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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몽구

유령의 여자

십수년 전 체코 여행길에 만났던 여자를
북적거리는 압구정 방면 전철 칸에서 다시 만났다
모나리자를 닮은 조브장한 귓볼에
요하네스 페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광고판 속에서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쟁취하는 것입니다!”
빛바랜 늙은 진주를 떼어내고
이번에는 값비싼 보석 장식을 단
압구정 성형외과의 모델이
수술 칼로 한껏 크고 맑게 만든 눈으로
금방이라도 핀업 광고판에서 뛰쳐나올 듯
상체를 내 쪽으로 돌리고 있다

흙수저도 얼마든지 갈고 닦아
반질반질한 금수저로 만들 수 있다고
너저분한 죄목도 전화 한 통화면
무죄로 세탁할 수 있고
무대 뒤에서, 입상자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서슴없이 어깨들을 겹치며
가슴을 드러낸 성추행범처럼 밀착해 오는
승객들의 어깨 너머로
광고판 속 무국적의 핀업걸이
가청 주파수를 넘어 들리지 않는 말
큰 눈으로 들려주고 있다

인디언 섬머가 끝난지도 모른 채
어깨를 하얗게 드러낸 광고판 속 여자
쿨룩거리면서도 거절할 수 없이 건네는
큰눈 만들기, 주걱턱 깎기, 뱃살 흡입술, 예쁜이수술…
성형 품목들을 한 아름 받아들고
인간 밀림을 가까스로 빠져 나간다
그렇게 삽시간에 퍼지는 바이러스를 피해
맥도날드 햄버거로 통하는
압구정 전철역 통로를 따라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들이
걷는 법을 까맣게 잊은 채
유령처럼 서로를 떠밀며 가고 있다

변명

일주일이나 길게 이어진 한가위 휴가 끝
자기 소개서 쓰기를 가르치는 교실은
아직 완강하게 남은 후유증으로 뻐근하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은
바다 밖으로 골프 여행을 떠나
호텔 방에 플라스틱 차례 상을 차렸다는데
바짝 좁아진 취업문 앞에서
면접을 코앞에 앞둔 아이들은
너절한 소개말들을 싹둑 자르거나
급조한 경력을 덧대느라 시간을 짓이긴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사르트르를 말한다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지만
요새 돈으로 십억을 훌쩍 넘는 상금을 뿌리치며 거부했다고
일생 동안 지하철역 앞 노천카페에서
값싼 커피를 마시며 고료 없는 글을 쓰면서도
결코 글과 양심을 바꾸지 않았다고 일러준다

적어도 노벨상은 밀실에서 매끈하게 다듬은 글이 아닌
햇빛 한 줌 받지 못한 채
지하 수백 미터의 광산에서 금을 캐는
광부들의 속엣말을 들려주는 파블로 네루다
파리의 에펠탑 아래서 노래와
식민지 알제리에서 외치는 자유의 요구는 다르지 않다고
의사 면허를 벗어던진 채 무기를 든
검은 피부 흰 가면의 작가
프란츠 파농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묵묵히 외치던 사르트르의 마른 얼굴을 보여준다

모름지기 책을 읽은 자는
자신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가을 하늘을 닮은 아이들의 눈을 본다
컴퓨터 모니터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자기 소개서를 쓰고 또 쓰지만
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낙인 찍혀 등을 돌리는 아이들에게
골프피 아닌 월급을 제대로 줄
일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면접 성적표를 거꾸로 든 채
연방 대포폰에서 흘러나오는
출처 모르는 소리들에 귀를 모르는
면접관의 눈빛을 읽지 못한 채
아이들은 오늘도 잠을 반납한 채 글을 고친다
문득 이리 자르고 저리 구부리며
달디단 말들로 가득 채우느라
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수정펜 너머 아이들의 글을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압핀으로 눌려 있던 나비들
파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약력:1977년 월간 《대화》로 등단. 시집 『개리 카를 들으며』, 『봉긋하게 부푼 빵』, 『수종사 무료찻집』, 『

칼국수 이어폰』등. 연구서 『모더니즘과 비판의 시학』, 『한국 현대시와 욕망의 시학』 등. 계간 《시와문화》 주간. 한양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