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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신작시/안민/그림자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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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안민
그림자
병들고 지친
그를 끌고 오랫동안 길 위를 걸어왔다
그는 무척 야위어져 있고
나는 차츰 무게중심을 잃어가는 중이다
오늘은 퇴행 앓는 발을 힘겹게 옮기며
그를 공원 벤치에 놓아두었다
그와 함께해야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안다
비둘기 떼들이 아프게 나를 쪼아댄다
하지만 그만을 주시한다 나는
가로수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건물 벽에 부딪혀서도
심지어 바퀴에 깔려서도 그를 놓친 적 없다
이것이 내가 속한 영역이다
때론 내가 누군지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긴 그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기에
조우한 것들은 모두 다
도플갱어처럼 느껴진다 생의 대부분
바람 이는 한데였고 쓸쓸했지만
내 안의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내가 사라진다고 믿는 것은
착오이다 나는 그의 아득한 내면까지 스미어
함께 울었다 그리고
날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그를 인도했다
그가 허물어지고 혼란과 분열로
통증의 구간이 증폭될수록
나의 농도는 짙어져야 했다
그로부터 독립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두려운 것은 폭우나 눈보라 몰아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그와 내가 어떤 작별도 없이 분리되거나
내가 벌떡 일어나 그와 한 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허물어진 그를 끌고
왔던 길을 휘청대며 돌아가려 한다
그는 점점 휘어지고
나는 그를 지탱하려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동토로 가는 비
어떤 비는 해무보다 흐리다 누구도 젖지 않고 나만 젖는 밤,
일천구백 육십 몇 년 이래 나는 유목 중이고 나를 계획한 이에게선 어떤 안부도 없다
비를 닮은 이의 눈동자,
적막이 가득 고여 있다
- 걱정 말아요
- 막막합니다
내 전생은 회색 구름이었다고 어느 비문에 적혀 있었다
신앙이 기도하여 조형된 영혼은 어떤 종교일까
- 당신은 원래 그곳에 있었나요?
-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도 짙은 어둠 속이었고 내일도 그럴 것이고
흉가처럼 무너지는,
아득한 어느 대륙에 버려졌다가 혹은 흐린 저녁으로 저물었다가 이곳까지 흘러 왔을 육신,
- 이제 그만 멈추고 싶으세요
- 빈혈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겨울에 곧 당도할 것이다 누군가가 심장을 데워주길 기도하지만 크레바스는 메워지지 않을 거고
흔들리는 비,
- 누구든지 손금 속엔 안개가 흐르고 있지요
- 중세, 눈물 속에 살던 낙엽 냄새가 납니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곳에서 흔들린다 좌측은 잿빛 우측은 안개, 몸 속엔 여백만 가득하고
사람들이 나를 거짓으로 호명하는 게 들려온다
**약력:2010년 〈불교신문〉신춘문예로 등단. 부산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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