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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연재산문/이경림/5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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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이경림
50일
기억들
도서관에는 여전히 익숙한 얼굴들이 거의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주말에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평일 오전이라 노인들이 많았다. 자주 들리다 보니 더러 아는 얼굴도 생겨 조용히 눈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두어 주, 걸러 오니 몇몇의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창가 쪽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살구색 원피스에 연 하늘색 스웨터를 걸친 할머니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책을 읽는 모습은 어느 서양화의 한 장면 같아 뭐라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내가 늘 앉는 자리에 한 젊은이가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어 창가 쪽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집에서 가져간 수잔 워커의 『speaking of silence』를 읽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에 사 놓은, 인도의 나로바 연구소에서 있던 명상에 관한 대화집을 이번 여행에 가져온 것이다. 카톨릭 수사와 승려들의 영적 수련 과정이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는 책이었다. ‘종교란 궁극에의 추구’라고 한 말이 눈에 들어온다. 神과 空, 침묵, 禪, 慈悲, 죄 고난, 자아…… 모두 어려운 주제들이다. 존재의 근원이 침묵이었고 결국 모든 존재는 침묵 쪽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들이라 생각하니 나무 새, 사람 꽃 개 고양이 나비…… 이름 지어진 현존들이 마치 한 덩이 치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으로 보이는 공원 구석의 아름드리나무 아래에는 몇몇의 홈리스들이 여전히 자신의 배낭과 함께 우두커니 앉아 있다. 몸이라는 배낭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이 결국 저렇게 짐이 되어 끌려다니는 것이다. 그 맞은 편 나무에 기댄 사람은 책을 읽고 있다. 노숙자의 독서라……. 餘裕란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는 길에는 한동안 들리지 못한 마리엔의 가게에 가 보리라 마음먹고 조금 일찍 도서관의 문을 나선다. 창가의 노인은 점심시간 잠깐 자리를 비운 것 외에는 꼼짝 않고 독서에 빠져 있다. 책, 사람, 책상, 창밖의 공원풍경…… 잠깐 스쳐가는 저 영상들을 스톱 모션으로 잡아둘 수 있다면 침묵의 형상들이 될까?
켈리포니아산의 매운 태양열이 조금 수굿해지는 시간,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마리엔의 가게에 점멸등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길 건너에서 바라본 가게 안은 은빛으로 은은하다. 마리엔은 책을 펼쳐 놓은 채 우두커니 유리 밖을 내다보다가 밖에서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내가 육중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는,
-어디 여행이라도 갔었나요?
하고 묻는다.
-네 , 여기 저기.
-멀리?
-아뇨, 썹웨이로 갈 수 있는 곳…… 다운타운, 산타바바라, 산타모니카, 할리우드 치노힐 오렌지, 카운티, 풀러톤…….
그는 웃으며 어디가 좋았냐고 묻는다
-뭐, 전부 다…….
내가 간단히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한 번 가게에 들렸더니 문이 닫혀 있더군요.
하고 말하자, 그는 문득 어두운 얼굴이 되어 오래 친분이 있던 이웃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용조용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어요. 정의롭고 착한 사람이었죠. ‘한국전쟁 참전용사’란 것이 그의 프라이드였죠. 그가 참전했을 때 그는 신혼이었어요. 그런데 그의 첫 부인은 잘못 배달된 그의 전사통보를 받고 슬퍼하다가 1년 후 다른 사람과 재혼했죠.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로부터 일 년 후 남편이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부인의 재혼을 알고 그 분도 얼마 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죠.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너무 사랑했던 거예요. 결국 5년 후 두 사람 다 이혼을 하고 다시 만났죠.
그는 무슨 재미있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감동적인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주 특별한 사랑이네요.
-네, 그 부인은 아직도 건강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사실 그들의 사랑이 부럽다고 했다.
-한 사람의 생에서 그런 사랑을 만나기는 아주 힘들죠. 어쩌면 두 사람 다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샌타넬라 市 샌와킨밸리 국립묘지에 묻힌 그의 장례식에 갔었죠.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장례식이었어요.
조금 뜸을 들이다가 그녀가 말했다.
-요즘은 이따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돼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나이 때문이겠죠?
그녀는 내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우리고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렵나요?
하고 스스로에게 묻듯 물었다.
-이따금…… 그렇지만 점점 편안해지겠죠.
