 시적 화자는 “그늘의 자세”라는 말에 도달한다. 드러난 오른 손이 아니라 그늘과 같은 왼손의 수행성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성은 시의 끝에 쉼표를 찍은 대로 세계로 열려 있는 실천 의지로 표출된다. “그늘”의 이미지는 한처럼 상처의 기억과 고통의 체험들이 승화되어 은근한 삶의 무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임우기는 그늘을 “삶의 고통을 자기화함으로써 문득 다다르는 지극한 경지인 무위의 존재”라 한 바 있다. 전다형에게 그늘은 상처의 시학이 도달한 하나의 경계이다. “구김살 없는 햇살이 서먹한 두 사이를/구석구석까지 공평하게 펴 바르자/그늘이 바짝 줄어들었다”라는 구절로 맺고 있는 「물집 한 채-사람책」도 “그녀와 나 사이”에서 생긴 상처가 그늘이 되었다 치유되는 과정을 말한다. 수삼을 구입하면서 상처를 떠안게 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시는 수삼을 썰다 생긴 “물집”이 조금씩 묽어지는 현상에 빗대어 상처가 회복되는 경과를 서술한다. 그녀와 나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는 수삼을 썰어 말리는 나의 행위를 통하여 서서히 치유된다.
첫 시집 『수선집 근처』의 해설에서 나는 전다형의 시세계를 “명랑한 슬픔”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시적 주제가 슬픔, 상처, 고통, 어둠과 같이 무거운 내용을 지녔지만 시적 어조는 이러한 무거움에 눌리지 않고 명랑함을 견지한 데 연유한다. 경쾌하고 직설적인 어조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시인은 삶의 그늘을 승화하고 슬픔을 명랑으로 상승시키는 정서를 표출한다. 「검문소-사람책」은 “참, 나를 증명하란다”라는 자조적 발화로 시작한다. “검문소”를 “투명인간의 세계/일방통행, 청맹과니들의 관할 구역”으로 규정한 시적 화자는 존재를 대신하는 각종 표지만 남는 가상의 현실을 쾌활하게 풍자하며 “미투리 발싸개보다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린/지금 여기에 기투企投, 호모 사케르가 되어/거듭 차연과 거듭 리좀과 거듭 미끄러짐으로/한없이 연기되는 생, 생”이라고 의미심장한 발화를 이어간다. 언제든지 벌거벗은 생명으로 배제될 수 있고 존재와 정체의 인정이 지연될 수 있음을 시적 화자는 “검문소”를 통하여 확인하다. 여기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과 학생증과 출입증/플라스틱 마그네틱에만 존재하는 가엾은 나”는 “증들의 지배하에 기호로만 통용”되고 “거래되는 세상”을 자각하고 “철커덕 검문소 차단기 오르고 통과된 육체”라는 구절이 지시하는 생체권력을 인식한다. 그리고 “지금地今止禁 여기 있는 나는 증證에 먹히고/그 밖 어디에도 없다”라고 언어유희를 구사하면서 감시체계가 일반화된 현실을 냉소한다. 「검문소-사람책」에 이르러 자기표현을 이월하여 현실 인식에 이르는 시인의 시적 지평과 만나게 되는데 그만큼 시인의 관심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지기-사람책」은 「검문소-사람책」과 같이 확장된 인간학적 계보를 형성하는 시편이다. “종”이라는 씨니피앙에 해당하는 한자어 다섯 가지-“種鐘鍾從終”을 배치하면서 이를 인간의 사회적 존재론과 연관시킨다. 다분히 심각한 주제를 언어유희로 명랑하게 중화하는 시법이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는 종種鐘鍾從終이다 범종에밀레종성당종학교종알람, 순종잡종희귀종, 조계종천태종태고종, 종의 차이만 있을 뿐 차별은 없어야 한다 종종, 종적縱的을 둘러싼 고래 등 싸움에 죄 없는 새우 등 터진다 약한 자에 한없이 약해지고 강자에게 한없이 강해지는 자, 가장 낮아서 가장 높이 오른 종지기는 십자가에 못까지 박혔다
일종의 말놀이 시라고 해도 될 것인데 “가장 낮아서 가장 높이 오른 종지기는 십자가에 못까지 박혔다”라는 구절에 시적 지향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인간의 현실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상적이고 구경적인 삶의 모습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는 모방 대상이기도 하지만 부재의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인의 전망은 어둡다. 이러한 회의주의에서 시작의 역동성과 계속성은 유지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만장 앞세우고 저승길 앞장서는 요령소리는 종種의 기원”과 같은 구절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비관은 서정의 뿌리와 같다. 단절과 거리를 만드는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어보려는 지난한 몸짓이 서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생부터 을”이라는 마지막 구절의 전언은 그늘의 시학 혹은 그늘의 인간학이 자리한 바탕의 의미라 하겠다.
전다형은 지금 어법과 내용에서 시적 확장을 기도하고 있다. 상처를 승화하는 그늘의 미학에서 사회학적 인간존재론에 이르는 시적 경로를 보인다. 시인이 최근에 보인 시도들이 보다 구체화되어 심각함을 짐짓 명랑하게 발화하는 개성이 더욱 오롯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약력:1982년 <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앓는 세대의 문학-세계관과 형식』,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감성과 윤리』, 『근대문학 속의 동아시아』, 『은유를 넘어서』, 『해양풍경』, 『예술과 생활-김동석문학전집』(편저), 『백신애연구』(편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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