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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책 크리틱/나금숙/날아가는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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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28회 작성일 17-01-01 18:08

본문

책 크리틱

나금숙






날아가는 빈집



    칼, 자작나무숲이라는 서늘한 제목의 시집을 두 권 내고 또 두 권의 서사 시집, 세권의 역사 동화집을 쓴 안명옥 시인. 안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시 단체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10년도 넘었다. 그도 나도 시퍼런 칼을 부드러운 웃음 뒤에 감춘 터라서(시집을 보고야 알았지만), 멋진 외모와 필력에 왠지 끌리는 감정을 꾹꾹 눌러두면서도 친밀감을 간직하고 살았다. 언젠가 왜 이리 적조하냐고 전화했더니, 일 인 몇 역을 하고 산다길래, 나처럼 구름 낀 날들인가 보다 하고 멀리서 출간 소식과 수상 소식만 들었다. 서사 시집이라니! 소서노라는 역사 속의 매력적인 여인을 현실 속으로 끌어내다니! 나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감탄 속에 그 후로 더 많은 날들이 갔다. 영화 같은 날들이 가고 남은 날들이 다 축복이라고 여겨지는 요즈음. 그의 새 시집 서평을 부탁받게 되었다. 내심 그리운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더위를 무릅쓰고 읽어보니 생각보다 절절하다. 이 사람, 많이 힘들었구나, 그리고 시는 그에게 퍼스나요 하나의 환풍구였구나…….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 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 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자작나무숲」전문



    표제시인 이 작품부터 심상치 않다. 추운 곳에서 숲을 이루는 자작나무가 오히려 활활 타오르다니! 하르트만은 『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미적 대상을 향수하고 관조하는 태도에 대해 논했다. 사람들은 미적 대상도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감각되고 파악되는 실재성을 가진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적 대상은 감각만을 가지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활기가 도는 봄의 교외를 걸어갈 때, 한 사람은 흙이나 나무의 성분이나 가치를 생각하지만, 또 한 사람은 신록과 흙냄새와 먼 아지랑이에 흥미가 있다. 이때, 그들의 감각인상은 같으며 이 인상을 주는 사물들도 같음에도 이 인상이 매개하는 대상은 전혀 다르다. 봄날의 풍경을 미적으로 향수하는 자나 그것을 실천적으로 평가하는 자는 단순히 감성적으로 주어지는 실재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 실재적인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며, 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 이것이 사실은 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사태 자체로 돌아가라”는 후설의 현상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 대상이 의식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현상이라고 간단히 말한다면 시인의 의식은 여기 자작나무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선입견이 없는 새로운 인식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자작나무를 축축해진 길바닥에 저도 축축해져서 눕는 달이라고 알지 않았다. 그렇다. 안명옥 시인 외에는! 자작나무는 그러니까 달이다. 그것도 젖은, 젖어서 누워버린 달이다. 그러면서 시인에게 자작나무숲은 눈빛이 살아있는 채로 웅크린 뜨거운 짐승, 어둠의 자식인 것이다. 더 나아가면 시인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거지거나 웅크린 슬픔덩어리인 것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묘하게 아우른 자작나무숲이 뜨거움과 침잠을 모두 가진 양극의 시인 자신임을 눈치챌 수 있다.



안락한 의자에선 상상력이 안 나와
불안정한 상태가 신의 축복이야



물감을 짜먹으며 테오에게 편지를 쓰던
충혈된 두 눈을 기억하는 의자



시간을 저축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면
영원히 사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면



고흐의 체온을 기억한다 고흐의 무게를 알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와
다락방 작은 창문을 가진 방에서
고흐가 귀를 자른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 의자



겨우 주어진 이 한자리도
시간이 다되면 내줘야 하는 의자



                                                                      ―「고흐의 의자」전문



    이 시를 읽자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시인들이 인간의 삶을 가볍게 하려고 애쓰는 한, 그들은 비참한 현재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거나, 과거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서 현재가 새로운 색깔을 띠도록 돕는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스스로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역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생각은 시인을 영화롭게 하는 문구는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거짓의 가장 고귀한 힘이며, 그것은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는 니체적 입장에서 이 시를 살펴볼 수가 있다. 이 시의 시인은 안락한, 안주하는 삶에서는 상상력이 안 나온다고, 불안정한 상태가 축복이라고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속삭인다. 시간을 저축하거나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사기를 친다. 그렇게 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물감을 짜 먹으며 동생 테오에게 돈을 부쳐달라는 편지를 쓰다가 죽어간 고흐는 우리 곁에 체온과 무게와 목소리로 살아있고 현존한다…… 현존existence한다고? 그런 것이 있긴 있었던가? 죽은 뒤의 헛된 영예에 걸맞게 사람들은 살아 생전 비참했던 고흐의 아우라에,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다락방 작은 창문을 가진 방으로 목가적인 환상의 색을 칠한다. 심지어는 정신착란으로 귀를 잘라버린 것도 이해한다는 헌사를 그의 그림 앞에서, 고흐를 형상화한 의자 앞에서 숭배와 함께 바친다. 그러나 시간이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고흐를 형상화한 의자로 자신을 대변한 시인 자신마저도 이 냉혹한, 아니 그지없이 무심한 시간 앞에 이 소소한 권력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여자가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고
그림자만 깊어진다
벽이 기댈 곳은 허공뿐
벽 앞에서 목놓아 울고 가는 바람 한 줄기