-As the evening comes morning is coming…….
그녀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now your expression is a very literary.
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I am a poet.
하자 그는 연신 라잇 라잇 하며 웃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빈 방, 빈 욕실, 빈 거실, 빈 베란다, 빈 주방이 다만 침묵으로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빈방, 빈 욕실, 빈 거실, 빈 베란다의 문을 열고 닫으며 거무스래 갇혀있던 침묵들이 서로 몸을 섞을 때까지 침묵과 함께 걸어본다. 문득 마리엔에게 들은, 그 참전용사의 사랑이 떠오른다.
그런…… 사랑을 본 적 있다.
이십대의 문턱이었다, 휴학 중 잠깐 軍病院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그 때 병원은 매일 후송되어오는 부상 군인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월남전 참전 군인들이었다. 병동 안의 흰 커버가 씌워진 단조로운 침대 위에는 팔다리가 잘려진 젊은 군인들로 가득했다. 누구는 머리끝까지 홑이불을 쓰고 짐승소리로 울부짖고 또 누구는 물끄러미 제 상처를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피비린내와 포르말린 냄새, 에테르 냄새 같은 것들이 병원을 뒤덮었다. 긴 낭하를 따라 흰 가운을 입은 군의관들과 간호장교들이 문득문득 나타났다가는 낭하의 중간, 혹은 끝에서 왼쪽 또는 오른 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김 수병, 이 수병 혹은 전 수병, 곽 중사라 불리던 그들은 하나같이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손가락 몇이 없거나 한 환자들이었다. 김 수병은 월남 ○○지역에다 왼쪽 다리를 두고 왔다 하고. 이 수병은 ○○에다 오른팔을 두고 왔다했다, 전 수병은 ○○에서 골뚜껑에 구멍이 뚫리고, 곽 중사는 ○○에다 손가락 세 개를 두고 왔다 했다. 팔다리 전부를 거기다 두고 통나무 같은 몸뚱이만 굴러온 이 수병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그 병동에서 만났다. 그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대 사이를 흐르는 메콩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힘으로 다리가 없는 줄도 모르고 펄쩍 뛰어오르다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없는 팔을 들어 허공으로 삿대질을 하는 일이 전부였다. 사랑하는 조국은 이따금 위문공연이나 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 여가수가 침대 사이를 돌며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사 돌아왔네…….’하고 엉덩이를 살짝살짝 돌리면 없는 팔다리들이 돌아와 휫휫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나 어김없이 밤은 오고 곽 중사는 ○○로 손가락을 찾으러 가고 김 수병과 이 수병은 ○○와 ○○로 왼팔과 오른 다리를 찾으러가고 전 수병은 ○○로 골뚜껑을 찾으러 떠났다. 병동은 텅 비고 아비규환의 전투소리만 귀청을 찢었다.
-개새끼들, 내 팔 내놔!
-내 다리 내놔.
當職醫는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진지 오래, 낭하에는 묵 같은 어둠만 번들거렸다.
*
k 원사의 시신은 병원 뒤에 있는 허룩한 해부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여전히 군인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처럼 목을 빳빳이 세우고 똑바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잿빛 얼굴과 푸르스름하게 변색된 몸은 단번에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약간 큰 키에 다부지게 생긴 닥터 문이 수술용 메스를 그의 가슴 중앙의 갈비뼈 아래에 박고 천천히 ㅅ자로 갈랐다. 그러자 속에서 오십 몇 년 간 웅크리고 있던 피톨들이 일시에 세상 밖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는 노련하게 한 쪽 손에 들린 거즈로 그 부분을 누르고 피를 닦아내며 피부를 벌려 속의 장기들을 헤집어 냈다.
-이 아저씨 속은 완전 굴뚝이군. 담배를 얼마나 피워댔으면 이 지경이 됐을까?
그는 검게 그을린 폐를 저울 위에 올려 놓으며 연신 쯧쯧 혀를 찼다.
-어디, 이 아저씨 간은 몇 그램이나 되나 볼까? 천 팔백? 어이쿠 이 아저씨, 간을 엄청나게 키우셨네.
그는 저울에 얹혀 있는 간과 폐를 집어 수술용 도마에 놓고 토막토막 자르고 그 중 하나를 간호사에게 넘겨주며,
-슬라이딩!
