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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소시집/윤인자/우리 집 배나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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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윤인자
우리 집 배나무
배나무 그루터기 톱날에 베어져
힘없이 땅바닥에 드러눕는다
남은 밑둥 언저리에 운지버섯 층층이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있다
밀식재배로 욕심껏 촘촘히 심었다가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엉겨, 솎아내니
여기저기 나뒹구는 땔감들
칼바람에 동상 들고 태풍에 팔이 부러지면서도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대학까지 가르쳤다
땡볕에 데이고 까치에게 물어 뜯겨도
묵묵히 가장 노릇을 다했는데
이제 쓸모없다고 톱날을 들이대자
마지막 땔감으로 제 몸까지 내놓는다.
호박
비탈진 밭 귀퉁이 두엄자리에
저 혼자 꽃피우고
온 들판 쏘다니더니
사생아 같은 호박 한 덩이 낳았는데
겨울이 되어도 거두어 가는 이 없다
탯줄도 못 끊고 마른 탯줄 거머쥐고
여름날 당당하던 청춘은 어느새
검버섯 군데군데 피어나는
돌아갈 곳 없는 노숙자
된서리 맞으며 꽁꽁 언 채
외로운 밤을 맞고 있다.
손
과수원에서 일 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잠깐 방심하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짚은 손목 삐끗 접질렸다
힘을 쓰고 손을 쓸 때마다 인상이 써지고
아이고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식구들의 식사며 빨래며 청소하면서도 몰랐다
온갖 잡일을 시키고 부려 먹으면서도 알지 못했다
노동판 불도저 포클레인 같은 천덕꾸러기 일꾼
아프거나 다쳐도 안 되고 쉴 수도 없는
내 손은 내 것이 아니다
농기구이거나 세탁기이거나
행랑채의 머슴이다.
깨어진 거울
빈집 담벼락 밑에 버려진 거울조각 하나
하늘도 깨지고 들여다보는 얼굴도 산산조각이다
젊은 날 거실 벽에 걸린 저 거울 앞에서
출근 전 넥타이를 매었을 것이고
시장갈 때 낭자머리 빗어 비녀를 꽂고
선 보러 나간 누군가는 온갖 폼을 잡았을 것이다
추억할 수 있는 가족들의 모습
그런 세월들을 어디다 걸어두고
날카로움이 곤두서는 습관
마음이 찔린 것처럼 아파온다
깨지고 난도질당한 채
성한 게 없는 세상을 비추고 있다.
밥값도 못하고
매실나무 심은 지 5년째지만
퇴비를 주고 영양제를 뿌리고
공을 들이는데 밥값을 못한다
그저 키와 몸집만 키운다
베어버릴까 하다가 한 해만 두고 보자
올해도 눈이 시리게 꽃은 많이도 피웠지만
매실 서너 개가 전부다
봄만 되면 조급한 마음에
꽃 진 자리 들여다본다
눈을 부비며 들여다보고 또 본다.
받아만 먹고 은혜를 모르는 의리 없는 나무
화가 나 톱날을 밑둥에 들이대다가
한 해만 더 지켜보자며 톱을 거두는데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시작메모>
과수원에 나무를 심어 키우고 가꾸면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모습에서 시어를 배운다. 새싹이 트기 전 가지치기를 잘 해야 가을에 좋은 과일을 수확할 수 있다. 꽃이 진 후 열매를 솎을 때는 적절한 사이를 두어야 튼실하고 맛있는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시를 쓰는 일도 이와 같다. 나무의 가지치기는 시의 연을 만드는 것이고 , 간격을 두고 열매를 솎아 내는 것은 시의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열매에 욕심을 부리다 보면 일 년 농사를 망치듯, 시어 하나에 미련을 두면 시 전체를 망치는 수가 있다. 농부의 손길 따라 튼실한 나무가 되고 정성과 노력 창작으로 좋은 과실이 맺히듯, 시 또한 감성으로 많이 읽고 다듬고 손질하다 보면 좋은 시가 탄생하는 것을 경험한다.
과수원은 삶의 터전이어서 아이들의 대학나무였고 우리 가족의 의식주였다. 뿐만 아니라 내 시의 현장이다. 배꽃 피는 봄날에 찾아오는 벌 나비, 여름날 목청 높이는 매미와 청개구리, 열매를 거두기도 전에 먼저 맛보는 버릇없는 까치, 비둘기 동박새 나무 그늘 아래 아기자기한 풀꽃들, 이 모두가 시의 종자가 되어준다. 농부에서 시인으로 지역 봉사자로 철마다 우리 지역 섬들을 구석구석 여행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바람과 해와 달, 별, 자연을 보고 느끼며 대화를 나누고 그 이야기들 과 섬들의 모습에서도 내 시의 터전은 넓어졌다. 하지만 좀처럼 시에 대한 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언제나 목마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과수원이라는 시의 바다에 안테나를 길게 뽑아 세우고 방전되지 않게 충전을 한다. 문예지와 시집을 읽으면서 빨강과 파랑으로 밑줄을 그어본다
사람들과 소리 없는 대화로 소통하는 문학의 꿈을 부화하고 키우면서 농부에서 시인으로 내 시의 텃밭을 일궈가며 전원에서 꿈을 키운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나의 일상이며 나의 삶이 숨 쉬고 있는 존재의 집이다.
**약력: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에덴의 꿈』, 『바다로 길을 놓는 사람들』(공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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