푸른 숨결 돌지 않는다
더운 피가 돌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이 지상에서
자살은 꿈꾸지 않겠다



산과 강물처럼 불과 물처럼
열기와 냉기를 가진 술처럼
남자와 여자처럼
상극이면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들



거짓말이 느는 벽보를 얼굴에 붙이고
질끈 눈감아버린 벽
벽아, 눈을 뜨라 눈을 부릅뜨라
벽을 차고 가는 빗방울들



가까스로 버티기 위해
무너져야 할 것이 불안하다



누군가 여자 몸에서 벽돌 한 장 또 빼간다
망가지면서 깊이를 얻기도 하고
모든 것이 붕괴될 때 새로운 것이 태어나듯
벽은 상처, 균열의 돌을 넣고 더 단단하게 만든다



                                                                                                   ―「벽 」전문



    직설화법으로 절망을 나타내고 있는 이 시는 제목조차도 ‘벽’이다. 은유나 상징으로 에둘러 말하기에는 현실이 그야말로 ‘벽’인 것이다. 시인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그야말로 막막하다. 겨우 의지하고 있는 벽은 기댈 곳조차 없어 허공을 기댄다. 벽 앞에서 목놓아 울고 가는 것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려니…… 자식이 아니고서야 이런 사태일찌언정 목놓아 울기까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지상에서의 삶을 피하려고 자살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운명을 끌어안겠다는 것이다. 실로 ‘아모르 파티’인 것이다. 상극이면서 한 몸인 양, 갈라내지 못하는 모순을 얼마나 많이 건너왔던가! 거짓말을 벽보처럼 붙이고 눈을 감아버린다. 생존을 위해서 정체성을 속이는 것쯤이야, 혼란쯤이야. 여기서 나타나는 허무는 비존재가 아니라 무가치인 것이다. 더 이상 우월한 가치들이란 미명하에서 삶의 가치 박탈이 아니라, 우월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 박탈이다. 여기서 가치 박탈은 삶에 의해서 포획된 무가치를 의미하지 않고 가치들, 우월한 가치들의 무를 의미한다. 삶은 여기서부터 벙어리이다. 소경이다. 아니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벽은 눈을 감아버린다. 벽아, 눈을 부릅뜨라고 벽을 치고 가는 빗방울조차도 시인의 의지의 무를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버티기 위해 무너진다고 말한다. 원래대로라면 버티기 위해 무너지면 안되는데 말이다. 누군가 허공에 기댄 벽인 여자의 몸에서 벽돌 한 장을 또 빼 간다. 상처와 균열이라는 단단한 벽돌을 그 자리에 채우고 자기 자신의 무를 향해서 더 멀리 나아가려고 하는 시인의 몸짓은, 절망의 신음 속에서도 시지프스처럼 대단히 견고하고 끈질기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듯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집 한 채
안방의 어둠이 한 구석 자리를 잡고
한껏 깊어지고 있다



구석엔 그림자가 뒹굴고
마당에 뿌려진 적요들
나는 폐허를 사랑했다, 오래 사랑했다고
흙벽에 금이 간 가슴 한쪽이 그을음을 품었다  



주저앉은 행랑채를 핥고 있는 자글자글한 햇살
봄볕에 달구어진 빈집은
이름 불리기를 기다리는 착한 짐승 같다



달래를 키우고 있는 뒤란 
오래 밟아주지 않아 푸석푸석해진 땅
깨진 사금파리가 여기저기 박히고
달래를 캐가느라
다녀간 발자국들 여기저기 찍혀 있다



                                                                                ―「빈집」전문



    기이하게도 시집 전편이 아픈 시들로 가득 차 있다. 「목련」, 「붉은 게」, 「발칸산맥의 장미」, 「아침입니다」 등등…… 대부분의 시들은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시인의 아픈 생체험과 고통에 대한 극복의지를 철철 담고 있다. 그러나, 위 시에서럼 정신줄 놓치 않고 잘 버티어 온 것 같다. 자글자글한 봄볕에 잘 달구어진 집은 이제 새로 태어나려 한다. 이름이 불려지면 착한 짐승처럼 이 집은 와락 내달을 것 같다. 그러면 시인은 답을 해 줄 것 같다.
    “나는 폐허를 사랑했다, 오래 사랑했다고 흙벽에 금이 간 가슴 한쪽이 그을음을 품었다”고.
달래를 키우고 있는 뒤란과, 달래를 캐가느라 여기저기 찍힌 발자국들까지 데불고 빈집은 날아오를 것 같다. 빈집이어서 새 곡식으로 가득 채울 여지가 있는 시인의 시도 이름도 그렇게 가비얍게 날아오르기를 빌어본다. 









**약력: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레일라 바래다주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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