했다. 그 때까지 그의 속은 채 식지 않은 피로 흥건했고 그 속에 그가 걸어온 길처럼 구불구불한 내장들이 희끄무레 잠겨 있었다.
-근데, 이 아저씨 죽는 순간까지 이북에서 헤어진 본처만 불렀다며?
-그래서 이쪽 마누라가 열 받아서 아직도 저 문 밖에서 욕을 퍼붓고 있잖아요.
간호 조교 김 하사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다 까닭이 있어요. 본처를 이십년 만에 이쪽에서 만났다쟎아요. 둘 다 십오 년을 서로 찾다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 막 가정을 이루고 살려는 판에.
-그렇게 기구한 사연이? 아저씨, 당신 인생도 어지간히 꼬였구려. 꽈배기처럼.
닥터 문은 연신 물컹한 내장들을 꺼내 얇게 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ok, next!
그의 말이 떨어지자 수술용 톱이 생나무 켜는 소리를 내며 골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그의 腦가 구불구불 수술대 위로 흘러나왔다. 그는 그것도 저울에 달고 나붓나붓 썰었다.
-그래봐야 그의 고뇌는 고작 천이백 그램이었어.
농담처럼 그가 말했다.
…….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천장에서 한 바가지 침묵을 쏟아 부은 것처럼. 수술용 라이트가 눈을 찔렀다. 그 때 우리는 허공의 잔털이 다 보이는 어떤 未知 속에서 한 인간의 고뇌가 집중조명 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이, 아저씨 수고하셨어요.
그는 너덜너덜 흩어져 있는 내장을 그의 속에 도로 쓸어 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밖에서 죽은 듯 누워있는 그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
-다 끝났으니 이제 예쁘게 꿰매드릴게요.
그는 토막 난 내장들이 흥건히 들어있는 그의 배를 다시 ㅅ자로 꿰매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말했다. 비린내로 가득한, 딱히 표현 할 수 없는 열기가 방안 가득 흘러 다녔다.
가운을 벗고 막 손을 씻으려 할 때였다. 개수대로부터 비스듬히 왼쪽으로 놓여 있는 수술대 위에, 마른 나뭇가지 같은 그의 손이 수술용 스텐리스 판의 가장자리를 가만히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자신의 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는 동안 그는 그저 수술대 가장자리를 가만히 쥔 채 허공으로 동공을 활짝 열고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 끊임없이 집중 조명되고 있었다. 여기! 저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은빛 수술대를 옹크려 잡은 갈퀴손들이 보였다.
*
a는 열시가 훨씬 지나서야 돌아왔다. 데니는 친구 집에서 과제물을 같이하고 있다고 전화가 오고 팀은 또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말상대를 만난 늙은이처럼 a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늘 들은 참전용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떠오른 나의 기억 속의 사랑에 대해 말했다. 샤워한 몸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a가 말했다.
-그래서 엄만 그런 사랑이 좋다는 거야?
-나, 참, 사랑에 좋다 나쁘다가 어디 있니?
-그럼 뭐라 생각하는데 엄만? 사랑이란 거…….
-글쎄 그저 교통사고 같은 거? 피할 수 없는 소나기 같은 거? 성폭행 같은 거?
-그래서? 이제 보니 엄만 사랑에 대해 몹시 부정적이시군.
-꼭 그렇진 않아. 마치 꽃처럼 피어나는 사랑도 있나보더라. 대부분 희망사항 이겠지만.
-엄만 그런 사랑 없었어?
-나……?
문득 한 기억이 젖은 널빤지 조각을 밟고 와 녹슨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k 원사가 해부되던 그 날, 퇴근길이었다. 휴학 후 매 끼니가 걱정이던 집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얻은 그 일자리는 사실 내게 지옥이었다. 종일 피비린내와 소독내에 절어 있다가 버스를 타면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흘끔흘끔 쳐다보다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 그곳은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으므로 나는 눈만 뜨면 도망치듯 그 피비린내 속을 찾아들었다. 퇴근 시간마다 나는 집으로 가는 일이 무서웠다. 텅 빈 쌀독, 허기에 지친 동생들, 부재중인 아버지, 심약한 어머니…….
