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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신작시/김신숙/새끼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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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신숙
새끼회
정육점만 찾아다닌 적 있다 나는 젊었고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돼지 태반을 발견하면 멈춰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 개 있어요 암퇘지의 눈빛을 읽은 도살장 직원은 없었다 산달이 다 된 새끼는 뼈가 생겨 태반 속 새끼가 어릴수록 더 빨리 팔려갔다
첫사랑은 그 무렵을 닮은 음식처럼 냉정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를 죽여 버리겠어.” 사실은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생각했다 가장 끔찍한 것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썹칼로 반달만 한 상처를 만들어 가장 연약한 친구들을 골라 습작시처럼 보여 주었다 나는 젊었고 스무 살이었다
길을 걷다 아버지 등 닮은 사람을 만나면 한참을 따라 걸었다 그런 날 밤은 등뼈처럼 깊고 어둡다 나는 말없이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태반을 갈아 쪽파와 식초로 양념을 하고 한 그릇 걸쭉하게 해장하시던 아버지 그의 골격은 내 생의 뼈가 다 굳기 전에 무너져 버렸다
땅으로 떨어져 중력을 맛본 둥근 달을 찾아다닌 적 있다 정육점 스테인리스 쟁반 위 암퇘지의 자궁은 심장이 두 개인 채 도살되었다 첫사랑도 심장이 두 개인 채 도살되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낳지 않았지만 당신이 낳은 나를, 내가 살아왔다
오랫동안 뼈가 갈리지 않았다
강강시인
당신처럼 필명을 짓는다면 강강이라 지을 것이다 당신은 형태소 안에서 슬픈 강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강강은 강 약 중간 약 강 약 중간 약 당신이 그 강을 생각할 때 나는 강강을 생각하며 즐겁다 당신의 슬픔은 상류처럼 얼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시작한다 검은 바위에 부딪친 더 검은 통증들. 내 혀는 탕탕한 알사탕 하나를 다 물었을 뿐이다 나는 추르르르 알사탕 단물을 목젖 아래, 저 하류로 보냈을 뿐이다 당신의 사물과 시어는 계곡을 따라 둥글게 성찰하지만 나는 알사탕 하나를 강 약 중간 약 으스러뜨릴 뿐이다
세상이 촉묘피蜀猫皮와 같을 적, 겨울 창문 틈으로 바람 한 올 들어 온다 그 바람 속 잘린 고양이 수염 하나, 난간 위 고양이가 착지를 하듯, 사물과 시어가 만나는 감촉이란 습한 안개 밀가루처럼 질다
사물과 시어가 풀칠 된 그 좁은 길을 가르릉거리며 강강시인 기어간다 가령은 가르릉 떨리는 고양이 수염 끝자락, 가령은 아령을 든 사내 핏줄일 수도 있지만 고집만 늘어가는 슬픈 의문문일까 가령 슬픔이 있다 가령 슬픔이 없다 심장은 강 약 중간 약 뛰다가 멈출 줄 알고, 사물은 강 약 중간 약 으스러질 줄 안다 그런 근력은 없을까 울음과 사물 사이를 밀착시킬 수 있는, 사전에서 강강을 찾으면 어근이다 슬픔이 잘 정돈된 선반 위 문득 당신 시집 한 권 머물러 있고
슬픔은 참 반듯한 삼각주까지 밀려와 반듯한 지붕 한 권 만든다
**약력:2013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한라산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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