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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신작시/권기덕/라이트light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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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권기덕
라이트light
전등가게에서 전등이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검은 거미가 한 마리씩 깨어나 웃었다
웃음소리에 빈 의자들이 들썩거렸다
빛과 빛이 밀어냈던 자리,
검은 거미는 검은 거미를 잡아먹고
점점 더 큰 검은 거미가 되어가고
거미집을 짓는 대신
어둠을,
어둠 대신
무덤을 짓고 있었다
옆집 전등 가게에 있던 너는
나를 향해 비웃었고
한스 벨머의 인형*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끊임없이 졸면서
종이에 낙서를 했다
전등이 모두 깨진 뒤
검은 거미들은 낙서에 걸려 버둥거렸다
*섬뜩함을 주는 구체관절형 인형으로써 억눌려있는 인간의 성적욕망을 표현함.
라이트wright
길거리에서 버려진 바지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었지 죽은 나비 한 마리가 오른쪽다리 구멍에서 빠져나왔어 누군가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주었지 망치질을 멈출 수가 없었어
간혹 사람들은 침을 뱉었어
바지로부터 자신의 얼굴이 나타나려 했기 때문이지
짐작컨대, 그들은
버려진 바지를 잘 알고 있거나
죽은 나비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본다)
서로 움직이는 동안
망치소리만 남고 관계는 사라졌어
낯선 지퍼에 얼른 동전을 넣었지
버려진 바지 옆에 그림자 두 개가 함께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길어졌지 석양이 내려앉을 즈음엔 바지에 다리를 쑤욱 넣은 뒤 휘리릭 달아나버리는 게 아니겠어? 다음날, 사라진 바지 옆에 또 다른 바지가 다시 남겨졌지만 말이야
바지에서 울음소리가 새나왔지
죽은 나비가 불러준 그 이름이 들렸지
다시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망치를 두드렸지
내 자신도 모른 채
무언가를 쓰듯이 말이야
**약력: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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