가능하다면 나도 팔 다리가 끊어지던지 골뚜껑에 총알자국이라도 나서 그들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그날, 나는 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병원 문을 나와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길고 낡은 시멘트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흰 지붕의 통근 버스 두 대가 지나갔다. 그 속에 나를 아는 몇몇의 얼굴들이 왜 타지 않았냐는 얼굴을 하고 뭐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두어 번 손을 흔들었다. 판잣집들이 즐비한 내리막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울퉁불퉁 돌들이 박혀 있어 구두를 신고 걷기에는 불편했다.
흐린 하늘이 드문드문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잿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등 뒤에서 자동차 클랙슨이 울리고 군용 짚이 서더니 소리쳤다.
-유! 왜 버스도 안 타고 혼자서 걸어가고 있어요?
낮에 해부를 집도한 닥터 문이었다. 그는,
-집이 어디죠? 같은 방향이면 데려다 줄게요.
했다.
-아뇨. 좀 멀어요. 그냥 걸어가고 싶어서요.
나의 대답이 아리송했는지 그는,
-타요. 눈도 내리고 슬슬 추워지잖아? 좀 있으면 어두워질 텐데 아가씨가 걸어가긴 좀 그렇지?
하며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의 곁에 앉은 나는 차가 한참을 달리도록 우두커니 앉아 저물어가는 잿빛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집이 돈암동이죠?
하고 그가 물었다.
-어떻게 그걸…….
내가 놀라는 표정으로 묻자 그는,
-내가 좀 일아 봤죠. 성신여고 밑, 맞죠?
점점 미궁에 빠진 사람처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그는 장난스럽게,
-난 다 알지요. 한 가지 더 맞춰볼까요?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빙긋 웃으며 그는 놀리듯 말했다.
-w의대 일학년 휴학 중? 고등학교 때는 글을 잘 쓰는 문학소녀?
거기까지 듣자 문득 불쾌감과 함께 영문 모를 두려움 같은 것이 일었다. 차는 신설동 로터리를 돌아 보문동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집은 한참 더 가야 하는데? 왜, 나 때문에 기분 나빴나요? 오해하지 말아요. 사실 별 거 아니야. 내 막내 동생이 C여고, 유와 동창이거든. 며칠 전 우연히 유, 이야기를 하다가 그 아이가 일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라고 반가워 하더군. 동암동 종점에서 전차를 같이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누구?
-문재희 라고, 생각나요?
-아, 재희가 선생님 동생? 깜짝 놀랐잖아요.
내가 안도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그러니까 이제 안 내려도 되지요? 아가씨?
하며 차를 몰았다. 저녁나절이라 그런지 이상한 우울 같은 것이 차안을 어른거렸다. 문득 수술대 가장자리를 가만히 쥐고 있던 K 원사의 주검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죽음이, 아니, 주검이 두렵지 않으세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차창으로 달려드는 어둠과 성긴 눈발들을 보며 묵묵히 핸들을 돌렸다. 그제야 나는 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 돈암동 지났어요. 보세요! 미아리예요,
내가 놀라 그의 팔을 쿡쿡 찌르자 그는 알고 있다는 듯 그저 묵묵히 차를 몰았다.
-왜 무서워요? 내가 어디 납치할까봐?
-…….
납치 좀 당하면 안 되나? 어차피 우리 모두 K 원사처럼 될 텐데?
나는 좀 전까지 최대한 늦게 귀가할 핑계거리를 궁리하던 일이 생각나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아마 지금 내 몸에도, 유의 몸에도 시취가 날 걸? 모르는 사람이 옆에 탔으면 기절할 냄새!
그는 시니컬하게 흐흐 웃었다.
-의사 별 거 아니예요. 오늘 해부하는 것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가령 푸줏간 정육쟁이라던가…….
-선생님은 죽음이 아니 주검이 두렵지 않으세요?
-유는, 죽은 생선이 두려워요? 이건 좀 비유가 조금 그렇지만…….
나는 문득 죽은 생선이란 말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거북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집 전봇대 길 사람 나무들…… 이 제나름의 어둠을 쓰고 스치듯 지나갔다. 슬픔의 형상이 있다면 저런 것이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지나갔다.
-왜 휴학했는지 그런 거 물으면 재미없겠지?
-…….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네.
-…….
눈이 그쳤다. 그는 수유리 어디쯤에서 사잇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들어가더니 숲의 입구 주차장에 세웠다. 그리고 4, 19 묘지 입구라고 안내판이 붙어 있는 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가 희미하게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둑한 숲길을 조금 올라가자 넓고 평평한 묘원이 나타나고 일정한 크기의 묘석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는 위 쪽 가운데 쯤 있는 한 묘석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는 몇 발짝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내 동생이예요. 재희 위의 오빠.
