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63호/신작시/남길순/도요지에서 만난 사람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남길순
도요지에서 만난 사람
알고 보니 모두 기형이다
입을 벌린 항아리들
너무 오래 말을 참아 징소리가 나는군
사람들이
젖은 진흙을 받아들고
골똘하게 무언가를 빚고 있다
젖을 만지고
표정 없는 얼굴을 만지고
아득한 별을 만지듯 쓸개를 주무른다
풀썩
자신을 뭉개버린다
태초의 무늬를 잃고 아름다운 노랫말을 잊어버린
나는 어두운, 항아리
저 입 속에서
불붙는 나의 심장
도공은 달빛 한 자락 휘휘 물레질하여 가마에 긴 숨을 불어넣는다
빈 수레가 놓여있는 광장에
항아리들이 늘어난다
귀를 기울이며
항아리를 두드려보던 남자가
자신을 닮은 아이를 업고 가듯 새 항아리를 메고 간다
분홍의 시작
숲은
나의 어린 무대
바위 속에 집을 그리면
입속에 꿈틀거리는 벌레들이 살아난다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곳엔 복숭아밭이 있었고
아버지는
담장 위에 더 높은 담을 쌓고
복숭아 속에
벌레들을 길렀지
꽃은
나무의 겨드랑이에 고여 있던 물이 피어오른 거야
향기는 나무들의 숨 냄새야
눈을 뜨면 사방이 분홍인 방에 엎드려 일기를 쓰면
너는 어려도 모르는 게 없구나
벌레 있는 복숭아가 더 맛있는 거란다
아버지는 흰 광목으로 미라의 것처럼 내 발을 감고
복숭아나무에 나를 묶었다
뿌리에서부터 발작이 시작되면
연분홍 꽃들을 솎아 버리며
어느 나라 풍속처럼 뒤틀리고 작아진 발을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았다
노란 봉지 속에 복숭아를 싸 넣으며
더 많은 벌레들을 길렀다
치마 속으로
뱀이 기어들어오고
분홍물을 풀어놓은 복숭아밭 언덕너머로
힘센 기차가 기어들어올 때까지
분홍은 죽었다
그 많던 분홍이 다 죽어버렸다
**약력:2012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 이전글63호/신작시/김신숙/새끼회 외 1편 16.12.31
- 다음글63호/신작시/김연필/낮도깨비 외 1편 16.1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