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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신작시/나혜경/건너가는 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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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나혜경
건너가는 말
원시가 시원이 되고 퇴사가 사퇴가 되고 평화가 화평이 된다면,
시집이 집시가 되고 선생이 생선이 되고 여행은 행여가 되고 살자가 자살이 되고 삼십이 십삼이 된다면,
뜨거운 혀 위에 말랑하고 축축한 혀 아래에, 방금 도착한 이야기와 오래 전 도착하여 가물가물해진 이야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를 굴리며
곰곰 생각한다
이 두께도 없는 것을 맛도 없는 것을
어디로 건네줄까
아무 말도 없이 가을은 겨울에게 건너가고
다시 온 가을은 죄도 없이 혀가 짧아졌다
건너가는 말은
몇 바퀴의 생을 돌아 죄를 빼거나 더하여 낯선 얼굴로 다시 건너온다
고비라는 스승
무엇을 가지고 떠나야 합니까?
입에 맞는 음식을 찾던 입을 꿰매고
익숙한 소리만 듣던 귀를 메우고
다정한 당신의 눈빛을 미워하며
폭신한 침대를 사랑하는 등을 접고
달콤한 카페를 찾던 발을 자르고
새로 산 원피스와
벽과 기둥을 불태우고
아무것도 기댈 것 없이
뛰는 심장마저 놓아주고
그렇게 완전하게 완성된 표정을 쥐고 떠나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 33.
**약력:1992년 《문예한국》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무궁화, 너는 좋겠다』, 『담쟁이덩굴의 독법』,
『미스김라일락』.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금요시담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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