하고 소개를 했다. 묘석에는 S대 4년 문○○. 라고 새겨져 있었다.
-재희에게 한 번도 못 들은 이야긴데……. 그런 일이!
-난 이 녀석을 무척 좋아했죠. 낭만적이고 영민한 녀석이었어요. 눈치 안 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놈이 사실 부럽기도 했죠. 살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이따금 이 녀석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요. 가령 오늘 같은 날?
-오늘 수술 많이 힘드셨나보죠?
나는 툭툭 장난 같은 말을 던지며 해부를 하던 그가 생각나고 어쩜 그것이 외로움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 녀석 죽고 이 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오늘이 어머님 돌아가신 날.
-아들 잃은 슬픔이 병이 되셨나 봐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
-…….
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등성이 너머 희미하게 돋은 별을 가리키며,
-저 별은 참 성급하단 말야. 해도 채 지기 전에 도착하거든. 그러니까 주목을 못 받지.
하며 장난스래 말했다. 어둠이 도둑떼처럼 몰려오고 눈발은 시나브로 그쳤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갔다.
-유는 눈이 참 슬퍼. 유를 처음 봤을 때 왜 그리 슬퍼 보였는지. 그런 눈은 처음 본 거 같아.
-지금 선생님도 슬퍼 보여요.
그는 계곡에 손을 씻으며 우리 같이 시취나 닦아낼까? 하며 그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계곡물은 얼음처럼 찼다.
-복학할 건가?
- 아직…….
-그는 손가락으로 물을 톡톡 퉁기며 말했다.
-뭐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하려고 해요? 가령 좋아하는 문학 쪽으로 가면 그 성적 가지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냥 웃었다. ‘가난이 너무 끔직해서 그렇다고, 텅 빈 쌀독을 들여다 본적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했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로 가득했다. 그는 유난히 크고 까만 바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난 이따금 이곳, 밤의 돌멩이들이 보고 싶어요. 밤의 돌멩이들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같거든.
풀벌레 울음 같기도 하고 돌멩이들의 노래 같기도 한 소리들이 골짜기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아우성 같기도 하고 누군지 한 사람이 부르는 합창 같기도 한 소리들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돌멩이들은 멋진 소리를 가졌죠?
-노래 부르는 걸까? 우는 걸까?
-이야기하는 거죠.
-그게 그거 아닐까?
-아뇨! 틀려요.
그리고 우리는 정수리 위에서 각각의 별들이 점점 또렷이 눈뜨는 장관을 지켜보았다. 소나무 숲 사이에서 뭔가 분명치 않은 소리로 울었다.
-개미도 울까요?
내가 물었다.
-태어나고 죽는 것들은 다 울지 않을까? 소리 내지 않을 뿐이지.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추워지는 군, 그만 가지.
하며 일어섰다. 그때 우리는 그의 군용 랜턴이 비춰주는 원뿔 모양의 빛을 따라 걸었다. 숲의 입구에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외등하나가 뿌옇게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선생님은, 저 외등이 뭐 같아요?
- 글쎄…….
-외눈박이 神!
그는 의외라는 듯 우두커니 외등을 보다가 거기 등을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솔잎 사이사이를 다 지나 허공으로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유, 저 산 위를 봐,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어디서부터 땅이지?
그는 나의 손을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며 산의 능선이 실금처럼 흘러가는 등성이를 가리켰다.
-신비로워요.
-뭐가?
-어둠이.
우리는 문득 길고 느린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에서 비릿하게 屍臭가 났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나뭇가지에 걸려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초겨울 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소나무 숲을 스치는 풍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병원에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부상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k 원사처럼, 누군가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닥터 문은 거의 매일 누군가의 배를 가르고.
아침, 저녁 수병들의 점호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렸다. 아, 그리고 어느 날인가, 3병동에 근무하던 미대 휴학생 미스 김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L 하사가 쏜 총에 심장을 맞아 즉사하기도 했다.
이따금 나는 짓뭉개진 산나리꽃무늬가 박혀 있는 돌들의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꾸곤 한다.
**약력: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한국문학 번역원 선정 영어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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