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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소시집/이상아/단풍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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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이상아
단풍
어디선가
샴푸 냄새 실려 올 것 같은
새벽, 공기를 가르고
기어코 넘은 담장 저만치
하마 수줍은 담쟁이
하르르 하르르
바람 따라 살가운 손짓
내려놓고 비우고 버리느라
그림자마저 헛헛해지는
시월, 숨 쉴 때마다
속속들이 스미어드는 빛
그대로 차오름
감나무 소고
불그레하며 지루한 여명 뒤, 두둥
솟아오르는 해가 달구는 창가에 서서
밖의 공기와 마주앉아 아침을 맞는 내 안의 뜨락,
한쪽에 허술한 나무 한 그루, 듬성듬성 주홍색이다.
글자도 아닌 것이 소리도 아닌 것이
감히 감이라고 제 이름을 들이밀며 날 장악하는 시간,
나무는 팔을 뻗고 손을 펴서 제 이름만큼 꼭 그만큼
하늘을 가리며 다가온다.
뭉긋하게 더디게 여무는 듯하다가
한순간 불끈 솟고야마는 저기 저 열 덩어리처럼
어디쯤에선 젓가락 끝에 걸리는 고구마 힘줄처럼 호박고구마처럼
어느 순간 다 익어 속이 뭉클해지며 저 혼자 달뜨는 그것,
다 달아올라 당도 높은 주홍으로 물들며
빛나는 창과 마주앉아 하루의 문을 연다.
잘 익은 사과 반쪽과 막 쪄낸 고구마 한 개로
버젓한 아침상을 차려 놓고도 그저 블랙커피만 들이부으며
한쪽 감나무 성근 가지 사이에서 점점 물렁물렁해지는
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세상사 시큼하며 시원하다가 달달한 면도 없지 않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쓴잔을 마시는 살이와 마주서서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 미궁을 헤매는 마음의 떨림,
한 번의 울림에 우수수
잎이 지면 감은 붉어진다, 관능적으로
또 한 번의 울림에 우수수 수수 더 많은 잎이 지고
감은 더 또렷하게 붉다가 내내 갖고 싶을 만큼 육감적이다가
하염없이 늘어질 것만 같은 시간의 눈금이 창에 부딪치면
툭, 나무가 열매 하나 가만히 내려놓는다.
하염없이 늘어날 것만 같은 공간의 고요가 흐느낀다.
감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쑤욱, 심장 가운데께로 들어와 앉는다.
곁에선 오래된 감이 가만히 숨 고르며 숨이 죽는다.
어느 별의 향기
새벽 4시 반
커다란 공구 가방을 들고
충혈된 눈 비비며 길 건너는 이
밥상 앞에 앉아
물 말은 밥 몇 숟가락 입에 넣고는
그냥 억지로 삼키는 이
지끈거리며 타들어가는 머리
질끈 눈 감아 동여매고
도시락 가방 대신 마음 쥐어주는 이
오래 전 써 놓은 사직서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금수저 갑질 앞에서는 무조건 견디는 이
가슴 가슴을 쓸어 모아
보일 듯 말 듯 품을 때
몰래 촉촉해지며 반짝이는 네 눈빛
고요한, 풍경
내 눈길 하나로 금 갈까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너
이래도 되느뇨
시월아
가을아
하늘아
바람이 닿은 자리
바람의 알몸을 보았니?
깊은 울음 참아 제 속을 긁어
텅 빈 방 한 칸 갖고 살면서
전신을 휘돌아 훠이 훠어이
시간과 공간을 흘려보내며 사는
바람의 표정을 읽었니?
손바닥 툭툭 털며 일어나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며
떠나보낸 자리에서 다시 맞는
세월의 보금자리 걷어들며 고르는
바람의 숨소리를 들었니?
들숨과 날숨 엇갈리는 순간
한 겹씩 벗으며 사라지는 뒷모습
그리운 자태 빛나는 머릿결
별 같은 눈 속 고운 흐느낌
<시작메모>
10월이었다. 가을비 내리다 멈춘 월요일 새벽, 낮은 담장을 넘은 담쟁이 몇 잎을 보았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붉게 물들어, 그 끝 얼마만큼은 말라 꼬부라진 모습. 그 모습은 사랑으로 부풀어 오르는 풍선, 또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떠오르는 풍등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때마침 보일 듯 말 듯 살포시 흔들리는 담쟁이. 그 모양새는 분명히 본 적도 없는 상대의 실루엣만 생각해도 떨리는, 아니, 상대의 이름만 생각해도 설레며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르는 여인의 얼굴 같았다.
바람 불 때마다 잎은 지고, 갈수록 성근 그물 같은 무늬로 남는 담쟁이. 내려놓고 버리느라 고단했다는 듯, 갑작스레 당도한 햇살 한 자락에 생기를 되찾는 모양….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끼적였다. 빛은 언제나 사랑이어서 따스함을 되찾아주고, 따사로움[溫氣]은 언제나 생명이어서 마음의 향기를 되찾아주고, 진솔한 마음[心香]은 언제나 맑고 싱싱한 물이어서 속을 축이고 채우며 다가오는 거라고. 차오르는 거라고.
**약력:1990년 계간 《우리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로 된 집』, 『그늘에 대하여』 외. 산문집 『조용히 사랑하고 싶다』, 『내가 밤보다 새벽을 더 사랑함은』, 『아침 이슬이 땅을 신선하게 하듯이』. 중편소설 「고백」. 단편소설 「흔들리는 꽃」, 「이영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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