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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소시집/최서연/나는 개밥그릇입니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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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최서연
나는 개밥그릇입니다.
나의 주인은
똘망한 눈망울과
버선발로 귀를 쫑긋거리는
자그마한 강아지입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 상추처럼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세한 이야기와
개똥벌레 반짝이는
별빛 동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빨 빠지고 찌그러지고
이유 없이 발로 채여
물 한 모금 없이
엎어져 나뒹굴 때도 많습니다
진열장에 우아하게 앉아
특별한 손님을 기다리는
이름 있고 빛이 부셔
눈길 끄는 그릇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주인이 찾아오는 나는
온몸
반짝이며 주인을 기다리는 개밥그릇입니다
담쟁이
땅벌이
땡볕에 쏘인 듯 따가운 날
담쟁이
한 뼘씩 기어오른다
빛과 소리가
달팽이처럼 말려 들어간
산소 결핍증 앓는 요양병원에
한 줌의 햇살과
한 점의 바람 머무르라고
한 잎 한 잎
벽이며
기둥이며
지붕이며 굴뚝까지
나비 떼로 오른다
냉이꽃
어머니 호미질 하는 밭고랑에
싸라기로 핀 꽃
주걱 같은 잎이
두레상처럼 펼쳐있네
뻐꾸기 울음이
쌀뜨물로 뿌옇게 가라앉는
저물녘
멀건 한 술이라도 되었으면
상처
잠시만 봐달라는 부탁으로
마지못해 맡아버린 두 번째 주인도
냄새 나서 키울 수 없다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좁쌀만 한 눈곱이 엉겨붙은 눈은
햇살이 거미줄 타는 맨홀이었고
마른 솔가지 같은 꼬리는
등껍질 벗겨진 벌레로 엉덩이에 붙어있었다
시간에 맞추어 밥을 주며
이름을 불러준 지 오래되었지만
어쩌다 손이 닿을라치면,
불에 댄 듯 벌겋게 털을 세운다
살이 돋지 않는 상처란 저런 것인가
꼬리를 물고 있는 웅크린 등을 볼 때마다
감자 싹처럼 눈뜨고 있는 나의 상처는
엄살과 비명뿐인
과분한 사치였음을 생각한다
바람은,
바람은 최초의 말
문자가 없는
우주의 옹알이다
<시작메모>
죽을 때도 시를 물고서
푸른 사과가 익어간다.
나뭇잎이 발등을 덮는다
햇살과 바람과 빗방울을 덜어내는 몸짓이리라
나는 여름에 땀 베인 음절을 문장 같은 빨랫줄에 말리며
사과 알 몇 개
발등 덮는 나뭇잎 몇 장 주워
행간과 행간 사이에
이미지, 상징, 직유, 은유를 건다
― 「거풍」 중에서
듣는 것이 불편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말보다 사물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갑골문자에서 “文” 이라는 문자는 사람의 몸에 심장을 그려넣은 모습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쳐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라 했던 것처럼 나는 내 심장에 文을 그려넣으며 오늘도 하늘과 바람과 별에 노크를 하며 우주가 하는 말을 받아 적는다.
**약력: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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