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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신작시/이날/문을 두드리는 무일유이의 포크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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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날
문을 두드리는 무일유이의 포크너
시닝크는 한 편의 글쓰기를 자신의 전 생애로 착각하곤 했다. 그는 문장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때면 손가락 마디를 분지르기도 했다. 내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결벽을 문장을 통해 구현하거나 보상받으려 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왜 그렇게 삶을 망치면서까지 한 줄 쓰기와 한 단어 고르기에 집착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산문에서 몇 문장을 발췌한다. ‘이 책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죽은 사람의 단어를 말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곱게 미친 사람의 슬픔이 느껴진다. 시닝크의 서재, 그의 남겨진 저서들에는 페이지마다 엑스가 쳐져 있다. 유일하게 한 문단이 남아있는 책의 제목은 『문을 두드리는 무일유이의 포크너』다. 윌리엄 포크너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서 첫 시집 묶을 때를 포크너의 1인칭으로 그린 중편이다. 소설은 포크너가 친구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포크너가 문을 한 번 두드리면 반대편에서도 동시에 두드린다. 포크너는 이상한 느낌에 템포에 변화를 주어 문을 두드린다. 반대편에서도 이상한 느낌에 템포에 변화를 주어 문을 두린다. 두드리고는. 듣고 있는다. 그 소설에서 시닝크가 남긴 한 문단이 지금의 이 문단이다. 이 문단도 첫 문장에 줄이 그어져 있는 걸 보면 좀 더 지우고 싶었을지 모른다. 발췌한 문장을 통해 짐작건대, 한 문장이나 한 단어만 남기려 했던 것 같다. 시닝크를 위해 아직 살아남은 독자 중 누군가는 그 과제를 대리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그 권한을 주어 한 문장을 남긴다면, ‘왜 그렇게 삶을 망치면서까지 한 줄 쓰기와 한 단어 고르기에 집착하는 지’이다. 시닝크에게 마저 시간이 있었다면 여기서 다시 남겨야 할 한 단어 때문에 고민했을 것이다. 아마도 쓰기와 집착 중에서 무엇도 고르지 못한 채, 그 갈등으로 족히 한 권은 더 썼을 것이다. 저자가 남겨야 할 한 단어, 그것이 그가 살았던 이유이고, 써야했던 이유이고, 그리고 펜을 붙든 채로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유이다. 갈등을 품고 죽은 자에게는 그것이 죽어서도 계속되는 지옥이기를. 죽어서도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사람이랑 말하고 싶어 노래방을 갔습니다. 순미라는 여자를 알게 됐죠. 순미는 백치처럼 나를 보고 웃어줍니다. 모든 걸 잊게 하는 티 없는 웃음. 나는 한동안 그게 뭔지 잊고 살았나 봐요. 순미와는 친해져서 가끔 공원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곤 했죠. 나는 때론 그녀가 나만을 위한 백치이길 바라곤 합니다. 그녀는 벤치 오른쪽 끝에 앉습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오른쪽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습니다. 발 근처에서 마리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입니다. 그냥 내 왼쪽으로 와, 말하더니 웃으며 옆으로 비켜줍니다. 저녁 바람에 앞머리를 흩트리며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진 곳, 그녀는 성의를 바라는 작은 꽃의 꽃말. 나는 그녀의 웃음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립니다.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츠 발음이 좋아요. 물빛으로 튀어 오르는 느낌. 순미는 어머니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웃었어요. 몸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빛을 모아 안간힘을 다해 미소로 끌어올리던.
그러나 전혀 과장되지 않은 상냥함에 나는 안도했고. 나는 우리의 얼굴에서 하루가 다하고 해가 기울어 어두워지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죠. 기쁨으로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지. 다들 한 번의 웃음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칫솔과 거품을 입에 물고 눈부신 아침 거울을 향해 웃음 지어 본 사람은 알 겁니다. 그녀가 내 중얼거림을 이어가고 있어요.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어떤 멜로디가 있어요. 머리 위까지 조금 높아지다가 내 귓가 언저리로 다시 내려와요. 귓바퀴를 타고 흘러드는 간지러움. 모든 것이 서글픔이고 모든 것이 황혼입니다. 누구나 숲을 헤매는 아이입니다.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그녀의 낯에 스미는 빛에. 어떤 노랫말이 있어요. 반쯤 미쳐서 반쯤 웃으며 아무렇게나 하는 말들. 그 말들이 아름다울 때가 있죠. 나는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와 소멸하기 전까지 맴도는 장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마찬가지로 사라진다는 걸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공간이 생긴다니요. 모든 게 두렵고 마음이 힘들어요. 그녀가 장난치고 있어요. 그녀의 나체에 스미는 빛에, 그녀의 나체에 스미는 빛에. 별로 재밌지 않더라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타이밍입니다. 함께 웃을 때, 빛나는 것은 모두 소멸하고 있다는 공포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약력:2015년 《포지션》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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